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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3.18 19:50 수정 : 2016.03.19 17:12

삼성가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소송이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고 이맹희 씨제이(CJ)그룹 명예회장의 혼외자인 이아무개씨가 이재현 씨제이그룹 회장을 비롯한 삼남매를 상대로 유산 분배 소송을 냈다. 사진은 지난해 8월20일 이맹희 명예회장의 발인이 열린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특집
CJ집안 혼외자의 재산소송

▶ 재벌과 혼외자, 그리고 유산 다툼까지. 더 이상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최근 고 이맹희 씨제이(CJ)그룹 명예회장의 혼외자 이아무개씨가 이재현 회장 남매를 상대로 유산 청구 소송을 낸 사실이 공개됐습니다. 4년 전 이맹희씨가 이건희 삼성 회장을 상대로 낸 상속 소송과 맞물려 재계의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당시 삼성가 상속 소송을 취재했던 기자가 두 소송의 닮은 점을 비교해봤습니다.

삼성가 ‘비운의 황태자’라 불렸던 고 이맹희(2015년 8월 별세) 씨제이(CJ)그룹 명예회장이 자식들 간 유산 다툼을 하늘에서 지켜볼 처지가 됐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분명 비탄에 빠졌을 것이다. 4년 전 자신이 동생 이건희 삼성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1987년 11월 별세)가 저승에서 눈물을 흘릴 일이라고 주변 사람들은 말했었다.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그는 삼성가의 적자이자 장남이었지만, 지금 그의 유산을 요구하고 있는 아들은 혼외자라는 사실뿐.

최근 이맹희씨의 혼외자 이아무개(52)씨가 이재현(56) 씨제이그룹 회장을 비롯한 삼남매를 상대로 유산 분배 소송을 냈다는 사실이 공개돼 화제가 됐다. 지난해 10월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을 낸 이씨는 인테리어업을 하는 사업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64년 이맹희씨와 영화배우 박아무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씨는 1960년대 황진이를 소재로 한 영화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 유학을 다녀온 이씨는 한국에 정착해 사업을 하던 2004년 이맹희씨를 상대로 “친자임을 확인해 달라”는 소송을 법원에 냈고, 2006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다음달 1일 변론준비기일을 갖는 이씨와 이재현 회장 간의 소송은, 2012년 초 이씨의 아버지 이맹희씨가 이건희 삼성 회장을 상대로 낸 재산 분할(주식인도 등) 소송과 여러모로 닮았다. 두 소송의 내막을 잘 아는 이들은 마치 ‘데자뷔’를 경험하는 느낌이다.

인지대만 140억원 냈던 이맹희씨

우선 소송가액(소가, 청구금액) 책정부터 닮았다. 이아무개씨는 소송을 내면서 소가로 ‘2억100원’을 청구했다. 소가가 2억원을 초과하면 합의부에 배당되는 것을 겨냥한 것이다. 합의부는 판사 3명이 ‘합의’해서 결론을 내리고, 단독부는 판사 1명이 판결한다. 일반적으로 쟁점이 복잡하거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합의부에 배당된다. 재판 절차 등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재판의 무게감은 합의부가 월등하다. 당연히 언론의 관심도 합의부 사건에 더 집중된다. 소가 책정부터 언론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드러난다.

이씨 쪽은 재판을 진행하면서 소가를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씨의 대리인 조원룡 변호사는 “이씨가 받아야 할 유산이 (2억원보다) 많다. 소가를 늘리면 인지대(소송 진행에 필요한 수수료)도 늘어나기 때문에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4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건희-이맹희 상속 소송에서 이맹희씨 쪽도 비슷한 전략을 사용했다. 이맹희씨를 대리했던 법무법인 화우가 2012년 2월 소송을 낼 때 청구한 소가는 7천억원이었다. 화우는 이후 공판 과정에서 ‘삼성생명 차명주식을 추가로 발견했다’며 2조원을 추가하는 등 청구액을 점차 늘려가다 1심 막바지에 소가를 4조원으로 확대했다. 소가를 천문학적으로 늘려 여론의 관심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맹희씨 쪽은 인지대만 무려 90억원을 내야 했다.

재판 전략도 비슷하다. 두 소송 모두 삼성가의 차명재산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조원룡 변호사는 “이건희 회장의 차명재산은 이미 여러 사건에서 확인됐고 사회적 공분을 자아냈다. 최근 이명희 신세계 회장도 임직원 명의로 돼 있던 827억원 규모의 차명주식을 실명 전환한 사실이 드러났다. 씨제이그룹도 차명재산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씨 쪽은 이맹희씨의 부인 손복남(83) 씨제이 고문이 시아버지인 고 이병철 회장한테서 물려받은 안국화재 차명주식 가운데 적어도 절반은 이맹희씨의 몫이라고 주장한다. 손 고문이 이맹희씨와 이혼을 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부부 공동재산이라는 논리다.

손 고문과 이재현 회장에게 상속된 안국화재 차명주식은 1994년 이건희 회장과 삼성그룹이 보유하고 있던 제일제당(씨제이의 전신) 차명주식과 맞교환되면서 이재현 회장이 제일제당 독립경영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조원룡 변호사는 “이재현 회장이 제일제당 차명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과거 여러 형사사건에서 확인됐다. 앞으로 유산 소송을 진행하면서 이재현 회장의 차명주식을 더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차명주식을 재판의 주요 쟁점으로 이슈화하겠다는 의도다. 이에 대해 씨제이 쪽은 “이재현 회장은 더 이상 차명주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반박했다.

이건희-이맹희 상속 소송에서 이맹희씨 쪽도 재판 내내 삼성생명의 차명주식을 물고 늘어졌다. 1심에서 법무법인 화우는 “1987년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 타계 당시 삼성전자 주주 68명이 차명으로 보유하던 주식 131만4천여주를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화우가 새로 찾아냈다고 주장한 차명주식은 과거 삼성 비자금 특검 때 드러난 것과 별개의 것이라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화우는 “이건희 회장이 이병철 선대 회장의 삼성생명 차명주식을 독차지한 것은 도둑질과 다름없다”고 맹공했다. 하지만 1심과 2심 재판부는 화우의 주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씨가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하며 내세운 명분도 아버지 이맹희씨와 같다. 이복형제 간 유산 다툼에 대한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듯 ‘가족 간의 화해’를 내세웠다. 조원룡 변호사는 “이씨가 아버지 이맹희 명예회장의 존재를 알고 2004년 친자 확인 소송을 낸 뒤, 씨제이 쪽에서 이 명예회장과 만나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막았다. 특히 지난해 8월 이 명예회장의 장례식 참석을 막은 것이 소송의 결정적 이유가 됐다”고 전했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하려는 자신을 가족으로 인정하기는커녕, 유산이나 탐내는 막장드라마의 주인공 대하듯 하는 이재현 회장 쪽의 행동에 분노했다는 것이다. 조 변호사는 “이씨는 결코 돈 때문에 소송을 낸 게 아니다. 그는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고 있는 건강한 시민”이라고 강조했다.

이맹희씨 혼외자 이아무개씨가
이재현 CJ 회장 등 삼남매한테 낸
유산분배 소송 공개되며 화제
2012년 이건희 회장 상대로 한
이맹희씨 재산분할소송과 닮은꼴

합의부 배당 겨냥한 듯 소송가액
2억원 초과해 여론 관심 극대화
“차명재산 내놔라” 물고 늘어지기
‘가족간 화해’ 명분 내세우기 등
이맹희씨 재판 전략 모두 따라해

2013년 7월1일 이재현 씨제이그룹 회장이 세금포탈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오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맹희씨 유산 6억원 중 현금 500만원뿐

이씨 쪽은 이재현 회장 쪽의 과도한 반응이 씨제이그룹의 경영권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한다. 조 변호사는 “이씨가 소송을 낸 뒤 이재현 회장을 대리하는 변호사가 찾아왔는데, 제일 처음 물어본 말이 ‘씨제이그룹의 경영권에 관심이 있는가’였다”고 밝혔다. 이재현 회장은 최근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데다 지난해 말 파기환송심에서 실형이 선고돼 다시 대법원 재판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그의 경영권이 불안정한 상태인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 씨제이 쪽은 “변호사의 개인적인 질문일 뿐이다. 이재현 회장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밝혔다.

이맹희씨도 4년 전 동생을 상대로 소송을 내면서 ‘가족 간 화해’를 강조했다. “삼성의 후계자가 된 동생(이건희 회장)이 형제와 조카들한테 제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재판에서 주장했다. 이맹희씨 쪽은 삼성 쪽이 장손인 이재현 회장의 할아버지(이병철) 제사 참석을 방해하는가 하면, 제일제당이 삼성으로부터 독립할 때 이재현 회장을 미행하는 등 지속적으로 괴롭혔다고 밝혔다. 그뿐만 아니라 이병철 선대 회장의 차남 이창희(1991년 사망)씨의 유족들이 생활고에 시달릴 때도 이건희 회장이 제대로 도와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화우의 변호인들은 재판 내내 이건희 회장 쪽을 공격하면서도, “원고(이맹희)가 진짜 바라는 건 가족 간 화해”라는 것을 누차 강조했다. 한때 재판장이 나서서 만류할 정도로 치열했던 법정 공방에 비춰 보면 매우 이례적인 변론이었다. 이맹희씨는 2014년 2월,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패한 뒤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면서 화우를 통해 “소송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 간 관계라 생각했다. 가족 간 화해에 대한 진정성은 어떤 오해도 없길 바란다”는 성명을 내놨다.

‘세기의 소송’이라 불렸던 삼성 형제간 상속 소송은 결과적으로 형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최근 이재현 회장이 신청한 ‘한정상속승인’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져 이맹희씨가 남긴 유산 규모가 드러났는데, 빚이 재산보다 30배나 더 많았다. 재산 6억원, 빚 180억원. 이 빚은 온전히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한 소송의 결과라고 씨제이 쪽은 밝혔다.

실제로 <한겨레>가 단독으로 확인한 이맹희씨 재산 내역을 보면, 180억여원의 빚은 소송 인지대와 소송비용에 대한 채무이다. 이맹희씨는 인지대를 내기 위해 한국증권금융에서 140억여원의 증권담보대출을 받았다. 담보로 제공된 주식은 이재현 회장 소유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맹희씨는 1심에서 90억여원을, 2심에선 50억여원을 인지대로 냈다.

소송 상대방의 변호사 수임료를 포함한 소송비용 40억원도 180억원의 빚에 포함됐다. 민사소송에선 진 쪽이 이긴 쪽의 변호사 수임료를 부담한다. 이맹희씨는 1심에서 2억9천만원, 2심에서 37억1900만원의 소송비용을 내야 한다. 다만, 소송 상대방이 이를 청구하지 않으면 안 내도 된다.

소송비용 청구 권한이 있는 소송 당사자는 이건희 회장과 삼성물산(옛 에버랜드)이다. 이맹희씨가 이들을 상대로 소송을 냈기 때문이다. 이 중 삼성물산은 이맹희씨 쪽에 소송비용을 청구해 최근 법원으로부터 ‘이맹희씨 쪽은 15억원을 지급하라’는 결정을 받아냈다. 이에 대해 삼성 관계자는 “삼성물산은 법인이기 때문에 소송비용을 청구하지 않으면 주주들에 대한 배임 문제가 걸린다”고 설명했다.

이건희 회장은 아직 소송비용을 청구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또 다른 삼성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이 승소한 마당에 고인이 된 이맹희씨한테 변호사 수임료까지 청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맹희씨가 남긴 6억원의 재산 가운데 현금은 예금 500여만원이 전부다. 나머지는 서울 이태원의 5평 남짓한 땅과 경기도 수원의 농지 2천여평 등 부동산이다. 이 때문에 현금이 고작 500여만원에 불과했던 이맹희씨가 인지대만 140억원에 이르는 소송을 낸 이유에 새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4년 전의 그 소송은 과연 이맹희씨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을까.

1987년 11월 이병철 회장의 장례식 때 장남 이맹희씨가 아버지의 영구차를 뒤따르고 있다. 2012년 초 그가 동생 이건희 삼성 회장을 상대로 재산 분할 소송을 내면서 삼성과 씨제이는 전투를 방불케 하는 갈등을 빚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재현 회장은 소송할 의사가 없었다?

당시 소송이 제기된 배경에 대한 당사자들의 분석은 엇갈린다. 먼저 이건희 회장 쪽은 이맹희씨의 배후에 손복남 씨제이 고문과 이재현 회장이 있다고 보고 있다. 삼성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배제된 뒤 일본과 중국 등을 떠돌며 재산도 축적하지 못했던 이맹희씨가 140억원이 넘는 인지대가 필요한 소송을 결심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맹희씨가 인지대를 내기 위해 한국증권금융에서 대출을 받을 때 이재현 회장 소유 주식을 담보로 제공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

이재현 회장 쪽은 펄쩍 뛴다. 삼성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것은 씨제이그룹 경영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재현 회장이 소송을 부추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씨제이 쪽은 이재현 회장이 아버지의 소송을 극구 말렸고, 2013년 7월 탈세 혐의 등으로 기소된 뒤에는 자신의 형사재판에 대응하느라 그룹 경영조차 제대로 신경 쓸 수 없었던 상황임을 강조한다.

<한겨레>가 당시 재계와 법조계 인사들을 상대로 취재한 내용을 종합하면, 씨제이 쪽의 주장이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먼저 소송의 발단은 2011년 6월 삼성이 이재현 회장을 비롯한 삼성가 오너들에게 보낸 ‘상속 재산 분할 관련 소명’이라는 제목의 문서였다. 이병철 선대 회장의 상속 재산이 유언에 따라 자손들에게 분배됐으므로 상속인들은 이의가 없다는 의사를 밝혀 달라는 내용이었다. 삼성은 이 문서를 당시 씨제이 재무 담당 임원 앞으로 보내 해당 임원이 서명날인해서 서울지방국세청에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재현 회장 쪽은 이 문서 내용을 보고받고 매우 불쾌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소송의 내막을 잘 아는 한 법조계 인사는 “선대 회장의 재산 분할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사전에 어떤 설명도 없이 담당 임원 앞으로 불쑥 문서를 보내 해결하려고 한 것은 매우 오만한 행동으로 비쳤다. 삼성의 요구는 이재현 회장한테 일종의 상속 포기 각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갑질’을 한 셈이다”라고 말했다. 씨제이의 재무 담당 임원은 삼성이 보낸 문서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삼성은 열흘 뒤 다시 문서를 보냈다. 이번에는 법률검토 의견서였다. ‘삼성의 차명주식은 이건희 회장의 소유로 결정했고, 상속 소송을 낼 수 있는 제척기간(3년)도 이미 지났기 때문에 먼저 보낸 문서에 서명하지 않아도 법률적 문제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 문서는 이재현 회장을 비롯한 상속인들을 더욱 자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씨제이 재무 담당 임원은 이재현 회장의 지시에 따라 삼성의 주장이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확인에 나섰다.

씨제이 법무팀은 몇몇 로펌에 검토를 의뢰했다. 삼성과의 소송에 부담을 느낀 일부 로펌은 비공식적으로 의견을 보내왔다고 한다. 결과는 의외였다. 삼성 쪽 주장이 법률적으로 타당하지 않고 이 문제가 소송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의견이 꽤 있었다고 한다.

특히 삼성이 2009년 2월13일 삼성생명 차명주식(삼성 비자금 특검 수사 결과 드러난 것)을 이건희 회장 명의로 변경했음을 공시한 것을 근거로, 상속 소송을 제기하려면 3년의 제척기간이 지나기 전에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때가 2011년 12월~2012년 1월 무렵이었다. 제척기간이 불과 한두 달 남은 때였다. 하지만 씨제이 법무팀의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이 회장은 어찌된 일인지 별다른 대응을 지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무렵 서초동 법조타운에서는 삼성가 형제 사이에 유산 다툼이 곧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의 근원지는 이병철 선대 회장의 둘째 딸 이숙희씨였다. 이숙희씨는 엘지(LG)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의 3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결혼해 이병철 선대 회장의 재산 분할 대상에서 제외됐었다. 이숙희씨 쪽도 씨제이와 마찬가지로 삼성이 보낸 문건에 대한 법률 검토 작업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숙희씨 쪽은 당시 서울고법 부장 출신의 한 변호사에게 소송 가능 여부를 타진했으나 승소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는 의견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법인 화우가 소송에 뛰어든 것도 비슷한 시기다. 당시 화우는 법조계에서 ‘삼성 킬러’로 알려져 있었다. 삼성을 상대로 한 몇몇 소송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삼성자동차 부채 회수 소송’이다. 서울보증보험 등 14개 금융기관으로 구성된 채권단은 2005년 삼성을 상대로 5조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채권단은 삼성차가 1999년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 삼성생명 주식 350만주를 주당 70만원씩으로 계산해 받았지만, 약속했던 삼성생명 상장이 지연되고 주식마저 팔리지 않자 소송을 낸 것이다. 채권단을 대리한 화우는 2011년에 “채권단에 6천억원과 이자를 지급하라”는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씨제이 법무팀 소속 변호사의 의뢰를 받아 법률 검토를 한 화우는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낼 경우 승소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씨제이 법무팀은 화우의 검토 의견을 이재현 회장에게 보고했다.

이맹희씨가 남긴 유산 규모
재산 6억원에 빚은 180억원
모두 이건희 회장 상대 소송에 든
인지대와 상대방 변호사 비용
이맹희씨는 왜 소송을 했던 것일까

이건희-이맹희 상속소송 관련
법무법인 화우 ‘기획소송설’ 제기
화우가 이재현 회장 쪽 반대에도
이맹희씨한테 소송 설득했다는 것
화우 쪽은 “터무니없다”고 반박

이재현 회장 차명주식 입증 어려워
혼외자 소송 실속 없으리란 전망
소송 통해 형성될 부정적 여론 부담
그룹 경영권에 치명상 안겨줄 수도
‘상처뿐인 소송’ 대 이어 반복될까

원색적인 설전, 미행, 회유설…

화우가 개입한 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삼성과 씨제이 쪽의 주장이 치열하게 맞선다. 씨제이 쪽은 당시 화우의 검토 내용을 보고받은 이재현 회장이 소송 제척기간 만료를 나흘 앞둔 2012년 2월9일 관련 작업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삼성가 가족 간에 분란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삼성 쪽은 당시 씨제이 쪽의 해명이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삼성은 당시 씨제이 쪽에서 삼성가 상속인들의 정확한 상속 지분을 알아보기 위해 제적등본을 뗀 사실이 있는데, 이때 이재현 회장의 인감이 사용됐고, 발급자도 이 회장으로 돼 있음을 근거로 내세웠다. 이 회장이 자신의 인감을 내줬다는 것은 그만큼 소송을 진행할 의사가 강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씨제이 쪽은 “이 회장의 인감은 재무팀에서 항상 보유하고 있던 것이다. 이재현 회장이 발급자로 돼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신청하더라도 위임자 이름을 적도록 돼 있는 규정 때문이다”라고 반박했다.

당시 법조계에서는 화우가 이재현 회장의 ‘소송과 관련된 모든 작업을 그만두라’는 지시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는 말이 돌았다. 씨제이 쪽에 따르면, 화우는 ‘소송 당사자로 가장 적합한 이맹희씨의 의견을 직접 묻겠다’며 당시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이맹희씨를 만났다. 화우는 귀국한 뒤 제척기간 만료 하루를 앞둔 2월12일 이맹희씨를 원고로, 이건희 회장을 피고로 하는 소장을 서울중앙지법에 제출했다.

삼성가 상속 소송의 배경과 관련해서 당시 화우의 ‘기획소송설’도 제기됐다. 화우가 이재현 회장 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맹희씨를 직접 찾아가 소송을 설득했다는 게 그 근거다. 화우가 국내 대형 로펌들이 삼성과의 소송을 꺼리는 상황에서 역으로 ‘블루오션’을 개척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에 대해 화우 쪽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당시 베이징으로 건너가 이맹희씨를 직접 만났던 차동언 변호사는 “고 이맹희 회장의 소송 의지가 강했다. 화우가 기획소송을 했다는 소문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화우의 기획소송설에 대해서는 삼성 쪽도 동의하지 않는다. 삼성 관계자는 “재벌 상속 문제처럼 중차대한 일을 로펌이 당사자 의사에 반하게 진행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의뢰인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소송이 진행된 거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소송이 제기된 뒤 삼성과 씨제이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갈등을 빚었다. 이건희 회장과 이맹희씨 간의 설전이 대표적이다. 이맹희씨는 소송을 제기한 직후 언론 인터뷰를 통해 “건희는 늘 자기 욕심을 챙겨왔다. 한 푼도 안 주겠다는 그런 탐욕이 이 소송을 초래한 것”이라고 이 회장을 비난했다. 그러자 이건희 회장은 “(이맹희씨는) 감히 날 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가 아니오. 날 쳐다보지도 못하고, 바로 내 얼굴을 못 보던 양반이라고. 우리 집에서 완전히 퇴출당한 양반”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재벌가 형제간 다툼은 결코 드문 일은 아니지만, 그처럼 원색적인 비난이 여과없이 언론에 공개된 것은 처음이었다.

화우가 소장을 낸 직후에는 삼성물산 직원들이 이재현 회장을 미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씨제이 쪽은 이 직원들을 추적해 붙잡은 뒤 경찰에 넘겼다. 삼성은 당시 “장충동 일대에 새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답사를 나갔는데, 공교롭게도 이재현 회장의 동선과 겹쳤다”고 해명했으나, 검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벌금 10만원의 약식명령을 청구했다.

소송이 절정에 달했던 2014년 1월에는 삼성의 ‘씨제이 전직 재무팀장 회유설’이 제기됐다. 이재현 회장이 탈세 혐의 등으로 구속되는 데 단초를 제공한 전직 재무팀장을 삼성 쪽에서 거액을 주고 회유하려 했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이재현 회장의 형사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씨제이의 재무 담당 부사장의 진술로 촉발된 논란이었는데, 이 진술은 정작 이 회장의 재판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씨제이 쪽의 진술이 같은 시기에 벌어졌던 삼성가 상속 소송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삼성과 씨제이의 직원들도 소송의 영향을 받았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삼성 직원들은 씨제이에서 운영하는 극장과 커피숍 등의 이용을 자제했다. 씨제이 직원들도 삼성 제품 사용을 가급적 멀리했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중립 선언

소송에서 완승을 거둔 이건희 회장 쪽도 상처가 전혀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이 회장 자신이 소송이 끝난 지 3개월이 지난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아직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송 과정에서 겪었던 마음고생이 그의 건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삼성에 대한 대외 이미지도 크게 악화됐다. 글로벌 기업들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형제간 유산 싸움은 시민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미래전략실을 비롯한 삼성의 핵심 역량은 소송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삼성의 경영 실적도 예전만 못한 상황이다.

이건희-이맹희 형제의 유산 다툼은 다른 형제들한테도 영향을 줬다. 특히 이건희 회장 쪽에 확실히 줄을 서지 않은 형제는 삼성 쪽의 눈총을 받았다. 이병철 선대 회장의 막내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당시 오빠들 사이에서 중립을 선언했다. 큰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과 셋째 딸 이순희씨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1987년에 이미 재산 상속 문제는 끝난 일”이라며 이건희 회장의 손을 확실히 들어준 것과 달랐다. 삼성 관계자는 “당시 상황에서 중립을 선택한 것은 사실상 씨제이 쪽을 편든 것으로 해석됐다”고 말했다. 소송이 제기될 무렵 이명희 회장의 아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삼성전자 주식을 상당수 보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건희 회장 쪽과 불편한 관계에 있다는 말도 나왔다.

법조계에선 이맹희씨의 혼외자가 낸 소송도 실속 없는 소송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재현 회장이 차명주식을 갖고 있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재현 회장 쪽은 “차명주식은 더 이상 없다”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만약 소송에서 진다면 이씨는 아버지의 빚 가운데 자기 앞으로 남겨진 30억원을 갚아야 할 처지에 놓인다. 이재현 회장도 결코 마음 놓을 처지는 아니다. 대법원 재상고심을 앞둔 그로서는 소송을 통해 형성될 부정적 여론이 부담이다. 자칫 그룹 경영권에 치명상을 줄 수도 있다. 아버지의 ‘상처뿐인 소송’은 아들들한테도 반복될 것인가.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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