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 첫날인 22일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많은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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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특집
YS 빈소에서 생긴 일
인간의 삶에 예정된 가장 분명한 미래는 죽음이다.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대통령이었던 자도, 거리의 행려병자도 반드시 죽는다. 죽음의 사회적 무게가 다르게 전해질 뿐이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국민들에게 그의 시대와 우리의 현실을 반추하게 한다.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다양한 일이 벌어진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은 3개 층으로 된 건물이다. 김 전 대통령의 빈소였던 1호실은 3층에 있고, 이 층을 전부 사용했다. 전직 대통령의 장례 기간에도 이 건물 1층과 2층의 다른 빈소에선 또 다른 고인과 상주들이 문상객을 맞았다. 장례식장은 경사지에 지어져 입구가 1층과 3층 양쪽에 있다. 3층을 전부 사용하는 1호실은 3층 출입구가 전용 출입구가 되는 셈이다. 기자들도 3층 출입구에 여덟 팔(八) 자로 ‘진’을 쳤다. 빈소는 실내가 좁았다. 기자들은 일부가 빈소로 들어가 방명록의 글귀와 조문 상황, 조문객의 대화를 살핀 뒤 밖의 기자들에게 전하는 일을 반복했다. 나머진 입구 바깥을 지켰다. 빈소를 드나드는 이는 기자들의 진을 지나며 신원을 밝히고 부고를 접한 심경과 고인과의 인연, 감상 등을 털어놓았다.
문상객의 드나듦이 뜸한 이른 아침엔 여지없이 카메라의 자리다툼이 벌어졌다. “전체적으로 조금만 들어갑시다. 뒤에 의자 조금 빼면 되겠네”, “사진기자분들은 자리가 없어요.” 자리가 좀체 정리될 기미가 없다. 입구를 지키는 경호원인 듯한 이가 기자들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대략 정리되셨으면 통로 확보해 주시구요.” 청소부가 대걸레로 기자들이 비켜난 입구 바닥을 쓸고 갔다. 누군가 휴지로 바닥의 물기를 닦았다. 장례 둘째 날인 23일 오전 9시 반 검은색 옷으로 차려입은 중년 여성과, 역시 검은색 정장 차림의 남성이 검은색 차 뒷좌석에서 내려 장례식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근데 누구야?” “누구야 대체.” 플래시는 이후 터지기도, 터지지 않기도 했다. 유독 검은 차의 뒷좌석에서 내리는 문상객이 많았고, 그렇게 온 이들은 빈소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검은차 뒷좌석에서 내린 이들은들어갔다 몇 분 뒤 나왔다
무명의 연설가, 편지 쓴 이도
떠나간 대통령을 찾았다 죽음 평등하듯 빈소도 평등하다
대통령부터 촌로까지 드나든
‘국가장’의 빈소는 과연
‘통합과 화합’의 장소였을까 시간이 가면서 얼굴이 알려진 이들이 나타났다. 빈소를 찾은 이는 입구에서 기자들에게 고인에 대한 기억을 하나둘 꺼내 보였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아무 말 없이 들어갔다. 말없는 이는 문상을 마친 뒤 기자들의 표적이 된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도 빈소를 찾았다. 김 전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이) 상도동에 난방도 제대로 못한 협소한 공간에서 생활할 때의 기억이 있다”고 했다. 기자들은 순순히 그를 보내줬다. 전직 대통령이 만든 공간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드나든다. 테두리를 두른 모자에 금빛 종이 왕관과 선글라스를 쓴 중년 여성도 그중 하나다. 왕관을 쓴 여성은 23일 오전 조용히 빈소 안으로 들어갔다. 모자에 두른 왕관을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특별히 눈에 띌 차림은 아니었다. 기자들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경호원만이 그를 제지했다. “여기선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경호원은 여성이 든 음료수 봉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는 갑자기 큰 목소리로 말했다. “박씨의 씨를 말려버릴 거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쫓겨난 여성은 빈소 밖으로 나와서도 “경기도 광주 노국공주 평강공주 다 해먹어…” 같은 말을 크게 떠들었다. 빈소 입구를 지키는 경호원은 그 이후 차림새가 허름한 문상객을 잡아 신원을 확인한 뒤 조문을 허락했다. 중절모를 쓴, 70대로 보이는 한 사내는 서 있는 기자들 앞으로 오더니 대뜸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하면 되나?”라고 물었다. 기자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뒷짐을 진 채 그는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일을 하신 분…”으로 시작되는 일장연설을 했다. 기자들이 그를 무시하자 한 직원이 그를 제지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중절모의 사내는 식장 밖에서 연설을 마무리했다. 이혜훈 전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의 이름을 ‘김대중’으로 잘못 말하는 실수를 했다. 그는 빈소에 들어서며 미리 준비한 말을 했다. “민주화의 상징이시고 금융실명제를 통해 부정부패 청산의 초석을 만든 김대중 대통령 영면하시기를 바란다. 대한민국의 큰 별이 하늘로 갔다.” 그는 카메라기자들의 요청으로 이름을 고쳐 같은 문장을 반복해 말해야 했다. 김을동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이 자신의 아버지인 김두한에게 경제적 도움을 줘 고마웠다고 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아버지와 3대 민의원을 같이 했다. (김 전 대통령이) 나이는 (아버지보다) 어리지만 술을 많이 사줬다. 아버지는 돈이 없고 당신은 여유가 있으셔서 용돈도 주고 술도 많이 사줬다고 항상 말씀하셨다”고 했다. 술과 돈은 보스 기질이 강한 김영삼을 ‘라이벌’ 김대중과 구분짓는 특징이다. ‘먹을 것’으로 고인을 떠올리는 이는 김 의원 말고도 있었다. 이낙연 전남지사는 방명록에 “아침에 가면 사모님의 시래기국, 밤에 가면 대통령님의 와인을 주셨던 상도동을 기억하며, 감사드립니다”라고 썼다. 방명록은 편지지가 되기도, 홍보용 광고판이 되기도 했다. 박종숙이란 이는 “정치에 대해서는 식견이 부족합니다…”로 시작되는 장문의 편지를 깨알 같은 글씨로 두 장에 걸쳐 썼다. 자칭 ‘통일 대통령’이란 이는 방명록에 “김 전 대통령을 통일 대통령으로 추서한다”로 시작하는 글을 길게 써놓은 뒤, 관련 유인물을 놓고 갔다. 다른 전·현직 대통령들도 전직 대통령의 빈소를 찾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둘째 날에 왔다. 이날 새벽 귀국한 박 대통령은 검정 상·하의 차림으로 나타나 다른 이들처럼 3층 입구가 아닌 1층을 통해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3층 입구에서 진을 친 채 옴짝달싹 못한 기자들은, 1층으로 내려가 있던 몇명을 제외하곤 청와대 경호원들의 얼굴만 봐야 했다. 박 대통령의 조문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분향하고 헌화한 뒤 잠시 묵념을 하고 차남 현철씨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고만 전했다. 온다 만다 말이 많던 전두환(84) 전 대통령은 장례 4일차인 25일 오후 4시 빈소에 나타났다. 검은색 양복에 검은색 넥타이를 하고 검은색 에쿠스를 탄 그는 역시 검은색 옷을 입은 경호원 2명과 함께였다. 건강해 보이는 걸음걸이에 편안한 표정이었다. 빈소 입구에 몰려든 기자들에게 “수고들 하세요”라고 말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문상을 마치고 내빈실로 가 현철씨를 비롯한 상주들과 짧게 대화한 뒤 돌아갔다. 기자들이 전두환의 차로 몰려들어 “와이에스(YS)와의 역사적 화해라고 볼 수 있는 거냐” 등을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전두환이 장례식장에 도착해 떠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분가량이었다. 한국갤럽이 지난 8월 조사한 역대 대통령 지지율을 보면, 김영삼은 ‘꼴찌’ 노태우(0.1%)보다 한 계단 높은 1%였다. 박정희가 가장 많은 44%였고, 노무현이 24%, 김대중이 14%였다. 김영삼은 전두환(3%)보다 지지율이 낮았고 이명박(1%)과 동률이었다. 서거 이후 지지율은 변화 조짐을 보였다. 26일 리얼미터가 발표한 ‘국가 발전에 기여한 대통령’이 누구인지를 묻는 설문에서 김 전 대통령은 지지율 4.1%로 박정희(40.7%), 노무현(29%), 김대중(14.1%) 다음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빈소가 있던 서울대병원의 본관 3층 중환자실엔 지난 14일 집회에 참석했다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중태에 빠진 농민 백남기(68)씨가 있다. 김 전 대통령의 빈소와 200m가량 떨어졌다. 병원 입구엔 경찰청장의 파면을 요구하는 천막농성장이 있다. 권용식(61) 전남 보성군 농민회장은 백씨가 구급차에 실려온 이후 내내 이 자리를 지켰다. 23일 그에게 “언론의 관심이 모두 김 전 대통령에게 쏠린 듯하다. 조금 전 박 대통령도 병원을 다녀갔다”고 하자 그는 “그 사람들한테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짧게 말했다. 기자들이 몰려든 장례식장과 달리, 지나는 이들은 농성장에 무심해 보였다. 박 대통령은 장례기간인 24일 국무회의에서 “복면 시위는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슬람국가(IS)도 그렇게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전직 대통령의 죽음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시위 군중을 테러범 취급 하는 권력과 고인의 유지인 ‘통합과 화합’ 사이에 나타난 불일치를 두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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