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말 크로아티아에서 슬로베니아로 들어온 난민들이 난민 캠프 앞에서 군경과 대치하고 있다. 난민들에게 나흘 동안 음식이 제공되지 않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퍼진 뒤 난민들이 캠프 안으로 이동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이들에게 평온한 저녁은 언제 허락될까? 전해리 사진작가
[토요판] 특집
유럽 난민 바젤과 루나, 그 뒤
▶ 내전 중인 조국 시리아를 떠나 피난길에 오른 난민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평화가 누군가에겐 절실한 현실입니다. 지난 9월15일과 21일치 <한겨레>에 시리아 난민 바젤과 루나의 탈출 동행기를 썼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전해리씨가 두 사람의 탈출 이후에 대한 글과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인 루나는 터키에 두고 온 자식들과 언제 재회할 수 있을까요? 지구 건너편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비참을 전합니다.
독일 트리어시의 난민센터는 군대 훈련소를 개조한 공간이었다. 지난 10월말 발칸반도로 돌아가는 길에 가본 그곳 체육관엔 이층침대 300~400개가 놓여 있었다.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난민들은 생필품과 일주일에 3만원가량의 보조금을 지급받으면서 정부가 정해주는 그다음 숙소로 옮길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어림잡아 2000여명을 수용하는데 매주 새로이 도착하는 이들과 떠나는 이들로 사실 그 정확한 수를 집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 자원봉사자는 말했다.
시리아 난민인 바젤(40)과 루나(34)는 독일 다름슈타트에 살던 친구 집에서 며칠간 묵으며 몸을 추스른 뒤 지난 9월말께 이곳으로 들어갔다. 첫 며칠간은 센터의 수용 공간이 부족해 복도에서 잠을 청해야 했고 곧 상대적으로 덜 붐비는 근방의 또 다른 난민센터로 보내져 그곳에서 한 달여를 보냈다.
작은 공간에 많은 이층침대를 놓고 가족 단위든 개인이든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이들이 지내는 공간에 사생활 공간이 있을 수 없다. 밤에는 어디선가 들리는 아기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청하기도 쉽지 않다. 자원봉사자들과 적십자 같은 비정부기관에서 나온 직원들 그리고 몇 명의 경찰과 안전요원들이 전부인 이런 캠프에서 난민들의 개별적인 요구사항들은 쉽사리 무시되기 십상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이러한 캠프들이 독일 전역에 수백개가 있다. 각 지역의 상황에 따라 지방정부가 좀 더 작은 규모의 숙소를 잡아주거나 일반 가정집으로 다른 난민들과 공유하게끔 옮기기도 한다. 법원에서 정해준 날짜에 법정으로 가서 난민 허용 여부 판결을 듣기까지 대략 6개월에서 1년까지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 숫자는 크게 의미가 없다. 난민정책이 수시로 바뀌고 지역마다 편차가 커 기간이 얼마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원하던 나라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수용정책 때문에 긴장된 나날을 보내야 한다.
바젤과 루나는 얼마 전 좀 더 작은 규모의 숙소로 옮겨졌다고 했다. 상황이 딱히 희망적이거나 나아진 것은 없지만 근근이 버텨가고 있다고 했다. 바젤과 루나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스탄불에서부터 지켜봤기에 모든 것이 여전히 불확실한 이 순간에도 그 둘이 함께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한다. 지금은 오히려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과 함께이기에 정신적으로는 더 안정적일 수 있다. 실질적인 어려움은 이들의 난민 인정 신청이 받아들여진 다음 독일 전역의 작은 도시나 마을들로 재배치되고 나서 시작될 것이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조용한 마을, 의지할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을 환경에서 그들은 몇 년이 걸릴 적응 과정을 보낼 것이다.
아들과 딸 둔 엄마가 투사가 되기까지
바젤과 루나, 그리고 이라크에서 떠나온 두 명의 난민과 함께 유럽으로 오는 고단한 여정에 동행을 한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우리는 시리아 난민들이 내전 등을 피해 유럽으로 오는 이들이라는 것은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환경에서 출발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에 바젤과 루나의 이야기로 조금 이해를 돕고자 한다. 다만, 그들의 이야기는 복잡하고 무수한 난민 구성원의 한 부분일 뿐이다. 시리아 이외의 나라에서도 나름의 사연으로 그들이 태어나고 자라온 곳을 떠난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바젤과 루나는 대략 3년 전쯤 이집트에서 처음 만났다. 바젤은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2011년 당시에 이미 아랍에미리트에 수년째 살고 있었다. 약사 출신이던 그는 인공뼈 소재를 수출하던 회사에서 일했다. 중동 전역에 퍼진 ‘아랍의 봄’이 시리아 남부 도시 다르아(다라)에까지 바람을 몰고 왔다. 정부에 반대하는 평화시위가 처음 시작될 때, 그는 대부분의 시리아인들이 생각했듯 독재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의 시위가 곧 잠잠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과 같은 내전 상황을 야기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정부는 군과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사상자가 속출했고 사태를 관망하던 다른 도시에서도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번져갔다. 시리아 사태가 전국적인 내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든 순간이었다. 정부군은 자신의 고향이자 시리아 제2도시인 알레포에 배럴폭탄(통폭탄)을 투하했다. 일반 시민들의 희생이 커지자 인권활동가들의 목소리에 맞춰 온라인상에서 정부를 비판하던 바젤은 타국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2012년에 이집트를 거쳐 시리아로 돌아오기로 맘을 먹었다.
그러나 아사드 정권은 이미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에서 정부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체포와 고문의 방식으로 응징했다. 바젤 역시 아랍에미리트에서 올리던 글로 요주의 인물로 주목받고 있었다. 체포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그는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시리아에 돌아오는 대신 이집트에서 정부의 억압과 폭력을 외부로 알리는 활동을 진행한다.
루나는 내전이 시작된 2011년 당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평범한 주부로 살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십대 초중반의 아들과 딸이 있던 그녀는 오랜 독재로 정치에 무감각해진 시리아인들이 자발적으로 시리아의 변화를 위해 운동을 벌이는 것을 목격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변화에 함께하고 싶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대해 블로그를 통해 목소리를 냈다. 활동은 온라인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내전으로 물품이 끊긴 다마스쿠스 안의 지역구 시민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벌이던 단체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곧 위험인물로 간주됐다.
아내가 정부의 표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루나의 남편은 자제를 요구했다. 그녀는 그 싸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아이들의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것이라 주장했다. 둘은 갈등을 벌이다 결국 이혼을 한다. 동료들과 활동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이집트에 왔을 때 그녀는 바젤과 처음으로 만났다. 그들은 동료 이상의 관계로 발전했다.
터키-그리스-발칸반도 루트로 몰리는 이유
시리아 난민과 동행 경로
이집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4년 초, 루나는 정부군에게 체포됐다. 1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다. 육체적인 고문과 학대 이상으로 그녀를 아프게 한 것은 ‘심리적인 고문’이었다. 군 수사관은 그녀에게 ‘아들도 같이 체포되어 멀지 않은 감옥에서 지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직 15살밖에 안 된 아들의 안위를 확인할 길이 없던 그녀는 자신의 행위가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어떠한 고통을 가져왔는지 자책하며 연옥 같은 날들을 보냈다.
루나의 체포 이후 한동안 소식이 끊겨 피가 마르던 바젤은 이집트에서 그녀를 석방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자신이 무력하다는 현실에 고통스러워하며 1년여를 보냈다. 올해 초, 가석방으로 풀려난 루나에게 바젤은 그녀가 다시 체포될 것을 우려해 제3국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다. 그녀는 이때 처음으로 시리아를 떠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당시에는 이미 시리아 주변국인 레바논과 터키에 100만명 이상, 요르단에 60만명, 이집트에 적지 않은 난민들이 피난을 와 있었다. 그 이전에도 바다를 통해 유럽으로 오는 시리아인이 꽤 많았지만 올해는 벌써 80만명이 넘는 난민이 도착한 것으로 유엔은 집계를 하고 있다.
모든 난민들이 유럽에 올 수 있는 자금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훨씬 더 많은 난민들은 시리아 내에서 실향민이 되거나 인접한 터키, 레바논, 요르단과 이집트 등지에서 자기 땅에서 유배된 채 살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자란 고향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바라지만 내전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10월말 슬로베니아에 도착한 난민들이 캠프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자 경찰과 군인들이 난민들을 에워싸고 있다. 전해리 사진작가
바젤과 루나가 처음부터 유럽으로 눈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시리아 안에서의 활동이 힘들다면 최대한 가까이에서 힘을 실어주면서 훗날 귀국이 용이한 인접국을 두고 고민했다.
과거에 시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왔던 레바논은 중동 내에서도 물가가 높은 편인데다 레바논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00만명 이상의 시리아 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배타적인 경향이 심해지고 있었다. 특히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 시아파 무슬림들이 난민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몇 년이 될지도 모르는 난민생활 정착지로는 마땅치 않아 보였다. 요르단은 연줄과 자금이 있지 않은 한 피할 수 없는 열악한 난민캠프 생활을 견뎌야 했다. 더군다나 요르단 정부는 난민들에게 노동허가도 내주지 않는다. 노동허가 없이 마냥 유엔의 보급품에 의존하는 것도 미래가 없어 보였다. 전쟁 이후에 불안한 정국을 이어가고 있는 이라크를 선택하느니 차라리 시리아에 남아 있는 것이 나은 편이었다. 이집트는 물가는 가장 낮은 편이지만 새로 들어선 군정부가 모든 시리아 난민들을 무슬림형제단과 묶어 테러리스트 취급을 하는 정책을 폄에 따라 삶이 날이 갈수록 힘겨워지고 있었다. 결국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아랍 인구가 많은 편인 터키가 그들이 정한 최적의 나라였다.
지난 4월, 바젤과 루나는 이스탄불에서 재회했다. 험난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함께라면 헤쳐나갈 수 있을 듯했다. 바젤은 번역 일을 해서 부가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육체노동 이외에는 별다른 수입원이 없던 다른 난민에 비해 나은 점이었다. 하지만 터키 역시 미래를 계획하기에는 여러모로 국내 정치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더 척박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리아 안의 상황은 이슬람국가(ISIS)의 활동으로 더 위험해지고 있었다.
바젤과 루나는 터키에 올 때는 고려하지 않았던 유럽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터키 해안에서 출발해 그리스 섬들과 발칸반도를 거쳐 가는 경로로 방향을 잡았다. 이 루트는 올해 급작스럽게 많은 난민들이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브로커들의 이해와도 잘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다.
이전에는 독일이나 스웨덴에 도달하기 전까지 거쳐야 하는 솅겐조약(유럽연합 회원국들 간에 체결된 국경개방조약) 비가입 국가들 때문에 매번 국경을 건너는 데 부담이 많아서 리비아와 이집트에서 솅겐에 속하는 이탈리아로 배를 타고 가는 난민이 가장 많았다. 하지만 리비아와 이집트의 난민정책이 비우호적으로 바뀌자 난민들은 터키-그리스-발칸 루트로 눈을 돌렸다.
배에 올라타겠다는 마음과 자금이 있으면 브로커를 찾는 일은 굉장히 쉬웠다. 바젤과 루나도 많은 시리아인들이 입소문으로 알게 된 페이스북의 여러 그룹에서 찾아낸 몇 명의 중개인에게 연락했다. 합류할 그룹을 대략 정하고 초기 접촉을 하면 보통 며칠 또는 몇 주를 대기하고 있다가 중개인이 전화로 떠날 날을 지정해준다. 떠나기 하루 또는 며칠 전 처음으로 만나 돈을 지불한 순간부터는 전화 한 통에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긴장의 대기 상태로 들어간다.
하루에 50억원 챙기는 브로커들
문제는 이렇게 온라인으로 구한 연락책은 돈만 받고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난민들은 제3자에게 돈을 위탁하고 코드를 받은 다음, 나중에 배가 무사히 도착하고 나서 브로커들에게 코드를 알려줘 돈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식으로 거래를 하고 있다.
내가 터키에서 고무배에 올라탔을 당시 브로커에게 지급한 비용은 1인당 1200달러로 인근 해안에서 정부의 감시를 피해 언제든지 출발지를 유동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가장 많이 이용된 고무배는 난민들이 직접 바닷가에 도착해 조립했다. 터키 해안경비대가 항구에서 등록되지 않은 배들을 검색하는 수준으로는 더 이상 출발하는 모든 배들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난리에서 돈을 버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보통 고무배 한 대에 태우는 난민들의 수는 50명 정도고 많을 때는 하루에 4000명이 넘는 난민들이 그리스에 도착했는데 이는 결국 하루에 50억원이 넘는 규모의 자금이 브로커들에게 넘어간다는 얘기가 됐다.
9월11일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로 넘어가는 난민들 무리에 바젤(왼쪽 셋째)과 루나의 모습이 보인다. 전해리 사진작가
마케도니아에서 세르비아로 넘어가는 한 시리아 남성이 아이를 안고 있다. 비를 맞은 아이의 눈이 애처롭다. 9월11일. 전해리 사진작가
발칸반도에서 국경을 통과하는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됐다.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와 같은 나라들이 난민들만이 지나갈 수 있는 지점을 지정해 최대한 빨리 자신들의 영토를 지나가게 방치하는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집트나 리비아 쪽의 위험한 바다 여정을 주저하던 난민들이 이 소문을 듣고 터키로 몰려들었다. 물론 헝가리와 같이 대놓고 펜스를 쳐서 막는 나라도 있고, 발칸의 다른 나라들도 일정한 원칙이 아닌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임시로 국경을 폐쇄하기도 하는 등 많은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난민들은 재빠르게 상황에 대처하며 유럽으로 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세르비아에서 크로아티아로 건너가는 난민 어린이들. 10월말. 전해리 사진작가
바젤과 루나의 최종 목적지는 많은 시리아인들이 원하듯 독일이었다. 유럽에 도착한 이상 왜 굳이 나라를 고르려 하는지 이해 못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난민들이 유럽에 도착해 처음으로 직면하는 문제는 언어다. 그나마 영어를 할 수 있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생소한 문화권에서 돈이나 직업 없이 삶을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게다가 그 나라의 난민정책과 국민 정서가 난민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면 단 며칠을 버티는 것도 버거울 수밖에 없다.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 국경에 막 도착한 시리아 난민 가족. 전해리 사진작가
그리스나 이탈리아는 자국의 경제가 최악인 상황에서 자국민들에게조차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도 힘겨워하고 있었다. 헝가리나 폴란드 같은 나라들은 경제도 그렇지만 정부 자체가 난민들에게 굉장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난민 처지에서는 선뜻 그 나라들로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다.
반면, 독일이나 스웨덴은 공식적으로 정부가 난민들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이미 표명했다. 난민들이 처음 도착해서 정착하는 기간 중에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복지제도도 잘 갖춰져 있는 편이다.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국민 다수가 내전을 피해 도망나온 이들에게 측은한 심정을 가진 한편, 이들을 자국민과 동등하게 대우해주는 성숙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왕이면 이 나라들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은 것은 당연했다.
초겨울에도 멈추지 않는 난민 행렬
이러한 점 외에도 루나에게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유럽의 현 난민정책은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진 경우, 다른 나라에 있는 18살 이하의 미성년 자식들을 초청해 함께 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루나의 큰아들은 현재 17살. 내년 생일 이전에 루나의 난민 신청 절차가 받아들여져야 하는 까닭에 그녀는 최대한 빨리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나라를 찾았다. 그녀가 알아본 바로는 독일 트리어시가 위치한 서부지역이 가장 빠르게 절차를 밟을 수 있는 곳이었다.
루나는 피난길에서 늘 씩씩했다. 많은 이들이 불안해하던 배를 타던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늘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존재였다. 다만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어김없이 눈물을 흘렸다. 여느 어머니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의 자식들은 무사히 시리아를 빠져나와 현재 이스탄불에서 어머니의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10월말,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 막 도착한 시리아 어린이에게 가족들이 보온덮개를 씌워주고 있다. 겨울 바다를 건너온 난민들은 저체온증을 호소한다. 전해리 사진작가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 돌아간 첫날 밤에 파리 테러 소식을 들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발칸반도나 레스보스, 다른 그리스 섬들과 터키에서 배를 타고 넘어오고 있는 난민들이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였다. 테러는 끊임없이 유입해 오는 난민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던 유럽 여러 국가의 극우단체들에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파리의 테러리스트들이 대부분 유럽에서 나고 자란 자생적 극단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은 쉽사리 묻힌 채,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와 같은 폭력을 피해 고향을 떠난 가난한 피해자들이 순식간에 잠재적인 가해자로 둔갑했다.
파리 테러 이후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더 많은 난민들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했다. 독일 정부는 시민들에게 테러리스트들과 난민들을 동일시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상황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난민에게 우호적인 독일에서도 반난민 단체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다 난민 수용에서 많은 부담을 떠안고 있는 독일은 ‘모든 난민들을 환영하겠다’는 기존 정책을 뒤집고 헝가리에서 등록된 난민들을 되돌려보내겠다고 발표하는 등 유동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레스보스 섬에 위치한 미틸리니의 항구에서 아테네로 가는 여객선에 올라타기 위해 기다리는 난민들. 9월9일. 전해리 사진작가
레스보스 섬 모리아 난민캠프에 도착한 난민들이 등록을 위해 줄을 서 있다. 시리아 이외의 국적을 가진 난민들을 위해 세워진 이곳은 12월 현재 하루 평균 2000~3000명의 난민들이 도착하고 있다. 전해리 사진작가
예년 같으면 봄을 기다리면서 배를 타고 넘어오는 난민들의 수가 줄어드는 12월인데도 레스보스 등 그리스의 섬들에는 하루에 수천명씩 난민들이 밀려들고 있다. 브로커들도 난민들의 불안심리를 잘 이용해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영영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배에 올라타기를 부추긴다. 난민들은 터키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느니 마지막일지도 모를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브로커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채 돈을 건넨다. 그 길 위에는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 어머니와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이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럽을 향해 어디선가 걷고 있다. 시리아를 비롯한 분쟁지역에 평화가 오지 않는 한 이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유럽이 이들을 막으려 할 때마다 그들은 또 다른 길을 찾아낼 것이다.
트리어(독일)·레스보스(그리스)/ 글·사진 전해리 다큐멘터리 사진가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성장했고 2009년 워싱턴 코코런 미대를 졸업했다. 아이티, 파키스탄, 시리아 등 제3세계의 다양한 이슈들을 취재해왔다.
▶ 현재도 시리아 난민과 함께하고 있는 전해리 작가의 취재를 ‘뉴스펀딩’을 통해 도울 수 있습니다.
<시리아 난민들의 탈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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