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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4.20 20:58 수정 : 2012.07.18 13:37

2004년 버마-타이 국경에서 열린 버마학생민주전선의 8888항쟁 16주년 기념행사. 버마학생민주전선은 국경의 민주혁명세력 가운데 아직도 미약하나마 유일하게 무장투쟁을 벌여왔다. 정문태

[토요판] 특집
랑군의 봄, 마지막 전사의 편지

▶ 국제분쟁 전문기자로 40여개국의 전선을 취재해온 정문태씨는 1989년부터 버마 반정부세력의 무장투쟁 현장을 지켜본 저널리스트다. 1995년과 1996년에는 버마 민주화운동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를 랑군 자택에서 두해에 걸쳐 단독인터뷰해 버마 외교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결국 1996년부터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으며, 이는 2012년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버마 정부가 여전히 말로만 언론자유를 보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버마 민주화투쟁 주요 용어해설

▶ 국민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1988년 버마 민주항쟁 과정에서 아웅산 수치가 중심이 되어 창설한 정당. 1990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으나 군부의 정권 이양 거부로 정부 구성에 실패했다. 2010년 총선을 거부했던 국민민주연맹은 올해 4월1일 보궐선거에 참여해 44석 가운데 43석을 차지했다.

▶ 카렌민족해방군(Karen National Liberation Army)

버마로부터 자치·독립을 요구해 온 카렌족 정치조직인 카렌민족연합(Karen National Union)의 군사조직으로 1949년부터 버마 정부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여왔다. 현재 카렌민족해방군은 버마-타이 국경을 낀 해방구에 7개 연대 4000여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

▶ 8888과 버마학생민주전선

8888은 1988년 8월8일 버마 청년·학생들이 이끌었던 반독재 민주항쟁을 일컫는다. 그 과정에서 군인들의 유혈진압으로 4000여명의 시민들이 살해당했고, 군인들에 쫓긴 청년·학생 1만여명이 타이와 인도를 비롯한 국경으로 빠져나갔다. 이들은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All Burma Students’ Democratic Front)을 조직해 정부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여왔고, 그 과정에서 460여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다. 현재 학생군 500여명은 타이·중국·인도 국경에서 소수민족해방군과 함께 있으며, 그중 150여명은 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 안티 수(Aunty Suu)

버마의 국부로 불리는 아웅산 장군의 딸이자 민주화운동가인 아웅산 수치를 친밀하게 부르는 이름. 번역하면 ‘수 이모’쯤 된다. 8888항쟁 때부터 부르던 애칭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밀담·특사·평화회담·제재 완화…
중국 재원으로 지으려던
‘밋손 댐’ 건설계획까지 중지

중국한테도 포기할 수 없는 숨통
테인 세인 정부, 빗장 풀면서도
두 강대국 사이 깊어가는 고민

버마-타이 국경의 민족해방·민주혁명전선에도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밀어닥치고 있다. 소수민족해방단체나 민주혁명조직 쪽 사람들을 만나면 저마다 한 자락씩 버마 정부와 주고받은 밀담 사연을 털어놓는다. 이미 랑군을 다녀온 이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현재 국경에서는 버마 정부와 각 소수민족해방군들 사이에 벌어지는 평화회담이 변화의 중심 노릇을 하고 있다. 지난 1월부터 버마 정부는 카렌민족해방군(KNLA), 친민족전선(CNF), 몬민족해방군(MNLA), 카레니군(KA), 아라칸해방군(ALA), 샨주군(SSA)과 각각 휴전협정을 맺었다. 소수민족해방군 주력 가운데 이제 남은 곳은 아직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북부 카친독립군(KIA)뿐이다. 그런 가운데 버마 정부가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던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과 평화회담을 시작한 건 최근 변화의 질과 양을 가늠할 잣대로 삼을 만하다. 비록 전력은 미약하지만 민주혁명세력 가운데 유일하게 무장투쟁을 벌여온 버마학생민주전선을 평화회담 상대로 인정했다는 건 현 정부가 전면적인 내전 종식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이렇듯, 랑군뿐 아니라 국경까지 동시다발로 불어대는 변화의 바람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결론부터 말해, 이 바람의 진행방향과 속도를 눈여겨보면 버마 안에서 일어난 자연풍이라기보다 바깥에서 불어온 인공풍일 가능성이 크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의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버마 정부와 건설적인 관계 설정 가능성을 처음으로 입에 올렸다. 그때부터 두 나라는 물밑 접촉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총선을 거쳐 2011년 3월 출범한 테인 세인 대통령이 아웅산 수치와 밀담을 나눴다는 정보가 흘러나왔고, 곧이어 미국 정부는 특사를 파견했다. 그 무렵 아웅산 수치는 “테인 세인과 충분히 협력할 수 있다”며 경제제재 해제 가능성을 거론했다. 9월 말 테인 세인은 외무장관을 워싱턴으로 파견했다. 10월 들어 그는 버마 북부 카친 지역에 중국 재원으로 건설하려던 4조원대 밋손댐 계획을 정지시켰다. 버마-중국 관계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버마 안팎에서 즉각 반응이 왔다. 아웅산 수치의 국민민주연맹은 이듬해 4월로 예상되는 보궐선거 참가 결정을 선언했고 이내 정당 등록을 마쳤다. 오바마는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의 랑군 파견을 밝혔고,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ASEAN)은 버마의 2014년 의장국을 승인했다. 11월 아시아 방문에 나선 오바마는 중국확장정책 저지를 복선에 깐 태평양의 세기(Pacific Century)란 개념을 내놓았다.

이어 12월 버마를 방문한 클린턴은 테인 세인을 만나 국제통화기금(IMF) 활용 방안과 함께 경제제재 해제 가능성을 밝혔다. 클린턴은 기자회견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방문이 아니다”라고 밝혀 오히려 그 방문의 성격을 더 또렷이 드러냈다. 2012년 들어서자마자 테인 세인 정부는 모든 소수민족해방세력들과 평화회담을 벌여나갔고, 4월1일 보궐선거에 참가한 아웅산 수치와 국민민주연맹은 44석 가운데 43석을 싹쓸이하며 현실 정치판으로 뛰어들었다.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아웅산 수치의 정치판 진입 허용과 소수민족해방세력들과 평화회담을 추진해온 테인 세인 정부에 미국은 선거가 끝나고 3일 만인 4월4일 경제제재 완화를 밝히며 화답했다.

테인 세인 정부가 변화의 속도를 높인 데는 경제제재 해제라는 현실적인 이유뿐 아니라 다가오는 2014년 아세안 의장국으로서 위상과 2015년 총선 대비라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새로운 인공풍이 강한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역풍은 지난 20년 동안 버마를 뒤덮어 온 중국산 인공풍이다. 중국은 미국과 유럽이 경제제재를 발동하며 빠져나간 버마에 경제는 말할 나위도 없고 군사적 지원에다 외교적 바람막이 노릇까지 했다. 그 20년 동안 버마 군인 독재자들이 기댈 곳은 중국뿐이었다.

중국한테도 버마는 자원창고와 소비시장일 뿐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숨통에 해당한다. 예컨대, 비상시 남중국해가 차단당할 경우 원유 수송로를 비롯해 중국이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버마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중국봉쇄정책을 지녀온 미국이 최근 서둘러 버마를 지목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이 버마를 확보한다면 지정학적으로 중국포위전략은 완성되는 셈이다.

버마 정부의 고민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 경제, 군사, 외교적으로 지나치게 중국에 의존해온 버마 정부가 최근 새로운 바람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국경을 맞댄 거대한 중국을 쉽사리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테인 세인뿐 아니라 심지어 야당 정치인인 아웅산 수치마저 중국과 전통적인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메시지를 기회 있을 때마다 날려온 이유다.

이 새로운 바람을 놓고 지금껏 중국 정부는 “버마가 누구와도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밝혔다. 그러나 언론들은 연일 미국의 버마 개입 차단을 외치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군인 독재자들에게 갇혀왔던 버마가 문을 열고 있다. 그러나 두 초강대국이 버마 땅에 불어댈 바람이 어디로 튈지를 예측하기엔 아직 너무 이르다. 다만 그 바람이 순풍으로 지나가지 않으리란 사실만은 분명하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network@loxinfo.co.th

(※클릭하면 이미지가 확대됩니다.)


“카렌과 카친, 버마군은 늘 한쪽 묶고 한쪽 공격”

카렌민족연합 타카보 부의장

카렌민족연합 데이비드 타카보 부의장.
요즘 버마를 끼고 도는 변화의 바람이 국경에 밀어닥치면서 소수민족해방세력을 이끌어온 카렌민족연합이 흔들리고 있다. 특히 버마 정부와 평화회담을 놓고 카렌 내분이 극에 달한 모양새다. 1948년 버마 독립 뒤부터 세계 최장기 민족분쟁을 겪어온 카렌민족연합은 의장이자 세계 최장수 게릴라 지도자인 탐라보(Tamlabaw·92세) 장군이 기력을 잃으면서 중심축마저 무너진 상태다.

4월6일 카렌민족연합 매솟 연락사무소에서 오랜만에 만난 데이비드 타카보(David Tharckabaw·77) 부의장 얼굴은 편찮아 보였다. 복잡한 카렌민족연합 분위기가 그대로 묻어났다.

카렌 출신으로 랑군대학 시절 버마학생회연합(ABSFU)을 이끈 학생운동 지도자로 이름을 날린 데이비드 타카보는 졸업과 함께 카렌민족연합에 참여해 50년 넘게 민족해방운동사를 이끌어온 지도자이자 산증인 가운데 한 명이다.

-지난 1월12일 평화회담(예비회담) 잘 된 것 같나?

“모르지. 버마 정부가 설치는 데 말려들어 사인하는 데 급급했으니.”

-카렌민족해방군(KNLA) 전투상보 보니 평화회담 뒤에도 5여단 쪽에서 버마 정부군 66사단과 4번이나 충돌한 걸로 나오던데, 서로 인명 피해도 났고?

“내 말이 그 말이다. 사인만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휴전협정 한두 번이었나. 그게 얼마나 갔나. 게다가 우리 아이들이 싸울 줄도 몰라. 평화협정 맺기 전인 지금이 무장 키우는 데는 적기니 쉽게 사인해줄 게 아니라 시간 벌어야 옳다. 급한 건 저쪽이니까.”

-당신 말 듣고 있자니 평화회담 주축들인 카렌 군부 쪽에 대한 불만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틀 전 2차 회담 대표들이 랑군으로 떠났는데 여전히 부정적으로 본다는 뜻인가?

“버마 군인을 잘 봐라. 몇 해 전까진 카친독립군(KIA)과 휴전 맺고 우리를 때리더니 이젠 우리와 평화회담 펼쳐놓고 카친을 치고 있단 말이다. 민족해방전선 두 축이 카렌과 카친인데, 늘 둘 가운데 한쪽 묶어 놓고 다른 쪽을 공격했다. 말려들면 안 된다는 거다.”

-평화협정 놓고 카렌 분열상이 드러났는데, 어떤 라인들인가?

“뻔한 거지. 1차 회담 끌고 갔던 군 참모장 무투 새포, 데이비드 토, 로저 킨 같은 이들이 한통속이다.”

-그러면 당신 라인은?

“실무 쪽인 사무총장(탐라보 의장의 딸 지포라), 제1, 제2 사무부총장과 같은 라인이지.”

-두 라인 차이가 뭔가?

“저쪽은 기회주의자들이지. 우린 현실주의자라고 해두자.”

-그 기준이 뭔가?

“저이들은 평화회담을 개인 잇속 챙기는 사업으로 여기는 거다. 벌써 버마 정부가 한몫씩 챙겨줬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이탈타이 같은 타이 업체가 관여를 했다.”

- 내분은 어떻게 풀어나갈 건가?

“9월 말 10월 초에 카렌민족연합 대표의회가 열리니까 결판날 거다. 새 지도부 선출로 문제를 풀 수밖에는 없다. 그때 기회주의자, 배신자들 응징할 거다.”

-당신이 의장으로 출마할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타카보 부의장은 거침없이 실명을 쏟아내며 기회주의자, 배신자라고 공격을 했다. 순탄치 않을 카렌민족연합 앞날을 예감했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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