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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0.10 19:46 수정 : 2014.10.12 20:33

이본 첸이 3일 밤 홍콩 케네디타운에 있는 친구 아이리스 입의 집에서 티브이를 보던 중 렁춘잉 홍콩 행정장관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올리고 있다.

[토요판] 특집
홍콩 여자 이본 첸 이야기

▶ 휴가를 이틀 앞두고 야근을 하다 쏟아져 들어오는 외신 사진들에 마음을 뺏겼다. 홍콩 중심가를 가득 메운 시민들과 수만개의 우산들, 최루탄으로 시민들을 거칠게 진압하는 홍콩 경찰의 모습…. 홍콩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붕괴된다며, 그걸 막아보겠다고 거리로 나와 있었다. 휴가 항공편을 취소하고 1일 아침 홍콩행 비행기표를 결제해버렸다. 홍콩 젊은이들과의 우연한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1주일간 홍콩에서 그들의 눈물과 열정, 희망을 보았다.

“우린 비 때문에 우산을 쓰는 게 아니에요. 홍콩 정부의 개가 된 경찰의 최루탄과 최루액 스프레이 공격으로부터 홍콩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쓰는 거예요.”

폭우가 쏟아지던 3일 아침, 홍콩 정부청사들이 모여 있는 중심가 애드미럴티 역 근처에서 밤샘시위를 마치고 잠시 옷을 갈아입으려고 집으로 돌아가던 이본 첸(26)을 만났다. 비를 맞고 걸어가는 그에게 우산을 건네려 하자, 그는 지금 홍콩인들에게 우산이란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됐다고 했다.

미국 뉴욕시립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하는 이본은 홍콩을 ‘홍콩’이라 부르지 않고 ‘집’이라 부른다. 9월28일까지만 해도 그는 뉴욕에서 2주 뒤에 치를 중간고사를 준비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내년에 꼭 전문간호사(Physician Assistant) 자격을 취득해야 하고, 그러려면 4.0 만점에 3.5 이상의 학점을 받아야 한다. 거의 매일 밤을 새워도 공부해야 할 양이 너무 많아, 아르바이트하러 갈 시간도 없는 생활이었다. 쿼터(3학기제의 한 학기, 석달이 1쿼터)마다 2000달러 정도씩 받는 미국 정부의 학업보조금이 생활비의 거의 전부다. 또래들처럼 예쁜 옷도 입어보고 싶지만, 생활이 넉넉지 않아 브랜드 옷은 상상도 못 한다.

한 시위 참가자가 1일 저녁 홍콩정부청사 앞에서 3일 전 경찰이 시위대 진압을 위해 사용한 최루가스 탄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

엄마는 말했다, 너 미쳤구나

9월28일 티브이 뉴스를 보다가 홍콩 경찰이 시민들의 시위를 진압하려고 최루가스를 쏘고 곤봉을 휘두르는 장면을 보게 됐다. 평소 홍콩을 ‘집’이라고 부르는 첸은 충격을 받았다. 이전부터 첸은 홍콩의 민주주의를 염려하며, 뉴욕에서 열리는 ‘민주주의: 세계가 홍콩과 함께’(Democracy: Global Solidarity with Hong Kong) 시위 등에 적극 참여해 왔다. 대만 출신 어머니와 홍콩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자란 그는 홍콩인과 대만인의 정체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첸은 “2003년 대만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약자에게 횡포를 부리는 중국이 이번에는 홍콩에 힘을 행사하고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2003년 말 대만 민진당 정부가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 실시 준비 등을 본격화하자, 중국 정부는 “대만 독립은 곧 전쟁이며 무력행사가 불가피하다”며 대만과의 전쟁 불사를 선언했고, 홍콩인들은 그때의 공포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제 그 힘이 홍콩을 향하고 있다는 공포가 첸에게 몰려왔다. 중국 중앙정부에 대한 공포와 힘없는 홍콩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마음속에서 꿈틀댔다. 평화적인 학생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 행사를 보면서 “이번만큼은 뉴욕이 아닌 ‘집’에서 우산을 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번에 나서지 않는다면 홍콩의 미래는 암울할 거라는 느낌이 밀려왔다. 첸은 “방송으로 전해지는 시위 현장에는 필리핀이나 인도에서 이주해온 홍콩 사람들도 참여하고 있었어요. 난 모국어가 홍콩말이고 홍콩에서 자랐어요. 홍콩이 집인데 그들보다 더 사랑해야 하지 않겠어요.”

어려운 유학생 형편이지만 800달러로 홍콩행 비행기 표를 구했다. 학교로 달려가 교수님께 결석 사유를 설명하고 허락을 받았다. 마트에 가서 7달러짜리 납땜용 글러브도 샀다. 집에 있던 오래된 스노보드 고글과 방수재킷도 여행가방에 집어넣었다. 화생방용 마스크를 구하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벌어질지 모를 최루탄 발사 등 경찰의 공격으로부터 본인을 보호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공항으로 갔다. 그리고 홍콩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첸이 전화로 홍콩에 간다고 하자, 어머니는 똑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했다. “미쳤네, 네가 상관한다고 변하는 건 없어. 천안문 사태 알잖아. 가여운 학생들만 죽었다고. 그 꼴이 나야겠니. 중국은 안 변해.” 어머니는 1989년 중국의 천안문 시위 무력진압과 2003년 대만-중국 전쟁 위기의 공포를 떠올리면서, 딸이 희생자가 될까봐 걱정에 차 있었다. 하지만 첸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29일 아침 ‘집’으로 향하는 첫 비행기에 올랐다. 뉴욕에서 홍콩으로의 15시간 비행 동안 첸은 ‘집’ 걱정에 한숨도 잘 수 없었다고 했다. 도착해서도 시차 부적응으로 거의 잠을 자지 못했지만, 일주일간 쉬지 않고 센트럴 점거농성에 참여했다. 피로감이 극에 달했다. 중국의 간섭과 홍콩 정부의 무능함으로 자랑스러웠던 홍콩이 점점 더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는 느낌, 홍콩이 망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분노까지 더해져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0월1일 오전, 처음으로 첸은 농성에 참가했다. 렁춘잉 행정장관의 집무실이 있는 홍콩행정청 앞은 시위에 나선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첸과 같이 중국 중앙정부에 대한 분노와 홍콩 정부의 무능함에 실망을 느낀 홍콩 시민 3만여명이 우산을 든 채 ‘시와이(CY, 렁춘잉 홍콩행정장관)는 지옥에나 가라’를 외치며 점거농성을 벌였다. 이들 중 일부 대학생은 중국 <인민일보> 온라인에 실린 사설을 프린트해 와서 ‘서방식 민주주의에 물든 반중국 홍콩인들 … 그들 가슴에 지난날의 식민사관이 깊이 배어 있다’는 식의 내용을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읽다가 말도 안 된다며 찢어버리기도 했다. 첸은 홍콩 시민 수만명이 모여 우산을 든 이유에 대해 “렁춘잉 행정장관은 무능하고 경찰은 최루가스까지 사용하며 홍콩 사람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쌓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죠. 미쳤어요”라고 했다.

3일 오후 폭우가 쏟아져도 홍콩 시민들은 홍콩행정청 앞 8차선 도로를 가득 메운 채 떠나지 않았다. 열대야와 습한 날씨인데도, 경찰의 공격에 대비해 비옷과 고글안경과 마스크, 그리고 우산으로 ‘무장’한 상태여서 옷은 땀으로 완전히 젖었고 살짝만 쥐어도 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긴장한 경찰은 홍콩행정청 입구에서 시민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날 홍콩의 대표적인 쇼핑가 몽콕에서 친중 시위대인 파란 리본의 일원들이 반중 시위 참가자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했고, 일부 조직폭력배와 관련된 이들이 시위대를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경찰은 가해자를 색출하기는커녕 상황을 방치해 시위 참가자들이 부상을 당했다. 이 때문에 일부 시민들은 경찰을 향해 ‘시와이의 개’라며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2003년 대만 독립투표 움직임에
전쟁불사 선언하던 중국의 기억
이젠 그 힘이 홍콩을 향한다는
공포가 첸에게 강력히 밀려왔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꿈틀댔다

어려운 유학생 형편에 800달러로
홍콩 가는 비행기 표를 구하고
7달러짜리 납땜용 글러브를 샀다
최루가스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
고글과 방수재킷도 챙겼다

중국 반환 이후 젊은이들은 무엇을 느꼈나

첸은 중학생 시절까지 14년을 홍콩에서 살았다. 그리고 1997년 홍콩의 주권이 중국에 반환된 지 몇 년 뒤인 2001년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떠난 이유는 여러가지였지만, 홍콩이 점점 살기 힘든 곳으로 변하고 있다는 어머니의 결단이 주요한 이유였다고 첸은 말했다.

홍콩의 중국 반환 뒤, 첸 어머니의 예상대로 실제 홍콩의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았고 홍콩 원주민들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는 줄어들었다. 홍콩에서 태어나 자란 젊은 세대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힘겨워하고 있다. 고향을 사랑하는 첸은 ‘집’에 돌아올 때마다 퇴보하고 있는 홍콩의 모습에 매번 한숨을 쉬었다.

이런 우려 때문이었을까, 2박3일 시위를 벌이다 3일 오후 잠시 집으로 돌아갔던 첸은 한숨도 자지 않고 5시간 만에 다시 홍콩행정청 입구로 나왔다. 그리고 홍콩 젊은이들이 느끼는 중국 반환 이후의 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중국 본토 사람들이 홍콩으로 몰려오면서 홍콩의 시장질서가 완전히 망가졌어요. 작년 초에는 (중국 내부의 불량 분유 파동 때문에) 본토 사람들이 분유를 사재기해 정작 홍콩에 사는 내 친구들은 아기에게 줄 분유를 구할 수 없었어요.

분유통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분유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가진 엄마의 마음은 상상도 못할 만큼 초조해요.” 친구들의 경험을 전한 것이었다. 첸은 분유뿐만 아니라 식자재와 한약재부터 집 월세 등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자본력을 가진 중국 본토 사람들이 사재기를 통해 가격을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을 보호하는 게 홍콩 정부의 의무와 책임인데 정부가 너무 무능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첸은 시위대와 함께 밤을 지새우고 4일 낮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홍콩에서 머물고 있는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첸의 친한 친구 아이리스 입(31)은 상거래 법률 분석 및 자문가로 법률회사에서 일한다. 그 역시 1996년 홍콩을 떠나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치고 7년여 직장생활을 한 뒤 2010년 홍콩으로 돌아왔다. 이직을 하면서 고향에 온 아이리스 역시 홍콩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는 젊은 세대다. 그는 첸과 마주 앉아 최근 5년간 직접 홍콩에서 생활하면서 피부로 느낀 변화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이리스는 지난 17년간 엄청나게 많은 수의 중국 본토 사람들이 사업부터 자식교육까지 다양한 이유로 홍콩으로 이주해오고 있다며,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홍콩 사람에 비해 중국 본토 출신 이주자 비율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중국 본토 사람들은 공장을 열 때 본토에서 사람들을 데려와 고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결국 홍콩 현지인 고용과는 별개예요. 외국계 기업도 중국 사업자들과의 업무상 관계를 위해 베이징에서 사람들을 고용해 홍콩 지사로 데려와요. 친구가 제이피모건에 다니고 있는데 직장에 본토 사람들이 태반이고 홍콩 사람의 경우에는 승진도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특히 홍콩의 중장년 세대는 막 개혁개방을 시작한 중국에 들어가 공장 투자 등으로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이제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밀려들면서 홍콩 젊은 세대는 교육과 취업 등 일상생활에서 박탈감을 느낀다고 한다. “사립 초·중·고등학교와 홍콩대학 같은 일류 대학에서 부자 부모를 둔 본토 학생들의 비율은 점점 늘고 있지만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학생의 비율은 점점 줄고 있어요. 결국 홍콩에서 태어나 자란 젊은 세대는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에요.”

‘한달 월세 196만원’ 그나마 싼 편

첸과 아이리스 세대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부동산 시장에서 나타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중국 본토 사람들은 막강한 자본력으로 140만홍콩달러(약 20억원)짜리 집 여러채를 현찰로 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열쇠를 받아 가요. 마치 과일가게에서 ‘사과 열개 주세요. 바나나도 한다발 주시고요’라고 말하는 것같이 느껴져요. 반면 홍콩 젊은이들은 집을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중국 본토 사람들이 집주인인 집에서 비싼 월세를 내고 사는걸요.”

아이리스도 홍콩섬 서쪽 케네디타운에 위치한 53㎡(약 16평) 크기의 아파트에서 월세를 내며 산다. 월세가 1만4000홍콩달러(약 196만원)이고 별도로 인터넷과 전기·수도료 등 관리비로 3000홍콩달러(약 42만원)를 낸다. 이마저도 각별한 사이인 지인의 집이라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다. 홍콩에서 이 정도 위치에 비슷한 크기의 집을 월세로 구하려면 보통 2만2000홍콩달러(약 300만원) 정도를 지급해야 한다. 12년째 법률 관련 일을 하는 아이리스는 월 4884달러(약 510만원)를 벌고 있어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다. 하지만 홍콩의 대졸 신입사원 월급이 1700달러(약 190만원)인 상황에서 사회초년생 젊은이들에게 월세는 큰 부담이다.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하는 캥거루족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젊은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겠어요. 민주주의는커녕 먹고사는 문제부터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어요. 부모님은 1997년 (중국으로의 반환) 이전이 더 살기 좋았다며 영국 식민지 시절을 그리워해요. 나도 그 시절이 그립고요.” 아이리스가 열변을 토하자 첸이 옆에서 거들었다. “홍콩은 원래부터 경쟁이 치열한 곳인데, 이제 중국인들이 몰려와 좋은 일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어요. 홍콩 사람들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는 게 현실이에요.” 첸은 “홍콩 정부는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중국 본토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는데, 중국 중앙정부가 2017년 홍콩행정장관 선거 후보자들을 미리 걸러 친중국 인사만 행정장관이 될 수 있게 하면 홍콩의 일국양제는 망가질 것이고 그 이후는 어떻게 될지 뻔하다”고 덧붙였다. 물밀듯 밀려드는 중국인들과 중국 돈으로 커지는 빈부격차는 첸과 같은 젊은이들이 중국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며 민주화 시위에 나서게 만든 중요한 동력이었다.

홍콩행정청 앞 애드미럴티역 출구 계단에서 점거농성에 참여중인 대학생들에게도 말을 걸었다. 많은 이들이 홍콩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 학생은 홍콩의 미래를 매우 비관적으로 보았다. “한때 중국 본토 사람들의 시각은 국제화되지 않아 홍콩을 교두보로 삼지 않고는 세계를 상대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고 상황도 변해 홍콩 이용가치가 꽤 떨어졌어요. 그렇기에 중국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홍콩을 주무를 거예요.” 또 다른 대학생은 홍콩도 중국처럼 여론통제 사회로 변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50대 이상의 기성세대는 민주주의에 대해 잘 알지 못해 홍콩이 완전히 중국화되어도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은 그래도 공산당이 집권하지는 않잖아요. 홍콩이 중국 공산당의 영향 아래 운영된다면 우리의 미래와 민주주의는 퇴보할 게 불 보듯 뻔합니다. 중국은 페이스북과 트위터 그리고 구글 등 인터넷 여론을 통제하고 있어요. 홍콩에 여행을 온 중국 본토 사람이 나에게 이번 시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내가 대답할 때마다 들어본 적이 없다며 놀라더라니까요.” 그 옆에 있던 대학생 시위 참가자도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홍콩 인구는 700만명인데 작년 중국인 방문객이 5400만명이에요. 이미 홍콩 경제는 중국 본토 사람들 없이는 자립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홍콩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일주일간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센트럴 점거농성에 참여했다
중국 간섭과 홍콩정부 무능이
자랑스런 홍콩 망가뜨린다는
분노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파트를 현찰로 사는 중국인
집 살 엄두도 못내는 홍콩 출신
사업과 자식교육 등의 이유로
중국 본토 출신들 늘어나면서
홍콩 젊은 세대는 심한 박탈감

농성 6일째인 3일 오후 홍콩섬에 있는 홍콩정부청사 앞 구름다리 사이로 우산 100여개가 엮여 걸려 있다. 이 우산펼침막은 우산혁명을 상징하며, 9월28일 경찰이 최루가스를 이용해 시위대를 과잉진압하는 과정에서 부서진 우산으로 만들었다.
“우산은 한 송이 꽃, 흩어지지 말자”

5일 밤, 홍콩에 낯익은 풍경이 등장했다. ‘세월호로 경제가 붕괴되고 있다’며 세월호 유가족 시위를 압박하던 보수 언론의 선전전이 홍콩에도 상륙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일주일 넘게 계속된 시위로 홍콩의 경제를 이끄는 관광업과 금융업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증시 3% 하락을 이유로 보도했으나 그 근거가 시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신문을 읽다가 이 내용을 본 첸은 언론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중국 관영 매체에는 기대하지도 않아요. 문제는 홍콩 안에서조차 <나우티브이>(NOWtv)나 <애플 데일리>(핑궈일보) 외에 다른 언론은 공정하게 보도하질 않고 있다는 점이죠.” 친중국 시위대가 민주화 시위에 참가한 여성을 성추행하는 영상이 온라인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 홍콩 방송에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언론사 사주가 자신의 사업 성공을 위해 돈이 되는 방향으로 짝퉁 뉴스를 만드는 게 당연한 건가요? 한국도 그런가요?” 첸의 마음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상실한 언론에 대한 불신과 분노에서 체념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 홍콩 시위대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친중 세력 등을 비롯한 민주화 시위 반대 세력의 공격을 받았고, 렁춘잉 행정장관의 최후통첩에 정부청사 진입로 점거를 풀었다. 9일 밤 홍콩 정부는 시위 대표들과의 예정된 대화 일정을 전격 취소했고, 시위대는 이번 주말 시민들이 다시 모여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6일 새벽, 홍콩 정부청사 앞에서 시위 9일째를 맞이한 점거농성 참가자들의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시위대를 지지하는 홍콩 시민들의 마음도 여전했다. 물과 약품을 트럭에 실은 홍콩 시민들의 지원차량이 올 때면 농성 참가자들의 열렬한 박수가 쏟아졌다. 그리고 다음날 동이 틀 무렵 점거농성 참가들이 부르는 ‘우산혁명’ 노랫소리가 홍콩행정청과 홍콩정부청사를 울렸다.

‘내일을 위해 오늘밤을 기억하며,
너와 나 위기에 맞서자.
우리 인생에서 이 밤 그냥 보내면,
다시는 마음껏 외칠 기회가 없을까 두렵다.

우산을 같이 들자, 함께 버티자,
비록 불안하지만 홀로이고 싶지 않다.
함께 우산을 들자. 손을 맞잡고.
버텨나가자. 함께하면 이긴다.
담대하게 쟁취하자. 두려운가.
폭우가 몰아친대도, 투지는 꺾이지 않는다.

우산은 한 송이 한 송이의 꽃, 끝날 때까지 흩어지지 말자.’

홍콩 민주화의 현장에서 보낸 이본 첸의 1주일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홍콩 민주화의 현장에서 보낸 이본 첸의 1주일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홍콩/글·사진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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