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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4.15 20:40 수정 : 2016.04.17 10:04

[토요판] 특집
31년만의 대구 야당 당선자 김부겸

누구나 크고 작은 선택의 길목을 서성거려야 할 때가 있다. 김부겸의 정치 인생에서 최대 갈림길은 1997년 대선을 한 달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그해 11월 민주당 총재이던 조순은 이회창과 이인제를 번갈아 만나다가 어느날 이회창의 손을 들어주고는 민주당과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의 합당을 선언했다. 김원기, 이부영, 이철, 박계동, 김원웅, 김정길, 유인태, 원혜영, 노무현, 김부겸 등 민주당 내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구성원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들은 모두 평생을 야당 생활을 했고, 1990년 3당 합당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이들이었다.

하로동선이라는 고깃집을 함께 운영했을 정도로 끈끈한 관계였지만, 이들은 끝내 단일한 결론을 못 내고 각자의 선택에 맡기기로 했다. 김원기, 김정길, 노무현, 박석무, 유인태, 원혜영 등은 정권교체가 더 중요하다며 김대중의 국민회의로 갔다. 노무현은 통추 마지막 회의에서 “우리가 독자적으로 후보를 못 낼 바에는 비판을 하더라도 김대중을 선택하는 것 말고 딴 선택은 못하는 것 아니냐”(김원기 회고. ‘사람사는 세상’ 누리집)고 말했다.

3당 합당 반대했던 통추 멤버들
1997년 대선 앞두고 제 갈 길
세대교체론 펼쳤던 김부겸·이부영
한나라당 떠났으나 ‘주홍글씨’ 남아

반면에 김부겸은 이부영, 이철, 박계동, 제정구, 김원웅 등과 함께 민주당 잔류를 택함으로써 한나라당 창당 멤버가 됐다. 김부겸은 “난마처럼 얽힌 이 나라가 디제이피(DJP)연합 형태의 어설픈 권력 분점, 내각제 개헌으로 수습이 되겠는가 하는 강한 의문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다”(‘나는 민주당이다’, 2011년)고 밝혔다. 실제로 한나라당행을 택한 이들은 3김 청산을 통한 세대교체를 내세운 이회창의 당시 주장에 공감했다. “적어도 나이 사십까지는 대의명분을 따라야 한다”는 제정구의 ‘40대 명분추구론’도 이들 선택의 근거였다. 김부겸은 제정구의 이 말을 듣고 1995년 국민회의행을 포기한 바도 있다.

그러나 이회창은 개혁 이미지에서 탈피해 점차 수구화되어갔고, 김부겸과 이부영 등은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한나라당을 결국 뛰쳐나왔다. 뒤돌아보면, 당시 세대교체론은 정치세력의 역사성과 정체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던 건 아닐까. 김부겸은 긍정적인 부분도 얘기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는 “내 가슴에 박힌 주홍글씨인 셈이다. 한나라당 출신이어서 누군가는 불편하기도 하겠지만 확고한 신념 하나를 배운 건 있다. 정치는 공존이 가능하다,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런 믿음이다”(‘공존의 공화국을 위하여’, 2015년)라고 한나라당 시절을 평가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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