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의 신도로 임금도 받지 않고 유람선 건조 작업에 참가했던 김아무개씨의 뒷모습. 헌금도 1500만원이나 냈던 그는 1985년에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1년간 배를 만들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의 도움으로 구원파 교회와 인연을 끊은 그는 “(구원파가) 유병언 사장의 사업은 하나님 사업이라며 열성파 신도들을 부추겼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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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특집
“잠깐 미쳤지. 그땐 교주 말이 옳은 줄 알고, 좋은 줄 알고. 휩쓸렸어. 지금도 유병언 교회에 속했으면 내 인생이 얼마나 허무했을까….”
1985년 서울 한강에서 무임금으로 세모해운의 유람선을 건조했던 김아무개(63·여)씨는 지난 23일 <한겨레> 취재진 앞에서 기억하기 싫은 일을 털어놓았다. 세월호가 속한 청해진해운의 전신인 세모해운은 갖가지 사고를 내다 1997년 부도 처리됐다. 1990년 9월11일 홍수로 한강이 급속도로 불어나 유람선이 급류에 휩쓸려 갔고 이를 저지하던 직원 15명이 숨지거나 실종되기도 했다.
세모그룹은 속칭 구원파로 불리는 기독교복음침례회의 교주 유병언씨가 설립한 회사로 신자들은 회사 설립 과정에서 자금과 노동력을 댔다. 유씨와 장인 권신찬 목사는 1962년 기존 교단에서 사이비 종교로 규정한 기독교복음침례회를 만들었다.
한때 구원파에 빠졌던 김씨는 당시 광주에 있는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1년간 한강 간이건물에 머물며 선박 건조 작업을 도왔다. 배를 건조하는 기술은 없었지만 자재를 나르거나 잡일을 했다. 김씨가 일했던 곳은 서울시에서 허가를 받은 선박검사소를 불법 개조한 공장이었다. 1991년 국정감사에서 불법 선박공장 문제가 지적되기도 했다. 1년간 한강 간이건물 머물며
무임금으로 선박 건조 도왔다
아침 10시부터 밤까지 일했다
유병언 사장과 권신찬 목사의
며느리가 가끔 현장에 왔다
“세월호 사고 뒤 사촌 여동생에게
구원파 교회 계속 다닐지 물었죠
이제 유씨 정체가 뭔지 알겠는데
쉽게 빠져나오긴 힘들다고 해요
안 다닐 거라 말은 하더라고요”
“오전 10시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일했어요. 기술자들은 모르겠지만 나처럼 숙식하는 사람들 30~40명은 아무도 돈을 안 받았어요. 부부 신자도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친 뒤 간이건물에 숙식하며 일했고요. 유병언 사장은 가끔 현장을 보러 와서 격려했습니다. 권신찬 목사 며느리라고 불리던 송아무개씨가 유람선 건조 현장에 자주 와서 ‘하나님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열성파 신도들을 부추겼고요.” 유씨와 장인 권 목사는 모두 교회에서 목사 행세를 했지만, 교인들은 유씨를 목사가 아닌 ‘사장’으로 불렀다. “주로 권신찬 목사가 설교를 했고 유병언도 가끔 (설교를) 하긴 했어요. 그런데 신도들도 유병언을 목사가 아닌 사장님으로 불렀어요. 신도들이 교인 겸 종업원이었던 셈이죠.” 김씨의 남편 이아무개(65)씨는 “구원파 수련회에서도 신자들에게 유람선 건조 작업을 강요했다”고 증언했다. 이씨는 집을 나간 아내를 찾다 포기할 즈음 다시 만났다. 당시 유람선을 건조하던 아내 김씨가 아들딸이 보고 싶어 광주에 잠시 내려온 것이다. 1년 만에 만난 아내 김씨가 구원파 수련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자 이씨도 아내를 붙잡고 싶은 마음에 따라나섰다. 김씨는 “서울 휘문고에서 수련회를 했는데 3일째 되던 날, 젊은 사람들을 유람선 만드는 곳에 동원했다. 권신찬 목사는 ‘유병언 사장의 사업은 하나님 사업입니다’라며 신도들을 회유했다”고 했다. 세모해운 옆에 사무실을 두고 유람선 운항 경쟁을 벌였던 원광해운 관계자도 신자들의 노동력이 동원됐던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2002년 원광해운을 퇴직한 최아무개씨는 “일요일이면 교인 수십명이 버스를 타고 와서 유람선 건조 작업을 도왔다. 그 회사 자체가 종교단체라고 들었다”고 기억했다. 세모그룹은 1979년 신도들의 헌금으로 설립돼 한강 유람선 사업에까지 진출했다. 회사 설립 당시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목에 현혹된 신자들은 무리하게 지갑을 열었다. 김씨도 남편과 상의하지 않고 1982년, 1500만원을 헌금으로 냈다. 삼성전자 영업사원이던 남편은 길길이 날뛰었고 구원파 교회를 상대로 고소하려 하자 서너달 만에 돌려받을 수 있었다. 김씨는 “교회에서 도와야 한다니까 신도들이 엄청 많이 도와줬다. 당시 전남 해남군 황산면 부면장이던 김아무개씨 아내도 남편 몰래 5000만원을 갖다 바쳐서 난리가 났는데 결국 돈 못 받고 이혼했다”고 했다. 유병언씨가 세모그룹을 설립하고 번성해가는 과정에서 김씨 부부처럼 수많은 가정이 무너지고 가산을 탕진했다. 현혹된 신도들의 눈물과 고통은 현재 수천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병언 일가 재산의 씨앗이 된 것이다. 신자들은 세모그룹이 만든 제품의 소비자이거나, 방문판매하는 영업사원으로 이용됐다. “돈이 많은 교인들은 세모그룹이 만든 스쿠알렌(스콸렌)이나 화장품을 사고,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 보탬이 되려고 지인들에게 물건을 팔았어요. 남편의 만류로 점차 교회와 인연을 끊었지만 이후에도 저를 전도한 사촌 여동생이 파는 스쿠알렌을 몇 번 사주기는 했어요.” 유병언씨는 신도들에게 ‘예수’와 같은 존재로 통했다. 장인 권신찬 목사가 주로 설교를 했지만 신도들은 권 목사가 아닌 유 전 회장을 더욱 따랐다. “‘예수’로 여길 만큼 유씨는 우상이었어요. 사실 권 목사가 아니라 아주 가끔 나타나는 유씨를 보려고 신도들이 모여든 거죠. 일반 교회에서도 목사 설교를 1000원씩 받고 팔잖아요. 그런데 구원파 교회에서는 유씨 설교를 5000원, 1만원에 팔았어요. 그것도 다 장사였던 셈이죠. 권 목사 설교 테이프는 유씨 것보다 훨씬 싼 가격에 팔았어요. 사촌동생에게 물어보니 과거 유씨가 한 말씀 테이프를 지금도 듣고 있대요. 유씨가 찍은 사진도 비싼 가격에 신도에게 팔았어요. 신도들은 부적처럼 사고요.” 23만㎡에 이르는 종교시설 금수원은 사실상 유씨 설교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의 장소다. 신도들은 1년에 한 번 경기도 안성 금수원에서 열리는 수양회에 참석해야 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5박6일 수양회비가 1인당 30만원이나 했어요. 그런데 밥은 늦은 아침 한 번, 이른 저녁 한 번, 두 끼밖에 안 줘요. 최고급 유기농이라면서. 신도들이 배고프니까 미숫가루 같은 걸 싸서 와요. 정 돈이 없는 신자는 금수원에서 설거지를 해주고 참석하고요.” 세모그룹에는 충실한 신도들이 직원으로 차출됐다. “신도들이 세모그룹에 자식들 넣으려고 환장을 했어요. 그래야 복 받을 줄 알고. 아무나 세모그룹 직원으로 쓰지 않아요. 정말 교회에 봉사 많이 하고 인정받은 사람들이 채택되는 거죠.” 종교단체적인 운영 방식은 세모그룹에서 청해진해운으로 이어졌다. 청해진해운의 독단적인 운영 방식은 이번 사고 원인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천 해운업계에 20여년간 몸담은 서아무개씨는 “세모해운 시절부터 직원 월급 10%를 헌금으로 받는다고 들었다. 1997년 세모해운이 망하고 2년 뒤 청해진해운이 설립될 때 업계 관계자들은 둘 다 같은 ‘유병언 회사’라고 여겼다. 이 업계에 20년 종사하면서 웬만한 대표 이름은 아는데 청해진해운 대표 김한식씨는 듣도 보도 못한 인물이다. 세월호 침몰하고 대국민 사과하는 김한식 대표라는 사람을 텔레비전을 통해 처음 접했다”고 했다. 2007년까지 청해진해운 대표를 지낸 안명수씨도 해운업계 종사자가 아니다. 해양 관련 한 월간지는 2007년 8월30일 안 전 대표의 인터뷰 기사를 실으면서 “20년간 유통사업체를 운영한 비해운인”이라고 소개했다. 김씨는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구원파 신도인 사촌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계속 구원파 교회에 다닐지 물었다고 한다. “사촌동생이 그래요. 이제 유씨 정체가 뭔지는 알겠는데 쉽게 빠져나오긴 힘들다고. 안 다닐 거라고 말은 하더라고요. 유씨가 왜 그렇게 우상이었는지 세월 지나 생각해 보면 이유를 모르겠어요.” 김씨는 말을 끝내며 허탈한 듯 웃었다. 그가 인터뷰 가운데 가장 자주 한 말은 “내가 미쳤지”였다. 그는 후회했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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