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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13 22:00 수정 : 2015.11.14 14:27

힐러리 클린턴

[토요판] 특집
미 대선 1년, 힐러리 클린턴의 도전

▶ 내년 11월8일 치러지는 미국 대선이 1년 앞으로 다가왔다. 올해 봄부터 대선 후보들이 앞다퉈 공식적으로 출마를 선언했다. 내년 2월부터 주별로 민주·공화 예비선거가 치러치고, 넉달간의 당내 경선을 거쳐 아무리 늦어도 6월초가 되면 민주·공화의 대선 후보가 결정된다. 한때 대세론이 흔들리며 고전을 면치 못하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현재로선 백악관에 가장 가까이 가 있다. 그가 마주치고 있는 도전과 정책, 철학을 짚어본다.

힐러리 클린턴(68) 전 미국 국무장관(이하 클린턴)의 이번 백악관 도전은 재수다. 그의 나이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마지막 도전이다. 클린턴은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2008년 민주당 경선에서 ‘변화’를 내건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했던 클린턴이 ‘해피엔딩’으로 정치적 역정을 마감할 수 있을까?

내년 11월8일 치러지는 미국 대선을 1년 앞둔 현시점에서, 클린턴은 아직까지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로 꼽힌다.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쟁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하 샌더스)이 약진하고 있지만 클린턴을 쫓기엔 아직 힘이 다소 부족하다. 고만고만한 인물들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공화당 후보 가운데도 아직 그와 일합을 겨룰 만큼 두각을 드러내는 후보는 없다. 그는 이제 대세론 굳히기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삭제한 메일엔 무엇이 들어 있었나

지난 4월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이후 클린턴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번의 큰 고비를 넘겼다. 대세론이 흔들거리기도 했다. 가장 최근엔 ‘벵가지 사건 특별위원회’의 청문회가 있었다. 2012년 9월 무장 괴한들이 리비아 벵가지의 미국 영사관을 공격해 미국인 4명이 숨지면서 당시 국무장관이던 클린턴의 대응 과정을 놓고 공화당의 화력이 집중됐다. 하지만 지난달 열린 특위 청문회에서 공화당은 ‘한방’을 보여주지 못했고, 되레 클린턴의 능수능란한 답변과 11시간 이어진 청문회를 거뜬히 버틴 클린턴의 체력이 더 평가받았다. 그는 악재를 호재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당내 가장 유력한 잠재적 경쟁자로 꼽히던 조 바이든 부통령의 출마도 잠재웠다. 이제 클린턴의 백악관 입성을 가로막을 장애물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이르다. 아직 당내 경선조차 치러지지 않았다. 민주·공화 각 당내 경선은 내년 2월1일 아이오와주를 시작으로 막을 올린다. 2008년에도 당내 경선이 본격적으로 치러지기 전에는 클린턴의 대세론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버락 오바마(이하 오바마) 후보의 지지율은 클린턴의 절반가량에 지나지 않았다. 뚜껑은 열어봐야 한다.

무엇보다 아직도 파괴력이 작지 않은 악재들이 입을 벌리며 클린턴을 기다리고 있다. 장관 재직 때 국무부 공식 이메일이 아닌 개인 이메일을 사용해 논란이 됐던 이른바 ‘이메일 스캔들’은 아직도 불씨가 살아있고, 그의 남편 빌 클린턴이 대통령 재직 시절 은퇴 뒤 활동을 목적으로 설립한 ‘클린턴 재단’의 외국 후원금 문제도 탐사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젊은 변호사 시절의 아동 강간범 변호 문제도 대선이 가열되면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할 것이다.

이메일 스캔들은 클린턴에게 뼈아픈 일격이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클린턴 대세론은 흔들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뉴욕 타임스>가 지난 3월2일 최초 보도한 이후 이메일 스캔들은 6개월가량 클린턴을 따라다니는 악귀 같은 것이었다.

개인 이메일과 관련된 쟁점은 크게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개인 이메일 사용 자체가 법령이나 지침에 위반되느냐의 여부다. 2005년 제정된 국무부 내부지침에 따르면, 모든 공무는 공용 이메일을 사용하도록 돼 있다. 개인 이메일을 사용할 경우 외부의 해킹에 취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클린턴은 클린턴재단 등에서 사용하던 개인 이메일을 국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도 그대로 사용했다. 따라서 클린턴이 개인 이메일로 공무를 본 것은 지침 위반이 된다. 미국의 국무장관은 국가안보와 관련된 상당히 민감한 정보를 일상적으로 취급하는데, 이를 개인 이메일로 주고받았다면 대통령감으로서는 부적격이라는 공화당 쪽 공세가 이어질 것이다.

또 하나의 쟁점은 실제 이메일에 담긴 내용의 기밀 여부와 외부의 해킹 여부다. 특히 그가 삭제한 메일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느냐도 중요하다. 이메일 논란이 일자 클린턴은 국무장관 재직 시절 약 6만2000개의 이메일을 보내거나 받았으며, 이 가운데 업무 관련으로 판단한 3만490개를 국무부로 이관하고 나머지는 사생활 관련이라 삭제했다고 지난 3월 밝혔다. 클린턴은 당시 “누구도 개인 이메일이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걸 이해하고 그런 사생활을 존중하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화당 쪽에선 ‘삭제한 메일에 민감한 국가안보 관련 사안이 들어 있는 것 아니냐’며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이른바 의도적으로 삭제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미국 형법은 의도적으로 비밀 문서를 허가받지 않은 곳에 보관하거나 삭제할 경우 벌금 및 징역 처벌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첫번째 쟁점인 개인 이메일 사용과 관련해서 클린턴은 최소한 민주당 내에서는 상당 부분 면죄부를 받은 듯하다. 지난달 13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민주당 첫 대선 텔레비전 토론에서 클린턴과 함께 ‘2강’을 형성하고 있는 샌더스는 “국민들이 ‘그놈의 이메일’(damn emails) 문제를 듣는 데 식상하고 지쳐 있다”며 클린턴보다는 공화당의 지나친 정치쟁점화를 비판했다. 샌더스의 공격을 예상하고 잔뜩 긴장했던 클린턴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샌더스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최근 들어 샌더스가 이메일에 완전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라며 전략을 수정하고 있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클린턴의 개인 이메일 사용이 실수라고 지적하면서도 “국가안보에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지 않는다”며 보호막을 쳤다. 현재 클린턴 이메일은 3만여건 가운데 절반가량이 공개돼 있다.

성공의 함정

두번째 쟁점인 이메일 내용의 기밀이나 해킹 여부, 삭제한 메일의 내용 등과 관련해선 클린턴으로부터 이메일 서버를 넘겨받은 미 연방수사국(FBI)이 수사를 벌이고 있다. 일부 비밀로 분류된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긴 하지만, 현재까지는 ‘대외비’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지난달 바이든 부통령은 공식적인 출마 포기 선언을 했다. ‘클린턴 이메일’에 문제가 될 만한 핵폭탄급 내용이 없다는 점을 미리 알아챈 바이든 쪽이 당내 경선에서 클린턴을 이기기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면서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클린턴의 개인 이메일을 해킹해 정보를 빼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해킹한 정보의 기밀 여부를 떠나 상당한 파장을 불러올 수 있다. 특히 삭제한 메일 가운데 하나라도 기밀이 들어 있다면, 클린턴이 이를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이는 사생활을 존중받고 싶어 지웠다는 클린턴의 말이 ‘거짓말’임이 드러나게 되고, 고의적 은폐 의혹까지 제기될 수 있다. 이메일 스캔들은 아직까지 수면 아래 잠복해 있을 뿐이다.

클린턴 자신과 클린턴 진영 입장에선 이메일 스캔들 자체보다도 대응 과정에서 허점과 무능력을 고스란히 노출했다는 점이 더 아플 수 있다. 클린턴은 초기 이메일 스캔들이 가져올 파급효과를 과소평가하고 지극히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클린턴 쪽이 공식적으로 개인 이메일 사용을 잘못이라고 인정한 것은 <뉴욕 타임스>의 최초 보도가 나온 지 6개월여 만인 지난 9월이었다. 그동안 클린턴은 미 국무부 내부 지침 위반에 대해 “편의에 따라” 개인 이메일을 사용한 것은 인정하지만, 국무부 허가를 받아 사용했으므로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이메일 사건을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대응하면서 그의 ‘엘리트 의식’마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클린턴이 요리조리 정면대응을 피하는 6개월 동안 공화당은 신나게 클린턴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다. 공화당은 그의 이름 ‘Clinton’을 따서 ‘7행시’를 유포하기도 했다. “부패하고(Corrupt), 거짓말을 하며(Lying), 무능하고(Incompetent), 자기도취에 빠져 있으며(Narcissistic), 두 얼굴을 가졌고(Two-faced), 공격적인(Offensive), 잔소리꾼(Nag)”이라는 것이다. 클린턴에겐 거짓말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온 무명의 샌더스에게 대선 풍향계로 일컫는 아이오와주와 뉴햄프셔주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뒤지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클린턴이 ‘국민정서법’을 외면하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08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도, 2002년 상원의원 시절 이라크 침공 무력사용 권한 법안을 지지한 것에 대해 비난이 일자 분명한 사과와 해명 없이 무시해 버렸다. 이 때문에 당시 경쟁 후보였던 오바마한테 고전을 면치 못했다.

클린턴의 이런 성격을 이른바 ‘성공의 함정’이란 심리적 분석에서 찾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은 자기의 판단에 잘못이 있었다는 점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는 구석이 있다. 그는 남편 빌 클린턴의 이른바 ‘르윈스키 스캔들’로 여성으로서의 삶에는 큰 상처를 입었지만, 공적인 삶으로서의 이력은 2008년 민주당 경선 패배 전까지는 대체로 탄탄대로를 달려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빌 클린턴이 아칸소주 지사이던 시절(1979~1981/1983~1992) 그는 주지사의 부인이었고, 1993년 백악관에 입성하고 나서는 8년 동안 ‘퍼스트레이디’였다. 2000년부터 11월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됐으며, 2009~2013년엔 제국의 국무부 장관으로 세계를 누볐다. 그가 ‘성공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언제든 비슷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이메일 스캔들이 계속 번식하는 동안, 클린턴 캠프 안에서 클린턴한테 사태의 심각성을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취약성도 드러냈다. 모두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국무부가 정보공개법에 따라 공개한 클린턴의 개인 이메일을 보면, 국무부 참모들은 자신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이너서클로 편입시켜 준 클린턴 전 장관에게 이메일을 통해 일상적으로 칭찬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클린턴이 기사나 현안에 대한 의견을 부탁할 때도, 참모들 가운데 건설적인 비판을 제공하는 답변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미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직언할 수 있는 참모가 없다는 점은 앞으로도 대선 운동 과정에서 그를 잘못된 의사결정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

‘외국정부 후원금’ 고구마 줄기처럼

그동안 이메일 스캔들에 묻혀 있었지만 아동 강간범 변호 문제는 클린턴에게 더 치명상을 입힐 잠재적 파괴력이 있다. 클린턴은 여성과 아동 인권을 옹호한다는 이미지가 강하고, 실제로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그의 이런 노력과 이미지는 강간범 변호 문제로 한순간에 날아갈 수 있다.

힐러리 클린턴의 삶
사건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빌 클린턴을 따라 아칸소주로 이주해 변호사로 활동하던 클린턴은 12살의 여아를 성폭행한 41살의 피의자를 국선변호하게 된다. 27살의 애송이 변호사였던 클린턴은 검찰 주장의 허점을 파고들어 징역 30년 이상을 선고받았어야 할 피의자를 1년형만 받고 풀려나게 했다. 그는 2003년 펴낸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에서도 이런 사실을 고백한 바 있고, 2008년 민주당 경선 때도 잠시 언론의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크게 쟁점화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7월 보수 성향의 미국 뉴스 사이트인 <워싱턴 프리 비컨>이 미보도된 채 묻혀 있던 한 매체와의 인터뷰가 담긴 육성 테이프를 찾아냈다. 아칸소대학의 클린턴 서고에서였다. 이 테이프를 통해 클린턴이 피의자가 성폭행범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클린턴은 아이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고 반박하고 증거 보전의 문제점을 지적해 피의자를 감형시켜 준 것을 자랑하면서 웃기까지 했다.

아이들 천국이라는 미국에서 소아 성폭행범을 감형시켜 준 것을 자랑하며 웃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클린턴은 폭로 직후 자신의 의지에 반해 성폭행범의 변호를 맡게 됐으며, 변호사로서 직업적 의무를 다한 것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자랑과 웃는 목소리’는 두고두고 그를 괴롭힐 가능성이 높다.

이 사건은 클린턴이 주요 정치적 자산으로 내세웠던 아동과 여성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과 충돌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의 가장 주요한 지지 기반인 여성들의 신뢰가 허물어질 수 있다. 클린턴은 자서전 등에서 “어머니는 모든 인간, 특히 아동들이 당하는 학대에 분개했다”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자신이 아동과 복지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고 소개한 바 있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케네디 대통령의 약속에 자극받아 우주비행사 훈련에 지원하고 싶다는 편지를 미국 항공우주국(나사)에 보냈지만, “여자는 지원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 여성의 권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얘기한 바 있다.

이런 개인적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클린턴은 ‘퍼스트레이디’ 시절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정의 어린이에게 연방 차원의 지원을 하는 ‘아동건강보험 프로그램 법안’을 추진해 성공시키고, 사법부에 여성폭행방지사무소를 설치하는 데도 기여하는 등 적잖은 성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공화당과 유권자들은 ‘클린턴 테이프’를 통해 드러난 클린턴과 아동 복지에 힘썼던 클린턴 가운데 어느 모습이 진짜냐고 추궁할 것이다. 특히 클린턴은 2008년 대선 때와 달리 ‘첫 여성 대통령’ 브랜드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더 위험하다.

‘클린턴 재단’의 외국 정부 후원금 문제도 고구마 줄기처럼 삐져나오고 있다. 클린턴 재단은 그의 남편인 빌 클린턴이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세웠으며, 사실상 클린턴 가족이 소유하고 있다. 클린턴은 국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외국 정부로부터 새로운 후원금은 받지 않겠다는 협정을 오바마 쪽과 체결했다. 미국의 대외정책을 총괄하는 국무장관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에 자칫 외국 정부들이 로비를 목적으로 클린턴 재단에 후원금을 투척할 수도 있어 이를 미리 막기 위한 조처였다.

하지만 클린턴이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던 2010년 클린턴 재단이 알제리 정부로부터 50만달러를 받은 사실이 드러난다. 또한 알제리 정부 이외에도 쿠웨이트, 카타르, 오만, 도미니카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노르웨이 등 기존 지원국 정부로부터도 후원금을 계속 받아온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알제리를 제외하면 협정에서 금지하고 있는 ‘새로운 지원국’은 아니다. 하지만 적절한 처신이냐는 물음표는 계속 붙어다닌다.

1971년 소아 성폭행범 변호 때
피의자 감형시켜 준 것 자랑하며
웃는 육성테이프 발견돼 치명타
정치적 자산인 아동과 여성문제
신뢰에 구멍이 날 수 있는 위기

동성결혼·총기규제 입장 표변
월스트리트 선거자금도 적잖아
‘이름뿐인 진보주의자’ 혹평
그럼에도 마지막 도전 성공하면
‘대통령 유리천장’ 깨는 첫 여성

차갑도록 계산적인 변신

또한 국무장관을 은퇴하고 클린턴이 재단 이사로 복귀했던 2014년에도 캐나다,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오만으로부터도 후원금을 받았다. 클린턴이 공식적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한 시기는 아니지만, 출마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던 당시에 이해관계가 있는 외국 정부로부터 후원금을 받은 행위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대통령이 되면 결국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외에도 최근 들어 그가 장관 재직 시절 클린턴 재단의 사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나 재단이 후원금을 방만하게 썼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과 승부사적 기질,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은 현재 어떤 대선 후보보다도 그의 경쟁력을 높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정치 인생이 길어지면서 ‘차갑도록 계산적인’ 성격과 ‘정치적 필요에 따라 정책 입장을 바꾸는’ 그의 변신은 갈수록 유권자들의 호감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유권자들이 클린턴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도 단순히 이메일 스캔들 탓이 아니라 이런 판단들이 축적돼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2008년 대선 때의 입장과 ‘민주적 사회주의자’ 샌더스가 경쟁자로 등장한 이번 대선에서의 입장은 몇가지 정책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동성결혼과 관련해 클린턴은 2007년 8월 ‘개인적으로는’ 동성결혼에 반대한다면서, 동성결혼 합법화 여부는 개별 주들에 맡겨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2015년 6월 미 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이 나오고 동성결혼 찬성 여론이 많아지면서 그는 이번 선거에선 “동등한 결혼권을 완전히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너무너무 자랑스럽다”며 동성결혼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6일 최종 불허한 키스톤 엑스엘(XL) 송유관 사업에 대해서도 그는 최근까지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키스톤 송유관 사업은 오일샌드 생산지인 캐나다 앨버타주와 정유시설이 있는 미국 텍사스주의 멕시코만을 송유관으로 연결하는 대규모 사업으로, 환경단체들은 이 사업이 환경을 파괴할 수 있다며 거세게 반발해왔다. 키스톤 송유관이 지나가는 주의 주민들 표도 고려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론 민주당의 기반인 환경론자들의 반대도 의식해야 했기 때문에 어정쩡한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정치적 철학보다는 공학적 접근을 우선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총기 규제에 대해서도 클린턴은 여러 차례 입장을 바꾸었다. 그는 강력한 총기 규제를 찬성하는 쪽이었으나 2008년 선거에선 오바마 후보와의 대립을 선명하게 끌고 가기 위해 오히려 강력한 총기 규제에 반대했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 아버지가 총 쏘는 법을 가르쳐줬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나의 부모와 조부의 신념이 나의 신념”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선거에선 상대적으로 총기 규제에 소극적인 샌더스를 압박하기 위해 다시 총기 소유를 강하게 규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가 샌더스를 의식해 월스트리트 개혁을 외치고 있지만, 월스트리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끊임없이 나온다. 그는 아메리칸에어라인이나 제너럴일렉트릭, 엑손모빌, 보잉 등의 사기업과 강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으며, 거의 60여개 기업이 2600만달러 이상을 클린턴 재단에 기부했다는 보도들도 나오고 있다. 이미 빌 클린턴이나 힐러리 클린턴이 몇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월스트리트로부터 끌어들인 선거자금도 적지 않다. 샌더스 유세 현장에서 만난 유권자들은 ‘샌더스를 지지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결같이 “힐러리 클린턴이 우리를 대변할지 믿을 수가 없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양극화되는 미국 사회에서 중산층 복원을 위해선 ‘상위 1%’로의 부의 집중을 막아야 하는데, 클린턴은 이미 그들과 한통속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클린턴을 ‘이름뿐인 진보주의자’라고 혹평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마지막 도전이 성공한다면 미국에서 ‘대통령 유리천장’을 깬 최초의 여성이라는 의미는 적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가 2008년 ‘여성 대통령’을 선거전략으로 전면에 내세우지 못한 것도 미국 백인 남성 사회의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분위기를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대선 또는 대선 후보 경선에 도전했던 미국의 여성 후보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빅토리아 우드헐(1872년 평등권당), 마거릿 체이스 스미스(1964년 공화당), 셜리 치점(1972년 민주당), 엘리자베스 돌(2000년 공화당). <한겨레> 자료사진

미국 역사의 여성 후보들

그는 2008년 6월 민주당 경선에서 오바마 후보한테 패한 뒤 어쩌면 가장 진심이 담겨 있을 만한 연설을 했다. 선거기간 동안 ‘여성 대통령’을 부각시키지 않았던 그는 작심한 듯 여성의 권리에 이날 연설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우리가 이번에는 가장 높고 가장 단단한 유리천장을 부술 수 없었지만, 1800만개의 균열을 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좀더 쉬운 길이 될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가 변신을 하지 않은 게 있다면 여성의 권리에 대한 옹호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클린턴의 삶의 궤적을 쫓다 보면 그가 정치인 빌 클린턴의 내조자로만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독립적인 정치를 꿈꿨음을 알 수 있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그는 좋은 남편감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성공을 목표로 대학에 들어간 첫 여성 세대이기도 했다. 남편이 주지사이던 시절인 1983년엔 아칸소주 교육표준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명돼 주 표준 교육과정과 교실 크기, 입학 전 홈교육 프로그램 등을 만들었다. 1990년엔 남편 대신 주지사로 출마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비공식 여론조사 결과 여론이 좋지 않자 포기하기도 했다.

빌이 대통령이 된 뒤에는 백악관 ‘웨스트 윙’에 퍼스트레이디로서는 처음으로 별도의 집무실을 만들었으며, 전미 헬스케어 티에프 팀장을 만들기도 했다. 인사권 등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부적절한 개입’이라는 비판마저 일었다. 빌의 대통령 공식 임기가 끝나기 몇달 전인 2000년 11월엔 뉴욕시 여성 상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2008년 오바마한테 국무장관직을 제안받았을 때 거부할 수 있는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그는 수용했다. 그가 ‘여성 대통령’이 된다면 이러한 경력들은 그의 엄청난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다.

그간 미국에서 여성들의 대권 도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질 부족이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탓에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여성 참정권을 주창하며 1872년 신생정당인 ‘평등권당’으로 대선에 도전했던 미국의 ‘첫 여성 대권 후보’ 빅토리아 우드헐은 자유연애를 옹호했고, 남성과 여성에 대한 사회의 이중 기준을 비판하던 선각자였다. 그러나 그는 선거 며칠 전 “외설 신문을 발행했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남편과 함께 연방보안관에게 체포됐다.

1964년 공화당 소속으로 당내 경선에 출마했던 마거릿 체이스 스미스 당시 상원의원은 같은 당의 조지프 매카시의 마녀사냥에 저항한 당찬 여성이었다. 하지만 1955년 이후 그가 유지해온 상원 100% 출석률 기록을 깨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주말에만 선거 유세를 했다. 결국 스미스는 3개주 경선에만 참여한 뒤 중도하차했고, 선거비용으로 355달러를 쓰는 데 그쳤다.

민주당의 첫 여성 대선 후보로는 1972년 출마한 셜리 치점 당시 하원의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흑인이었던 치점은 기존 민주당 정치권으로부터 무시당했고, 심지어 흑인 여성 표조차도 거의 얻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내가 의회 선거에 출마할 때나 대선에 출마할 때, 흑인이라는 사실보다는 여성이라는 사실로 더 차별을 겪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0년 대선에서 공화당 경선 경쟁에 뛰어들었던 전 미국적십자사 총재 엘리자베스 돌이 비교적 주목을 받았지만, 그 역시 선거자금 부족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무너졌다.

냉정히 따져보면 클린턴에 대한 피로감과 흠결이 존재하지만 현재로선 그가 첫 여성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안 될 가능성보다 훨씬 높다. 수십년 동안 미국 선거를 지켜본 사람들도 그냥 ‘감’이라면서 클린턴의 최종 승리를 점친다.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는 것임엔 틀림없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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