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2일 울산시 양정동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열린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의 결의대회 도중 한 노동자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이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 문제와 관련해 정규직 노조 집행부와 회사의 협상을 한때 가로막으며 마찰을 빚었다. 울산/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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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900만 시대의 어둠
정부와 경영계의 비웃음 속에올해도 민주노총은 ‘뻥 파업’만
노동계 힘은 약해지고
정리해고나 노골적 노조파괴에
대공장 노조조차도 속수무책 ‘민주노조’가 무너지고 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진 지 25년이 흐른 2012년, 노동운동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 20년 넘게 목숨까지 던져가며 지켜냈던 노조가 맥없이 주저앉고 있다.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대공장(대기업) 노조도 예외가 없다. 사용자들은 창조컨설팅이라는 ‘노조 파괴’ 업체까지 동원해 대놓고 노조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노동계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한때 ‘노동해방’, ‘평등사회’를 꿈꿨던 노동운동의 역동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분노마저 제대로 모아내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안팎에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말하지만, 그저 말뿐이다.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올해도 민주노총은 ‘뻥 파업’을 반복했다. 정부와 경영계는 비웃었고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만도·서울지하철 등 대공장 노조 몰락 지난 7~8월 우리나라 최대 자동차 부품회사인 만도의 민주노조가 무너졌다.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버텨왔던 노조가 직장폐쇄 ‘한방’에 처참하게 몰락했다. 노동계는 놀랐다. “어떻게 만도가…” 충격이 컸다. 1987년 8월14일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만도 노조는 노동운동의 역사와 함께했다. 노동계 숙원 과제였던 금속 산업별 노조가 출범할 때(2001년) 가장 앞장선 곳도 만도였다. 우리나라 최대 노조인 현대차노조도 지금까지 하지 못하고 있는 산업별 교섭도 만도는 오래전부터 참여하고 있었다. 만도는 노동운동의 모범 사업장이다. ‘직장폐쇄 → 용역 투입 → 회사쪽에 가까운 노조 설립’으로 이어지는 노조 파괴 시나리오에 걸려든 만도는 2300여명이던 조합원이 불과 보름 만에 200여명으로 10분의 1 미만으로 줄었다. 서울지하철노조가 지난해 4월 민주노총을 탈퇴하고 ‘제3노총’에 가입한 것도 노동계에겐 뼈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물론 최근 법원에서 민주노총 탈퇴는 규약상 조합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데 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며 무효라는 판결이 나오긴 했다. 하지만 조합원의 절반 이상인 53%가 민주노총을 버리는 데 찬성한 점은 그냥 넘기기 어려운 결과다. 서울지하철노조가 민주노총 안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상징적 의미가 큰 탓이다. 서울지하철노조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뒤,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와 전국노동자협의회(전노협)의 핵심 사업장으로 1995년 민주노총의 출범 동력이 됐다. 1999년 4월19일 서울시의 구조조정 계획에 맞서 당시 공공기관으로는 처음으로 8일 동안 총파업에 들어갔고 6000명이 넘게 징계를 받는 등 민주노총 안에서는 ‘투쟁의 상징’과도 같은 사업장이었다. 대공장 노조의 몰락은 민주노조 운동의 신호탄이 됐던 ‘87년의 힘’이 사라지고 있다는 징후다. 무력화는 오래전에 시작됐다. 1990년 ‘골리앗 크레인’ 농성의 원조였던 현대중공업도 1994년 이후에 파업을 하지 않고 있다. 노조는 파업을 하는 대신 회사와 공존을 선택했다. 경영계는 ‘새로운 노사관계’라고 칭송했고, 노동계는 ‘어용노조’라고 폄훼했다. 지난해 7월 단결권 확대를 위해 복수노조가 시행된 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노조는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됐다. 노동의 힘이 약해지고, 자본의 힘이 강한 노사관계 지형에서 복수노조는 ‘덫’으로 작용했다. 사용자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노조를 만들어 민주노조의 숨통을 죄었다. 상신브레이크, 유성기업, 발레오전장, 발전노조, 한진중공업 등 민간·공공 부문을 가리지 않고 민주노조는 무너져갔다. 민주노조가 사라진 노동현장은 어떤 상황일까? 케이티(KT)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1994년 민주노조를 세운 케이티의 경우 민영화 이후인 2000년대 초반부터 노조가 약화됐다. 회사에 협조적인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일상적인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노동강도는 무한정 올라갔다.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케이티는 비밀리에 퇴출 프로그램을 운용해 직원을 쫓아내고 내부경쟁을 강화시켜 노동자들이 업무 스트레스로 잇따라 숨지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지만 노조는 침묵하고 있다. 민주노조를 복원하기 위한 소수의 노동자들만이 케이티를 비판할 뿐이다. 이러는 사이 2003~2009년 케이티에서 1만2000여명의 노동자가 소리 없이 구조조정을 당했다. 정규직들 실리주의… 노조 조직률 10% 밑으로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1997년 외환위기는 민주노조 운동의 뿌리를 흔들어놨다. 사회·경제구조가 외환위기 이후로 급격하게 변했지만 노동운동은 대응에 실패했다. 초국적 자본의 등장과 노동의 유연화가 전면화되면서 노동시장에서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개시된다. 국가의 위기 앞에서 구조조정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였다. 정리해고가 도입되고 파견노동이 법으로 허가됐으며 명예퇴직, 아웃소싱 등으로 노동시장은 극도로 불안해진다. 이제 ‘평생직장’은 신화가 됐고, ‘고용불안’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노동운동을 이끌던 대공장 노동자들에게 ‘낙인’처럼 찍히게 된다. 1998년 우리나라 최대 노조인 현대자동차, 2001년 대우자동차의 정리해고는 고용불안의 정점을 찍는다. 1997년 이후 비정규직은 계속 늘어나 전체 노동자 가운데 절반가량인 900만명에 이르게 됐다. 현대미포조선에서처럼 사내하청업체에 소속된 비정규직이 대공장 노동자의 상당 비율에 이르게 된다. 반면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은 정규직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등 노동 내부의 양극화는 점점 심각해진다. 현대차에는 8000여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늘 고용불안을 겪으면서 정규직 임금의 60%가량만 받고 일을 하고 있다. 조선소에는 하청노동자가 정규직보다 많은 곳이 여럿이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정규직이 1만2600명인데 하청노동자는 1만4812명이다. 현대미포조선의 경우 전체 노동자 8000여명 가운데 비정규직이 5000명이다. 경기가 나빠져 생산량이 줄어들면 우선적으로 해고를 당하는 쪽은 비정규직이다. 정규직 노조의 묵인 아래, 경기가 좋을 때는 일자리를 하청으로 채우고, 상황이 나빠지면 하청노동자를 먼저 내보내는 등 비정규직은 고용의 ‘완충지대’ 구실을 하고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는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상황에서 고용불안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정규직들이 ‘노조가 힘이 있고 고용이 안정적일 때 최대한 챙기자’는 실리주의가 확산되면서 더욱 심해지고 있다. ‘87년 민주노조’를 이끈 대공장 노동자들의 고령화도 이를 부추겼다. 지난해 민주노총을 탈퇴한 서울지하철 조합원들은 “젊을 때야 노조 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이들 대학 등록금 문제, 나이 든 부모 병원비, 노후 생활 등에 더 신경이 쓰인다”며 투쟁보다는 안정을 선택하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 힘이 있는 대기업 노조가 실리주의에 매몰되면서 결국 노동계 전체의 힘이 약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노조 조직률은 1989년 19.8%에서 2010년 9.8%로, 처음으로 10% 밑으로 떨어졌다. 노동계 힘이 약해지고 개별 사업장 중심으로 대응하다 보니,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등 정리해고나 사용자의 노골적인 ‘노조 파괴’ 앞에서 대공장 노조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됐다. 물론 노동운동이 맥없이 주저앉아 있었던 건 아니다. 노동계는 대기업 노조 이기주의와 실리적 노동운동의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로 기업별 노조를 꼽는다. 기업별 노조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따라 임금이나 노동조건 등 기업 안의 문제만 논의해야 하는 만큼, ‘그들만의 노동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은 공장 밖 연대를 위해 산업별 노조 건설과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해왔다. 하지만 이마저도 한계에 부딪혔다. 산별노조를 만들었으나 ‘무늬만 산별’에 멈춰 있고,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의 지지를 철회하게 되는 등 10년 이상 매달렸던 두 사업의 성적표는 낙제 수준이다. 노동계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고 혁신을 하자는 움직임이 조금씩 일고 있지만, 반전을 꿈꾸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김소연 기자 dan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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