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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내란은 주로 부도덕한 세력이 정권을 가로채려 할 때,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 어김없이 등장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80년 내란음모 등 혐의로 계엄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경향신문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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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특집 / 한국 현대사 속 내란
▶ 오는 17일 오후 2시 경기도 수원지방법원에서는 내란음모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1심 선고공판이 열립니다. 지난 3일 검찰은 이 의원에게 징역 20년,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했습니다. 뭐, 따지고 보면 특별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이후 수많은 ‘내란’ 사건을 겪었으니까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내란의 추억’을 정리했습니다.
2013년 8월,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된 직후 나는 <오마이뉴스> 요청으로 제법 긴 인터뷰를 했다. 그때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냐는 질문에 “정말 걱정”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권은 김기춘-남재준의 투톱 체제로 민중을 탄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오마이뉴스> 2013년 8월14일, “한홍구 교수, 김기춘-남재준 민중탄압 대비해야”) 인터뷰가 나가고 딱 2주 뒤인 8월28일 국가정보원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자택과 사무실 등 10여곳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1980년 전두환 일당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한 이후 33년 만에 내란음모 사건이 터진 것이다. 어쭙잖게 탄압 어쩌고 하며 무슨 일이 있을 것처럼 떠들었지만 이렇게 엄청난 일이 터지리라고는 나도 예상치 못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11명은
모두 내란의 추억이 있다
내란은 비정상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거나, 부도덕한 정권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최필립 아버지 최능진은
처음으로 내란죄 적용돼 총살
여순사건 때 내란범 된 박정희는
‘반혁명사건’으로 ‘혁명동지’에게
내란죄라는 별을 하사했다
멍한 충격 속에서 역사학도도 잊고 지냈던 내란의 추억을 떠올렸다. 대한민국은 내란 공화국이다. 너무나 많은 내란이 있었고 이쪽이든 저쪽이든 내란에 휘말린 인물들이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을 지낸 자연인은 모두 11명인데, 다들 나름 내란의 추억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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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내란 또는 조작된 내란 역사에서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사람은 최능진이다. 해방 뒤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을 지내며 친일경찰 숙청을 강력히 주장했던 그는 이승만 등 친일세력의 역공을 받아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말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경향신문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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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내란의 수괴, 김대중과 놀랍게도 이명박(!)은 내란죄로 유죄 판결, 최규하는 현실의 법정에 내란범으로 서지는 않았지만 역사의 법정에서는 최소한 내란방조, 어쩌면 내란의 공동정범이라는 판결을 면할 수 없는 입장이다. 윤보선 역시 내란방조 혐의가 짙다. 이승만은 4월 혁명 이후 사사오입 개헌이나 3·15 부정선거와 관련하여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내란죄로 고발당했으며, 김영삼도 10·26 직전 국회에서 제명당할 때, 국기(國基) 파괴와 내란선동이 징계 사유서의 앞머리를 장식했다. 노무현도 수구단체로부터 내란·외환죄로 형사고발을 당했지만, 2009년 갑작스러운 서거로 ‘피고발인 조사’를 받지는 않았다. 이쯤 되면 이력서에 어느 쪽으로든 내란죄 한 줄 들어가지 않으면 대통령 꿈꿀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란의 나라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내란은 부도덕한 인간들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기 위해서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없는 부도덕한 세력이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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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전과가 있던 박정희는 누구보다 ‘내란죄’ 만들기에 열심이었다. 혁명 동지부터 반대 세력까지 내란의 덫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유신이야말로 형법 정의에 딱 들어맞는 내란이었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뒤 국민회의 투표를 거쳐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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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김동하·박창암의 ‘내란죄’
너무나 풍부한 사례를 지닌 현대 한국의 내란 또는 조작된 내란 역사에서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사람은 해방 전 미국 컬럼비아대학 유학생으로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체육학 교수를 지낸 진짜 ‘운동권’ 최능진이다.(②) 최능진은 해방 후 평양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공산당과 충돌하여 남쪽으로 와 미군정 경무부에서 서열 2위 격인 수사국장이 되었다. 일제 때의 악질 조선인 경찰들이 해방 후 미군정 경찰의 고위직으로 승진한 것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은 1946년 10월인민항쟁으로 폭발했다. 이때 친일경찰의 숙청을 강력히 주장했던 최능진은 친일세력의 역공을 받고 파면되었다. 민족적 양심을 가진 진짜 우파가 친일파들에게 쫓겨나는 비극이었다.
친일파의 진정한 배후가 이승만임을 간파한 최능진은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구에 출마하려 했다. 무투표 당선을 원했던 이승만은 격노했고, 그의 부하들은 최능진의 후보 등록을 막기 위해 등록 마감 직전 등록서류 일체를 탈취해 갔다. 최능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말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경찰은 최능진이 ‘혁명의용군’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김일성 일파와 합류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곧이어 발발한 여순사건도 최능진 사건의 여파라 주장했다. 최능진은 1심에서 징역 3년, 2심에서는 형량이 늘어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인민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서울 수복 후 이승만 정권은 내란 혐의로 최능진을 다시 체포하여 1951년 2월11일 총살했다.
박정희는 내란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내란 전과 3범을 기록한 인물이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 당시 군에 침투한 남로당의 핵심 프락치로 체포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5·16 군사쿠데타(사진 ③)와 유신은 역사의 법정에서 볼 때 내란이다. 군정 연장을 위해 최주종에게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라 권한 것까지 포함하면 내란 전과 4범이 된다. 그 자신이 내란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별을 단 것이 박정희이지만, 가장 많은 별을 달아준 것도 박정희였다. 처음에 박정희로부터 내란죄 별을 하사받은 자들은 이른바 ‘반혁명사건’에 걸린 박정희의 ‘혁명동지’들이었다. 명목상 쿠데타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맡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1년 선배로 해병 제1상륙사단장으로 있으면서 5월16일 새벽 박정희와 함께 한강 다리를 건넌 김동하, 혁명검찰부장으로 수많은 ‘반혁명분자’를 잡아들인 박창암, 박정희가 민정이양 공약의 족쇄를 벗어나기 위해 내린 친위 쿠데타 지시를 거부한 최주종 등이 박정희로부터 내란죄 별을 하사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으로 군이 진정될 때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반혁명사건의 대부분은 박정희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 박정희를 제거하기 위해 실제로 병력을 동원할 계획을 세운 것은 1965년의 원충연 대령 사건 딱 하나뿐이다.
박정희는 미국의 압력으로 군복을 벗고 제3공화국을 출범시킨 뒤에도 마치 내란 중독증 환자처럼 끊임없이 내란을 만들어냈다. 박정희 정권은 정상적인 대화와 토론과 설득으로 정치를 이끌어갈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위기가 닥치면 늘 내란이 만들어졌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박정희 정권의 막무가내식 한일회담 추진은 당연히 엄청난 저항을 낳았다. 1964년 봄부터 본격화된 한일회담 반대 데모는 5월20일 ‘한일굴욕외교 반대 학생 연합투쟁위원회’(위원장 서울대 문리대 4학년 김중태)가 진행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더욱 거세어져 수만명이 서울 거리로 쏟아져 나오자 박정희는 1964년 6월3일을 기해 서울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박정희 정권은 박정희가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주도한 김중태와 현승일, 김도현 등을 내란죄로 구속기소했다. 이들의 공소장에 따르면 이들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각종 집회와 시위를 주도하면서 “국민경제를 일본제국주의의 더러운 배설물로 얼버무려 놓으려는 자 과연 누구냐?”며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사 지내자”고 선동하는 등 정부 전복을 획책하는 내란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검찰은 이들을 기소한 뒤 공소장 내용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여 구형 공판을 앞두고 스스로 내란죄 죄목을 빼고 형량이 가벼운 ‘소요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을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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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은 고려대에 결성된 비밀결사 ‘구국투쟁위원회’ 집행부 가운데 한명이었다. 내란 혐의로 기소돼 징역 5년을 구형받은 이명박(오른쪽 둘째)은 1964년 12월22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한겨레> 자료사진, 경향신문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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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선고받은 이명박
내란죄로 구속된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뒤를 이어 고려대생들도 구속 또는 수배되었는데, 고려대학교에 결성된 비밀결사 ‘구국투쟁위원회’ 집행부의 한 명이 이명박이었다. 공소장에 따르면 이명박은 ‘구국투쟁위원회’의 지도부 성원들과 함께 “썩고 무능한 박정희 정권 타도!”, “배고파 못 살겠다 악덕재벌 잡아먹자”(와우!) 같은 “선동적인”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인솔지휘”했다. 이명박 본인은 부인했지만 검찰에 따르면 그는 구국투쟁위원회 위원장 이경우와 함께 “파출소 뒷문을 파괴·방화하고 무기고 등을 점령”했다고 한다.(<경향신문> 1964년 6월18일, <동아일보> 1964년 9월22일) 내란 혐의로 기소되어 검찰로부터 5년 구형을 받은 이명박은 1964년 12월22일 징역 2년에 3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④) 친박의 좌장으로 부활한 서청원 역시 이때 내란미수로 구속된 바 있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나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부의 정당해산 심판 청구가 촉발된 진정한 원인은 이정희 후보가 2012년 말 대통령 선거 티브이토론에서 박근혜 후보의 면전에서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을 거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1964년 동아방송의 <앵무새>가 화살을 맞은 것은 앵무새가 박정희의 창씨명을 입에 올리는 불경을 저지른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원로 방송인들은 말하기도 한다. 동아방송 방송부장 최창봉(뒤에 문화방송 사장 역임), 뉴스실장 고재언, 편성과장 이윤하 등과 제작과장 조동화, <앵무새> 피디 김영효 등이 처음 구속될 때는 반공법 등이 적용되었지만 곧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라는 귀에 익은 관용구와 함께 내란죄가 추가되었다. 빈부격차를 다룬 방송극 <송아지>의 대본을 쓴 김정욱 작가는 내란죄는 아니지만 반공법으로 구속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당시 법으로도 학생과 언론인들을 내란죄로 수없이 잡아들였지만, 내란행위의 정당성을 선전선동하는 행위나 매체를 규제하는 ‘공안보장법’이라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려고 했다.
대형 내란사건이나 공안사건이 발생할 때의 상황을 보면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는 ‘절묘한 타이밍’에 놀라게 된다. 왜 하필 이런 때면 꼭 기어코 반드시 내란이 일어나거나 공안사건이 터지는 것일까? 수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데에는 빨갱이 선동이 필요했다. 1964년 8월 터진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각종 학생 시위의 배후에 불순세력이 있었음을 과시하려 한 것이었다.(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지만 이미 여러 차례 쓴 바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만 줄이고 덜 알려진 사건들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1967년 6월8일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간첩 사건이 발생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등 정치개입에 대한 반발로 국정원 개혁 요구가 거세어지자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때맞춰 터져준 것처럼 내란의 유령이 잠에서 깨어날 때는 스멀스멀한 나쁜 기운이 한국 사회를 감싸기 마련이었다.
1965년 8월 한-일 국교 정상화가 막바지 단계에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학원에 대해 초강경 방침을 세웠다. 치안국장 박영수는 학생 데모의 뿌리를 뽑겠다고 공언하면서 반미, 반국가적인 경향을 보이는 데모의 주모자급에게는 반공법과 내란선동죄를 적용하라고 전국 경찰에 지시했다. 군과 학생이 격돌하는 가운데 8월27일에는 김홍일(전 외무부 장관), 최경록(전 육군참모총장), 박병권(전 국방부 장관), 송요찬(전 내각 수반, 전 육군참모총장), 손원일(전 국방부 장관, 전 해군참모총장), 장덕창(전 공군참모총장), 김재춘(전 중앙정보부장), 박원빈(전 무임소장관) 등 거물급 예비역 장성 11명이 ‘국군 장병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국군 장병이 신성한 국토방위의 사명”보다는 “집권자들에 의하여 국민이나 국가 이익에 반대되는 목적에 동원되려고 하는 슬픈 사태”에 이르렀다면서 집권자들을 “반민족행위자이며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반국가행위자”라고 규탄했다. 군 원로들은 국군 장병들에게 “여러분은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애국하는 국민에게 총을 겨누기를 거부”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이들이 발표한 호소문이 준 충격이 일파만파 번져가자 정부는 8월29일 김홍일, 박병권, 김재춘, 박원빈 등 4명을 전격 구속기소했다. 5·16 후 외무장관, 국방장관, 중앙정보부장, 무임소장관을 역임한 거물들이 구속된 것이다. 정부는 처음에는 이들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했지만, 검찰은 9월7일 “군의 출동, 임무 포기 내지 명령 불복종을 획책, 중립을 선동하여 학생 시민들로 하여금 격렬한 불법시위에 의한 강압으로 현 정권을 타도함에 호응토록 촉구하여서 강압에 의한 정부 전복과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케 하도록 선전선동한 것”이라며 내란선동 혐의를 추가했다. 이 사실을 보도한 경향신문 1965년 9월8일치 사회면 머리기사 제목은 “수도 서울에 공포의 밤”이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 집에 폭발물이 터지고, 동아방송 제작과장은 괴한들한테 테러를 당한 것이다.
박정희는 내란중독증 환자처럼
학생·언론인·정치인 가리지 않고
위기가 닥치면 내란을 만들었다
그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도
내란 목적 살인죄 판결을 받았다
사건은 대부분 내란이라기엔
모두 함량 미달하는 사건이었다
이석기 사건의 다른 점은
정부가 이렇게 ‘무데뽀’로
올인한 적 없었다는 것이다.
이석기 사건의 특징은 현역 의원이 내란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점인데, 1965년에는 현역 의원이 두 명이나 각각 다른 사건으로 내란죄로 구속되었다. 군 시절 박정희를 좌익이라고 비판한 김형일 민정당 의원(전 육군참모차장)은 1964년 국회에서 시위 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무장 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한 사건에 내란죄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1년 뒤 자신이 원충연 대령 사건에 연루되어 내란죄로 구속되었다. 내란 혐의를 뒤집어쓴 또 다른 의원은 김두한이었다. 김두한은 1965년 11월9일 실시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한독당 후보로 서울 용산구에서 당선되었는데 11월17일 의원선서를 함과 동시에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11월9일 보선에 한독당 후보로 서울 중구에 출마했던 박상원이란 청년은 고려대 대학원 출신으로 학생운동 과정에서 김중태와 친분을 맺었는데 당국은 1년 전에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김중태, 현승일 등을 다시 구속하면서 그 불똥이 박상원을 거쳐 김두한에게까지 튀게 된 것이다. 당국은 김중태가 폭발물을 제조하는 데 성공했고, 그 자금이 김두한에게서 나왔다는 시나리오를 짰다. 김두한은 정기국회가 폐회된 직후인 1966년 1월8일 내란음모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김두한, 박상원 등 한독당 간부들은 5단계 혁명을 꿈꿨으며, 박상원은 학원방위군 사령관, 김중태는 민족방위위원회 위원을 맡기로 했다는 것이다.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 관련 피고인 10명은 1966년 5월10일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국회는 억울한 누명을 쓴 김형일과 김두한의 석방 결의안을 채택했다. 동료 의원이 뒤집어쓴 황당한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 근 50년 전 여야를 초월하여 국회의원들이 보여준 동료애는 2013년 이석기 의원의 경우와는 매우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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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은 1970년대에 빚어진 대표적 ‘내란’이었다. 1972년 9월11일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항소심 결심공판에 나선 서울대 학생운동진영의 핵심 4인방. 왼쪽부터 심재권, 장기표, 이신범, 조영래 등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경향신문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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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자금이 달랑 만원?
3선 개헌 등을 거치면서 잠시 뜸했던 내란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빈발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71년 11월13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이다.(⑤) 장기표, 이신범, 심재권, 조영래(당시 사법연수원생) 등 서울대 학생운동 진영의 핵심 인물 4명이 이 사건으로 구속됐고, 김근태 등은 수배되었다. 1971년은 박정희가 치른 마지막 대통령 직접선거가 있던 해였다. 박정희는 엄청난 관권과 금권을 동원한 끝에 김대중에게 힘겹게 승리했지만 그의 앞날이 순탄하지는 못했다. 연이어 치러진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의석을 크게 늘렸다. 1970년 11월의 전태일의 분신과 한진 노동자들의 칼 빌딩 방화사건, 최고 엘리트 의사와 판사들의 집단행동인 수련의 파업과 사법파동, 교수 등 지식인의 선언에 이어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수호운동, 학생들의 교련반대 데모 등 사회 각계각층도 끓어오르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15일 위수령을 발동하여 각 대학에 군대를 투입하여 74개의 ‘불온써클’을 폐쇄하고 문제 학생 177명을 제적하여 강제입영시켜 버렸다.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은 이런 분위기에서 터진 것이다. 12월6일 비상사태로 가는 정지작업이었다.
연행된 학생들은 혹심한 고문 끝에 “4·27 대선에서 박정희가 다시 당선되자 합법적인 정권교체가 불가능한 만큼 폭력으로 정부를 타도 전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단정하고 내란을 음모했다”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소장에 따르면 이들은 1971년 6월 초순을 기하여 “서울 시내에 있는 약 9만명의 대학생 중 약 3만명 내지 5만명을 동원하여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일제히 전개하여 맥주병과 휘발유 및 화공약품을 사용하여 대형자동차 1대를 능히 파괴할 수 있는 화염병 100여개를 제조 준비”하여 “서울 시내의 치안과 정부 중요기관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이와 같은 상태를 이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킨 뒤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입법·행정·사법 등 3권을 통괄하여 집권한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이 사건의 변론을 맡은 이병린 변호사는 ‘환상의 아홉 고개’라는 유명한 비유로 검찰의 황당무계한 공소장의 허구성을 논파했다. 검찰이 주장한 방식의 화염병을 제조하려면 단가가 개당 100원인데 그렇다면 이들이 “일국의 혁명을 하는데 1만여원의 자금을 가지고 덤벼들었다는 얘기”가 되니 참으로 웃음거리라는 것이다. 이 재판에는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으로 있다가 강제징집을 당한 김상곤(현 경기도 교육감)이 군복 차림으로 검찰 쪽 증인으로 끌려 나왔는데 그는 학생회는 민주적으로 운영되었고 선배들로부터 ‘조종’받은 바 없다고 증언했다. 공안검사 박종연은 김상곤에게 위증을 한다고 소리쳤고 증언을 마친 그를 검사방으로 끌고 가 구타하면서 군법회의에 넘긴다는 협박을 했다고 한다. 영화 <변호인>의 군의관 윤성두 중위가 끌려 나간 것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이 사건의 피고인들은 1심에서 3~4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내란죄로 걸려든 것은 서울대생만이 아니었다.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형법학자 유기천 교수는 자료조사차 자유중국(대만)에 갔다가 대만의 고위층으로부터 한국 정부의 요직에 있는 인물들이 대만의 총통제를 연구하기 위해 와서 자료를 모아 갔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귀국 후 그는 수업시간에 이 이야기를 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내란선동 혐의로 입건되어 자의반 타의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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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오른쪽), 노태우는 군형법상 내란죄, 반란죄 등으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6월형을 선고받았다. 1996년 8월26일 1심 선고공판에 나란히 선 두 사람. <한겨레> 자료사진, 경향신문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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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이야말로 형법 91조의 국헌 문란
유신은 그렇게 왔다. 유신이야말로 형법전의 정의에 딱 들어맞는 내란이었다. 수많은 함량 미달의 내란사범을 양산한 박정희가 ‘내란이란 이런 것이다’를 몸소 보여주었다. 내란죄의 구성요건에서 가장 중요한 국헌문란에 대해 형법 91조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1.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2.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 박정희가 자기 마음대로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과 사법과 행정을 분리해놓은 헌법의 기능을 비상국무회의로 집중시킨 것이야말로 똑 떨어진 국헌문란 행위였다. 탱크와 군대를 동원하여 헌법기능을 정지시켰으니 이것이 87조 내란죄에서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 “수괴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5·16 군사반란 무렵의 군형법을 보면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한 자” 중에서 “수괴는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무기징역도 없는 사형인 것이다. 유신은 변명의 여지 없는 내란이었다. 이 내란을 성공시키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 숱한 내란사범을 위해 울었던 것이다.
유신 후 최초의 내란사건은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이다. 1973년 4월22일 새벽 5시 서울의 남산 야외음악당에서는 부활절 연합예배가 거행되었다. 예배가 끝나고 회현동 쪽으로 내려가는 군중들 사이에서 몇몇 청년들이 유인물을 나누어주다가 군중 속에 파묻혀 버렸다. 이 일이 사건화된 것은 두 달이 넘게 흐른 6월 말이었다. 공소장의 내용은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보다 더 황당했다. 할머니들이 다수인 십만 군중에게 유인물 몇 장 나눠준 뒤, 이들을 두 개의 대열로 나누어 한쪽은 당시 남산에 있던 한국방송(KBS) 점령을 통해 유신정권 타도를 전국민에게 호소하고, 다른 한 대오는 서울 시내로 진입하여 중앙청과 국회의사당 등 관공서를 파괴 점거하여 현 정부를 축출한다는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계획을 위한 자금은 박형규 목사가 권호경 전도사에게 준 일금 10만원이었다. 오죽 황당했으면 비록 사실은 아니지만 공소장을 읽다가 검사가 킥킥댔다는 소문까지 돌았을까.
유신시대 최대의 내란사건은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폭력혁명으로 노동자·농민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민청학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어, 1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조사를 받았고 230명이 구속되었다.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은 21명이 구속되었고 결국 1975년 4월9일 8명이 사형을 당했다. 1975년 2월21일 박정희는 문공부 연두순시에서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명백한 내란음모죄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라고 단정하면서 이들을 엄벌하고 그 진상을 널리 알릴 것을 촉구한 바 있다.
1979년의 10·26 사건은 김재규의 주장대로 박정희가 자행한 유신이라는 내란을 종식시킨 민주혁명이었을까, 아니면 전두환 쪽의 주장대로 정권을 찬탈하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망상을 가진 김재규가 저지른 내란이었을까? 12·12와 5·17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한 행위를 자연인 박정희에 대한 단순 살인이 아닌 정권 찬탈을 위한 내란 목적 살인으로 규정하는 대법원 판결을 강압적으로 끌어냈다. 한국 현대사에서 진짜 내란은 여순반란 사건과 5·16 군사반란과 유신 친위쿠데타와 5·17 군사반란이 있었을 뿐이다. 5·17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일당은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내란 목적 살인이었다. 내란범은 자신들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내란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광주항쟁을 내란으로 몰았고, 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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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음모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1심 선고공판은 오는 17일 오후 2시 경기도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다. 지난해 9월5일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수원지법에 들어서는 이 의원이 기자들과의 문답을 막는 수사관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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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내란사범 아들의 화려한 부활
김대중은 이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란음모죄는 실행에 이르지 못한(또는 실행으로 나아가지 못한) 전 단계인 모의를 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벌 규정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되어 있다. 즉, 내란음모죄로는 사형이 불가능한 것이다. 김대중이 사형 판결을 받은 것은 한민통의 의장, 즉 재일동포 유학생 김정사에 대한 조작간첩 사건에서 반국가단체로 낙인찍힌 단체의 수괴였기 때문이다. 한민통에 대한 반국가단체 판결을 내린 판사의 한 사람이 바로 얼마 전까지 국무총리를 지낸 김황식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 등의 용공성을 입증하기 위해 김정사의 간첩조작 사건에도 증인으로 활약했던 윤효동이란 전향 간첩을 다시 증언대로 불러냈다. 윤효동이 법정에서 정제되지 않은 이북 말투로 김대중이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고 열변을 토할 때 순발력 좋은 김상현 의원이 이 법정이 어느 나라 법정이냐고 크게 외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북한 간첩이 북한식 말투로 민주인사들을 모함하는 발언을 증언이랍시고 듣는 법정이 대한민국 법정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법정인가를 따져 물은 것이다. 쇼맨십 풍부한 문익환 목사는 벌떡 일어나 “내란이다!”라고 소리쳤고, 다른 피고인들도 따라 일어나 윤효동을 향해 “내란이다!” 하고 소리쳤다. 겁먹은 윤효동은 검사와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쪽문으로 쫓겨나갔다고 한다. 내란의 왕국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슬픈 코미디였다.
이렇게 다채로운 내란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또 있을까. 내란의 수괴들을 30년이 넘게 대통령으로 모시는 동안, 그들과 그들의 정보기관은 수많은 내란사건과 내란사범을 끊임없이 만들어 왔다. 내란의 왕국 대한민국에 명멸한 내란사범들의 인생유전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⑥) 등 성공한 진짜 내란의 수괴들이 대통령이 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형 내란사건의 주범 김대중이나 곁다리 내란사범 이명박까지 대통령이 된 것을 보면 한국에서 내란죄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필수코스일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수많은 혁명 동지들을 내란범으로 몰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풀어주어 김동하가 마사회장, 최주종이 주택공사 사장을 지낸 것처럼 물 좋은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내란의 왕국 대한민국의 최초의 내란사범 최능진 선생의 아들은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 바로 그 최필립이었다. 박정희가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사건 등 세 차례에 걸쳐 내란죄로 잡아넣으려 했던 김중태는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캠프의 국민통합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박근혜가 전두환으로부터 받은 6억원은 연금이라느니, 선거에서 패배한 문재인 후보가 “부엉이 귀신 따라 저세상 갈까 걱정”이라느니 하는 너절한 말을 늘어놓았다.
내란의 왕국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사건은 모두 내란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에는 모두 턱없이 함량이 미달하는 사건들이었다. 그 점에서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도 함량 미달의 전통에 아주 충실하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 있으니, 내란에 임하는 정부의 자세이다. 수많은 관제 내란사건이 있었지만 정부가 이렇게 ‘무데뽀로’ 올인한 사건은 없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경우 전두환 정권은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를 나름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자신들의 카드를 키워나갔다. 과연 박근혜 정권은 이석기 등의 행동을 내란으로 처벌하고 나아가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킴으로써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웃음거리가 된 것 이외에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석기 등이 모여서 했다는 말을 옹호할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도대체 그런 모임이 어떻게 내란의 모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한국 현대사에서 딱 네 번의 비극을 빼고 내란사건은 권력이 큰 칼을 무리하게 휘둘렀다는 점에서 황당무계한 코미디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이번 이석기 내란사건은 아무리 보아도 정부한테나 당하는 쪽에나 비극일 뿐이다. 비극의 근원은 국정원이고 법무부고 수구언론이고 간에 넘치는 진지함에 있다. 시민들의 비극은 이 사건이 어디 먼 시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국정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 등 국가기관이 대거 동원되어 선거부정이 자행되었고, 그런 부정선거의 덕을 크게 본 현직 대통령은 이 부정을 덮음으로써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정당성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 헌법의 기능과 권능이 파괴되는 순간이다. 내란이다!
한홍구/성공회대 교수·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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