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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1.13 22:03 수정 : 2015.11.14 14:30

[토요판] 특집
미 대선 1년, 힐러리 클린턴의 도전 / 클린턴의 외교성향

‘클린턴 국무장관’은 그가 백악관에 입성했을 때 대외정책의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거울이다. 때문에 세계 각국은 힐러리 클린턴의 미국 국내 정책에 대한 입장보다는 대외정책에 더 촉각을 곤두세운다.

클린턴이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던 버락 오바마 행정부 1기, 즉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미국의 대외정책은 그가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린턴이 자서전 <힘든 선택들>에서 전하고 있듯이, 오바마 대통령은 당선 직후 자신은 국내 현안에 집중할 테니 외교정책을 맡아달라고 클린턴에게 요청했고, 인사권 등 전권을 클린턴에게 부여했다.

클린턴의 대외정책은 ‘강한 미국’이라는 기치 아래 적극적 개입주의를 옹호하고, 군사적 수단 사용을 꽤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도 중도 또는 강경한 쪽에 가깝다. ‘매파’라고 매도할 정도는 아니지만 국내 정책에 대한 그의 입장이나 오바마 대통령의 대외노선보다는 확실히 강경한 쪽에 서 있었다. 보수적인 로버트 게이츠 당시 국방부 장관과, 역시 중도 혹은 보수적인 커트 캠벨 당시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국무부 차관보가 클린턴의 대외정책과 호흡을 맞추는 핵심 참모들이었다.

오바마는 국내현안에 집중
외교정책은 클린턴에 전권
오바마 대외노선보다 강경
공화당원 출신 아버지의 영향

아프간과 이라크 침공 찬성
시리아 반군 무기지원 주장
20년간 줄곧 군사적 개입에
찬성해왔다는 비판도 나와

그는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에서 이런 대외정책의 가치관이 ‘보수적인 공화당원임을 늘 자랑으로 여기던’ 아버지의 정치적 영향을 받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을 찬성했으며,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던 시기에도 오바마의 뜻과 달리 시리아 반군에 대한 무기 지원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가 지난 20년 동안 군사적 개입에 찬성하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다는 비판마저 나온다.

그는 국무장관 시절 중국의 부상에 대해 강하게 견제하는 쪽이었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을 입안하면서 백악관은 중국의 반발을 우려해 ‘재균형’(Rebalancing)이라는 중립적인 용어를 선호했지만, 클린턴은 군사적 뉘앙스가 담겨 있는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라는 표현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클린턴 퇴임 뒤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재균형’이라는 용어로 다시 복귀했다. 워싱턴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쓸데없이 ‘회귀’라는 용어를 사용해 중국의 위협인식을 키웠다는 비판적인 견해가 적지 않다.

대북정책에서도 이명박 정부의 ‘북한 붕괴론’과 북한의 핵실험 등의 영향을 받은 탓도 있지만, 북-미 관계 개선에 대체로 소극적이었다. <위키리크스>를 보면 한-미 당국자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악화로 그가 사망할 시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클린턴이 2010년 5월26일 방한해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대북정책에서)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가 필요하다”고 언급한 이후 ‘전략적 인내’는 오바마 행정부 대북정책의 아이콘처럼 됐다. 전략적 인내는 ‘미국이 먼저 유화책을 내놓지 않고 북한이 굽히고 들어오기를 기다리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워싱턴/이용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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