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김영삼은 같고도 달랐다. 상대를 빼놓고 정치인생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 자극을 주고받았다. 1985년 3월6일자로 가택연금이 해제된 김대중(왼쪽 둘째)·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 의장의 자택에서 손을 잡고 지지자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경향신문 제공
|
[토요판] 특집
YS와 DJ의 마지막 만남
▶ 노무현에서 김대중(DJ), 김영삼(YS)까지 세상을 그나마 조금은 나아지게 한 세 명의 전직 대통령이 모두 별이 되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지지율이 바닥을 기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공에 비해 과도 적지 않은 그를 다시 보게 되는 이유는 오늘의 민주주의가 너무 초라하기 때문일 겁니다. 평생을 숙적으로 살았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았던 디제이와 와이에스. 두 사람의 처음과 끝을 따라가면서 양김시대가 남겨놓은 성과와 과제를 새겼습니다.
‘거산’이 움직였다.
전날 자정 급격하게 떨어진 혈압이 오전 내내 회복되지 않았다고 했다. 의료진이 혈압회복제뿐 아니라 심장 박출량을 늘려 혈압을 조절하는 약인 강심제 등을 써서 혈압 수치를 겨우 끌어올렸다고도 했다. 이번이 벌써 네번째 고비였다.
격절의 시절을 접고 화해를 할 날이 많지 않음을 직감했을까. 2009년 8월10일 이른 오전, 김영삼(YS) 전 대통령 쪽에서 김대중(DJ) 전 대통령 쪽으로 병문안을 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날 오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울 신촌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전격 방문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즈음 더 악화돼 있었다는 사실은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를 시점 앞에서 무력했다.
당시 디제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병원에서 29일째 치료를 받던 상황이었다. 측근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역에서 하루 종일 뙤약볕을 맞으며 엠비(MB) 정권에 대한 항의를 한 것이 원인이 됐다고 했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버지’는 와이에스였다. 노무현은 와이에스가 자신을 “때로는 근엄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가까이에 때로는 멀리하면서 노련하게 다뤘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토록 자신이 총애했던 ‘정치적 양자’의 죽음 앞에서도 애써 무심한 척했던 와이에스였다. 그런 그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옛 동지 ‘후광’을 찾은 것이다.
둘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는 2005년에도 있었다.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그해 11월6일 오후 와이에스는 디제이의 동교동 자택으로 전화해 5분가량 통화했다고 한다. 디제이가 그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병문안을 가려 했으나 병원 쪽의 면회 사절 방침에 가지 못하게 되자 퇴원 이후 위문전화를 한 것이다. 와이에스는 디제이에게 “건강이 어떠시냐”고 먼저 물었고, 디제이는 “좋지는 않지만 괜찮다. 전화해줘 감사하다”고 답했다. 디제이도 “김 대통령은 어떠시냐, 손(명순) 여사는 어떠냐, 대만은 잘 다녀오셨나”고 안부를 건넸다. 와이에스는 “괜찮다”며 이희호 여사의 안부를 물으며 화답했다. 와이에스는 위문전화를 한 뒤 측근들에게 “병원에 가보지도 못했는데 뒤늦게나마 통화하니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디제이와 와이에스가 드디어 화해를 한 것이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후 두 사람은 다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양김이 저문 오늘, 그 두 사람이 목숨마저 내걸고 싸운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는 남루하기 짝이 없다. 박근혜 정부는 ‘와이에스를 민주주의의 거목’이라 칭하는 그 입으로 시위대를 아이에스(IS)에 비유하고 있다. 와이에스의 ‘정치적 아들’이라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정부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불온세력’이라고 말한다. 양김이 말한 민주주의는 이들과 얼마나 같고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물과 기름의 두 동지
동시대에 태어나 비슷한 시기에 정치에 입문한 김대중과 김영삼은 오랜 숙적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본격적인 대결은 ‘40대 기수론’이 열풍을 몰고 온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비롯됐다. 당선 수락 연설문까지 준비했을 정도로 승리를 자신하던 김영삼은 이철승과 손잡은 김대중에게 역전패를 당했다. 와이에스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고 디제이를 도와 대선을 치렀다. 박정희는 관권, 금권에다 지역감정까지 동원한 끝에 95만표 차이로 겨우 승리했다. 71년 대선에서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처음 불거진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그 퇴행성과는 별개로 디제이와 와이에스의 강력한 정치적 기반이 됐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체제를 선포하자 두 사람은 민주투사의 길을 걷는다. 그런 그들에게 유신정권은 납치 살해 시도와 초산 테러부터 투옥과 가택연금, 국회의원 제명까지 일관되게 적의를 거두지 않았다. 79년 10·26 사태로 ‘서울의 봄’이 오나 싶었지만 두 사람에게 닥쳐온 건 더 잔인한 겨울이었다. 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한 디제이는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전두환 세력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 디제이가 내란음모 사건으로 체포된 5·17 비상계엄 확대 때 가택연금을 당한 와이에스는 신군부의 압력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인 1983년 5월18일 김영삼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5개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상도동 자택에서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그의 단식은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끌면서 23일 동안 지속됐다.
불의한 권력에 함께 저항했다는 점에서 뜨거운 동지였지만, ‘직관의 와이에스, 논리의 디제이’라는 말처럼 두 사람은 어법과 삶의 태도, 사고방식에서 기질적으로 달랐다. 디제이는 와이에스를 “대단히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고 비난했고, 와이에스는 디제이를 “아주 쉬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고 비꼬았다. 물과 기름이었다.
디제이와 와이에스는 화법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달변의 디제이는 토론에서 자기가 주체가 되어야 하고 말을 독식한다는 비판을 받곤 했다. 논리적으로 말을 하는 탓에 비서관들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러나 눌변의 와이에스는 상대방의 말을 굉장히 잘 들어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맞장구도 쳐주고 상대방이 짓궂은 말을 해도 “씰데없는 소리” 한마디로 넘어가는 스타일이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는 <김대중 죽이기>(개마고원)에서 이런 두 사람의 화법 차이 때문에 언론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싫어하는 정치인에 각각 와이에스와 디제이가 꼽힌 이유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와이에스와 일대일 독대를 하고 난 인사들은 ‘내가 천하의 와이에스를 가르치고 왔다’는 뿌듯함을 느낀 반면, 디제이와 독대를 한 인사들은 ‘역시 디제이에게 한 수 배우고 나왔다’는 불편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관행적으로 주고받았던 언론계 촌지문화를 둘러싼 와이에스와 디제이 차이가 한몫을 했다는 분석도 많다. 기자들과 친하게 지내 회식도 자주 했던 와이에스가 100만~200만원씩 통 크게 촌지를 쥐여줄 때, 디제이는 20만~30만원 정도의 촌지를 줬다고 한다. 주는 방식도 와이에스가 지갑째 통째로 건넸다면 디제이는 뒤돌아서서 돈을 센 다음 안겼다고 전해진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누구를 더 좋아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이동형, <김대중 vs. 김영삼>, 왕의 서재)
그래서였을까? 와이에스 대통령의 일등공신은 언론이었다. 1992년 대선 때 조선일보는 와이에스를 가장 열심히 밀었다. 조선일보가 사설과 칼럼, 기사를 통해 ‘국민당 정주영 후보 죽이기’와 ‘김영삼 후보 키우기’에 앞장서자 국민당은 조선일보 취재를 일절 거부하고 신문 불매운동을 벌이는 등 항전을 벌였다. 1992년 대선 직후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는 조선일보 사주의 집을 직접 방문해 감사를 표했다. 이에 비해 디제이는 평생 조선일보와 불화하며 편파 보도의 피해를 입었다.
와이에스는 참모와 비서진에게 관대한 ‘덕장형 지도자’로 불렸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월간중앙>(95년 3월호) 인터뷰에서 밝힌 일화다. “대통령이 여당 대표 시절, 언젠가 외국의 국가원수가 왔을 때 일어났던 해프닝이 생각나는군요. 처음엔 연미복을 입고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가 나중에 평복으로 바뀐 걸 밑에서 챙겨주지 않아, 공식 행사장에 혼자서만 연미복을 입고 나간 적이 있어요. 당신으로선 얼마나 곤혹스러웠겠습니까… 그래도 와이에스는 측근에게 화를 내지 않고 씩 웃고 마는 그런 스타일입니다.”
정치부 신입기자들의 집안 대소사까지 챙기거나, 자주 가는 호텔 직원의 결혼식을 알고 나중에 축의금을 준 일, 지방 대의원 자식이 결혼하는데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던 일 등은 정치인 와이에스 곁에 사람들이 들끓었던 까닭을 말해준다.
2009년 ‘MB정권’ 민주주의 위기노무현 서거 직후의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한 김대중을
8월10일 김영삼이 찾아갔다
양김의 ‘마지막 만남’이었나 목숨걸고 유신체제 맞섰지만
‘물과 기름’처럼 다른 둘은
“어려운 일 쉽게 생각하는 사람”
“쉬운 일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
이라며 서로 이해 못했던 동지 무엇이 정의를 위한 길인가 자신의 정치적 웅거지였던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를 운영하는 방식에서도 둘의 차이는 드러난다. 상도동은 사안이 벌어질 때마다 모여서 일을 처리했고 동교동은 사안마다 담당자를 두고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다시 말해 상도동은 말로 일하고 동교동은 글로 일했다. 강준만 교수의 <김영삼 이데올로기>(개마고원)에는 이와 관련한 일화(<말>지 92년 5월호 기사)가 인용돼 있다.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 1984년 5월 재야정치인들이 제5공화국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한 정치단체) 시절 모처에서 김동영(와이에스의 최측근)과 김영삼이 심하게 언쟁을 했다. ‘야, 그따위 일을 왜 벌였어?’ ‘내 나이가 몇인데 큰소립니까?’ ‘이 자식이.’ 성질이 급한 김영삼은 김동영을 노려보며 부르르 떨었다. 다음날 아침 김동영은 아주 밝은 얼굴로 민추협 사무실에 나왔다. 김영삼이 아침 일찍 상도동으로 불러 꾸짖은 것을 사과하면서 아침식사를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비서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비서가 먼저 사과하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김대중 진영과는 다른 면모인 것이다. 김대중의 한 비서는 부러운 듯 말했다. “디제이 앞에 가면 디제이가 발산해내는 기가 느껴진다. 마치 사장님 앞에 가는 것처럼, 감히 범접하지 못할 사람처럼 어렵다. 그러나 와이에스 참모들은 와이에스 앞에서 참 편하다고 한다. 와이에스는 일대일 대면에 아주 유능하다.” 당시 민추협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공동의장이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번갈아가면서 회의를 주재하는데 디제이는 회의 서두에 30분간 국내외 정세를 분석하고 토론을 이끌어나가는 반면에 와이에스는 그냥 몇 마디 던지고 말았다고 한다. 치밀함과 대범함의 성격 차이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도 달리 나타났다. 1987년 전두환 정권에 맞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을 벌일 때의 일이다. 디제이가 와이에스에게 “100만인 서명운동을 합시다”고 제안하자 와이에스는 “100만명이 뭐꼬. 1000만명 정도는 해야지”라고 했다. 디제이가 “대한민국 인구가 몇 명인데, 1000만명을 어떻게 채우느냐”고 했다. 그러자 와이에스는 “그걸 누가 세어 본다꼬”라고 밀어붙였고 결국 서명 목표가 1000만명으로 결정된 일화는 유명하다. 87년 6월 항쟁의 승리는 이 두 사람에게 크게 빚졌다. 유신체제와 전두환 정권에 맞서 줄곧 민주주의를 외쳤던 두 사람은, 1985년엔 신민당을 함께 창당해 공동의장을 맡기도 했다. 가공할 국가폭력을 맨 몸뚱어리로 견뎌온 만큼, 서로에 대한 걱정이 앞섰던 두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 건 87년 대선 때였다. 6·29선언을 통해 목표로 했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은 끝내 단일화에 실패했다. 통일민주당(민주당)과 평화민주당(평민당) 후보로 독자 출마해 둘 다 패배했다. 승리는 전체의 37%인 828만여표를 얻은 12·12와 5·17 쿠데타의 주역 노태우에게 돌아갔다. 김영삼(633만)과 김대중(611만)의 득표를 합치면 55%. 대선 패배의 책임은 두 사람 모두에게 부담을 안겼다. 그나마 득표율에서 김대중을 이겼다는 데에 만족한 김영삼은 이듬해 4월 치러진 총선에서 제1야당을 노렸다. 그러나 민의는 와이에스를 비롯한 모두의 예상과는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여당인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되고, 김영삼 총재의 민주당,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이 그다음 득표를 한 것이다. 군정종식과 정권교체의 열망이 여소야대 정국을 탄생하게 했지만 제2야당이 된 와이에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여소야대의 힘은 전두환 일가와 5공 비리의 주역들을 청문회 증언대에 세우는 등 개혁의 바람을 몰고 왔다. 정국을 운영하는 데 상당한 정치적인 부담을 느낀 노태우 정권은 인위적 정개개편의 ‘꼼수’를 짜내기에 이른다. 1989년 12월 청와대에서 열린 영수회담에서 노태우는 디제이에게 합당을 제안한 것이다. 디제이는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가 불편하다고 마음대로 바꾸려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키는 일이고 정치윤리를 망치는 일”이라며 거절했다.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발길을 돌렸다. 와이에스는 장고에 들어갔다. <김영삼 회고록>(백산서당)은 그때를 이렇고 적고 있다. “그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민정당과 통합할 것을 결심했지만, 새벽에 눈을 뜨면 다시 마음이 바뀌기를 거듭했다.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살아온 내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쿠데타를 한 세력과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 쿠데타 정권의 재등장을 막고 이 땅에 영원한 문민정부를 세우기 위해, 제3의 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도 나는 정의의 길을 갈 것이다.’” 노 대통령 영결식에서 만남 정의의 길을 간다고 했지만, 늘 그렇듯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었다. 1990년 1월22일 월요일 오전 10시.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3당 합당을 통한 신당 창당을 전격 발표했다. 민주주의자를 자처했던 와이에스의 ‘돌연한 변신’은 결과적으로 영남 지역패권주의 강화와 호남 고립 심화, ‘보수의 기형적 우위’를 낳으며 한국 민주주의를 되레 늪에 빠져들게 했다. 2년 뒤 치러진 대선에서 당내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와이에스가 민자당 후보로 제1야당의 디제이와 마지막 승부를 벌였다. 41.4%의 득표율을 획득한 와이에스가 33.4%의 표를 얻은 디제이를 가볍게 이겼다. 와이에스가 대통령의 꿈을 이룬 그다음날 디제이는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두 사람의 영원한 경쟁도 여기서 끝이 나는 듯했다. 3년 뒤인 1995년 디제이는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라이벌의 귀환이었다. 그러나 시련은 곧바로 찾아왔다. 국민회의는 1996년 총선에서 79석밖에 못 얻었다.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디제이를 와이에스는 청와대로 불러 영수회담으로 예우했다. 대선 전야에 찾아온 일시적인 평화였다. 대권의 꿈을 이룰 마지막 기회인 97년 대선에서 디제이는 맹목적인 민영화 추진과 금융정책 실패 등으로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사태를 불러온 와이에스의 실정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아이엠에프 사태는 와이에스의 공이 과를 덮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로 남았다. 그 미증유의 사태를 겪으며 한국 사회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존재하는 ‘경제동물의 시대’가 되었다. 디제이피(DJP) 연합에 따른 충청표 흡수와 ‘준비된 경제대통령’의 면모에 힘입어 디제이는 결국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집권 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의 사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최악으로 치달은 둘의 관계는 와이에스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독재를 한다”며 디제이를 맹비난하면서 골이 깊어졌다. 디제이 퇴임 이후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2009년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둘은 오랜만에 조우했지만 시선이 줄곧 ‘정면’을 향할 정도로 냉랭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해 ‘6·15 남북공동선언 9돌 특별연설’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가 위태로워 걱정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말했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틈만 나면 국민을 선동한다. 김대중씨는 자신의 입을 닫아야 한다”는 성명을 내는 등 파열음만 커져갔다. 권력은 저물고 세월은 갔다. 2009년 8월10일, 병원을 방문한 와이에스는 끝내 디제이를 만나지 못했다. 와이에스가 병문안을 간 지 8일 만인 18일 디제이는 파란만장한 생을 접고 고단한 몸을 대지에 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3개월 만이었다. 두 거목은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디제이를 따라 와이에스도 별이 됐다. DJ “100만명 서명운동 합시다”
YS “그게 뭐꼬? 1000만명 해야지”
치밀함과 대범함, 두 개의 큰 별
단일화 실패와 3당합당으로 결별
지역구도는 지금도 질곡이다 그날 둘은 만나지 못했고
8일 후 DJ는 세상을 떴다
둘이 화해해 반동을 막았다면
2015년의 지금은 달라졌을까
YS도 DJ를 따라 별이 되었다 거산과 후광이 화해했다면 역사는 얄궂고 무서운 것이어서 88년 단일화 실패 이후 만들어진 여소야대 정국이 5공 청문회를 낳았고 5공 청문회를 통해 위기의식을 느낀 노태우 정권이 3당 합당을 분만했다. 이를 통해 대권을 잡은 와이에스가 대법관 출신의 이회창을 정계에 끌어들였고 박근혜 대통령은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을 만나 한나라당에 입당하며 정치를 시작했다. 두 사람이 조금 더 일찍 만나 화해를 했더라면, 함께 반동의 흐름에 한목소리를 냈다면,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는 민주투사 와이에스의 외침을 광장에서 들을 수 있었다면 한국 사회의 오늘은 많이 바뀌었을 것도 같다. 2009년 9월 <월간중앙> 인터뷰에서 와이에스는 ‘디제이에게 가장 섭섭한 점이 뭐냐’는 물음에 다음처럼 말했다. “과거엔 있었지만 이제는 없어. (침묵 뒤) 후보단일화…. 천추의 한이 됐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잊어버리지 못하는 말이 있는데 ‘우째 그리 거짓말을 자꾸 하노’ 그랬더니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약속을 못 지킨 것뿐이지’ 그랬어. 하하하…. 그 말도 정치하는 사람한테는 맞는 말이지.” 김대중과 김영삼은 모두 87년의 후보단일화를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조국 서울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가 22일 페이스북에 쓴 글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역사에는 가정이 의미 없지만, 1987년 대선 전후 ‘거산’(巨山)과 ‘후광’(後廣)이 단일화와 권력배분에 합의하고 공동정부를 추진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후 유사한 가정을 하지 않게 되길 바란다.” 양김을 보내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오승훈 허재현 기자 vino@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