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호 (정운영 칼럼 내용은 기사 하단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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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특집
<한겨레>창간호와 경제민주화
1988년 5월15일. <한겨레> 창간호 18면에는 ‘경제민주화 방향과 과제’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글쓴이는 마르크스주의 연구로 이름을 날리던 경제평론가 정운영. 그로부터 2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과연 우리 사회는 경제민주화의 과제를 말끔히 해결했을까? 누구도 자신있게 ‘그렇다’고 답하지 못한다. “분배가 반대하는 것은 소수를 행한 독점이지 결코 전체를 위한 성장이 아니다.” 28년이 지난 2016년, 경제민주화의 방향과 과제를 고민했던 정운영의 칼럼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경제민주화. 2012년 연말 치러진 제18대 대통령선거를 뜨겁게 달궜던 열쇳말 가운데 하나다. ‘1원1표’가 원칙인 자본주의 경제와 ‘1인1표’에 입각한 민주주의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따위의 온갖 야유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으나, 국민들은 과감한 복지 확충과 더불어 경제민주화를 이루겠다는 약속을 내건 박근혜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경제민주화는 중소기업과 자영업 골목상권 보호 정도의 문제로 축소됐고, 정부의 2016년 경제정책방향에서는 아예 빠져버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우리 사회에서 경제민주화 과제는 이미 완성된 것인가?
여기 흥미로운 자료가 하나 있다. 지금부터 28년 전인 1988년 5월15일, 역사적인 <한겨레> 창간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대정신을 더덜없이 담아내겠다는 굳은 다짐이 지면 구석구석에 스며 있다. 정치·경제·사회·언론 등 각 분야의 현황과 과제를 진단하는 내용이 창간호 36개 면을 빼곡히 채웠다.
1988년 창간호 실린 정운영 칼럼경제민주화 스펙트럼 폭넓던 시절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도 주장
독점자본과 권력 결탁 깨자는 개념
“근원적 질문 제기해야” 촉구 노골적 탄압과 고된 노동 희생 위에
경제발전으로 자유·정의 확대됐으나
최저임금 지키지 않을 ‘자유’와
무분별한 해고의 ‘정의’ 새롭게 등장
경제민주화는 우리 시대 핵심 과제 이 가운데 18면은 경제 분야를 다뤘는데, ‘국민이 주인되는 경제로 전환하자’라는 큼직한 문패와 함께 눈길을 잡아끄는 이름이 하나 보인다. 정운영.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1987년 초 학내 사태로 사직한 뒤 <한겨레> 창간 때부터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창간호에 실린 정운영 칼럼의 제목은 ‘경제 민주화 방향과 과제’. 독자들의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자극하며 꽤나 두터운 ‘팬덤’을 형성했던 정운영 칼럼의 첫번째 주제가 경제민주화였다는 점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 크다. 그렇다면 당시 정운영이 머릿속에 그리던 경제민주화의 모습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28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한동안 사그라들었던 경제민주화의 불씨가 4·13 총선 이후 다시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한겨레> 창간호에 실렸던 정운영 칼럼 ‘경제 민주화 방향과 과제’를 다시 읽으며, 그 해답을 함께 찾아보자. 그의 칼럼에 담긴 핵심 대목 몇 가지를 추려봤다. “근원적인 질문을 우리는 사회 전체에 제기해야 한다.” <한겨레>가 창간호에서 경제민주화를 다뤘다는 점도, 그리고 그 글을 쓴 이가 적어도 당시엔 자타가 공인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정운영이었다는 점도 오늘의 기준에서 보자면 다소 의외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현재 경제민주화를 우리 사회의 주된 의제로 끌어올리는 데 큰 구실을 한 인물이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경제민주화 공약을 총괄했던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에 반해, 정운영은 마르크스의 이윤율 개념을 가지고 박사 학위 논문을 쓴 이론가였다. 1980년대 후반 사회운동 진영에서 향후 한국 사회의 변혁 전망을 확립하기 위한 ‘사회구성체 논쟁’이 한창이었는데, 정운영은 자신의 장기를 살려 해외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 관련 최신 논의를 국내에 소개하는 데 열정을 바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이력에 비춰 보면, 전두환 정권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참여하고 국회의원도 지냈던 김종인 대표 같은 인물이 옹호하는 경제민주화는 다소 ‘온건한’ 의제로 여겨질 만도 하다.
알바노조, 여성노조, 청년유니온 등이 속한 최저임금연대 회원들이 4월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최저임금 1만원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elprince@ah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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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이후 적극적인 복지 확대를 통한 분배구조 개선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들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 종로구 내자동 길거리에서 한 할머니가 장맛비가 내리는데도 마늘, 콩 등을 팔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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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본 간의 분배뿐 아니라 노동자집단 내부의 격차 확대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내하청업체에서 일하는 인천공항 직원들이 카트 정리와 청소를 하는 모습. 인천공항/김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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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민주주의의 퇴행 불러와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확대
노동소득분배율 악화의 핵심 원인
‘인간다운 삶’ 회복이 ‘민주경제’ 분배가 성장을 해친다는 생각은
“우리가 버려야 할 고정관념”
그릇된 신화 깨뜨리자 주문
금융위기·저성장 현실 부딪히며
소득주도성장론 등 논의 봇물 그런데 정운영이 불평등에 접근하는 방식에는 피케티 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구석이 있다. 후자는 1970년대 말 이후 선진 자본주의권에서 불평등 심화의 주된 원인을 세제의 누진성 약화에서 찾고, 따라서 소득 및 재산세제의 누진성을 높이는 것을 불평등 완화의 핵심 대책으로 제시한다. 불평등 문제를 주로 재분배 영역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정운영은 경제학의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생산-분배라는 경제의 두 영역에서 자본주의의 ‘양대 계급’인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태를 파악한다. 즉 그에게 불평등이란 본질적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다수의 노동자와 ‘인간 이상답게 사는’ 소수의 자본가 간의 분배상의 불평등이고, 그 뿌리는 양자 간의 생산관계에 박혀 있다. 따라서 이 불평등의 해소 내지 완화의 결정적 열쇠는 생산관계를 좀 더 정의롭게 재편하는 데 있다. 물론 이러한 재편은 “한쪽에서의 애걸과 다른 한쪽의 동정”만으로는 달성되지 않는다. 우리 노동자들은 정운영이 칼럼을 쓰던 저 시기에 이를 결정적으로 자각하고 스스로 뭉쳐 노조를 만들고 “강인한 투쟁”에 열을 올렸다. <한겨레>의 창간 역시 그러한 움직임의 명백한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장시간·야간노동을 위해 각성제를 먹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까? 적어도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분배 실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노동소득분배율(국민소득 중 노동소득의 비중)이 1980년대 후반에 다소 상승한 것은 지표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1997년 외환·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1997년 이후 노동소득분배율 하락을 낳은 핵심 원인은 비정규직의 확대다. 비정규직 고용 동향을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 따르면, 현재 비정규직은 총 고용인구의 45%에 이를 정도다. 비정규직의 일반화는 전통적인 노동자 세력 약화의 결과로서, 임금수준을 ‘밑에서’ 잡아당기는 효과를 낸다. 비정규직 증가와 더불어, 전체 노동자 중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비중을 나타내는 최저임금 미만율이 2000년대 들어 꾸준히 증가한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이는 현재 12% 안팎인데, 2014년 기준 정규직의 미만율은 6.4%인 데 반해 비정규직은 23.9%에 이른다는 점은 우리가 두고두고 그 시정을 위해 힘쓰지 않으면 안 될 뼈아픈 현실이다(오상봉, ‘최저임금이 가계 및 기업에 미치는 효과’, 한국노동연구원, 2015, 11쪽). 이렇듯 오늘날 불평등은 <한겨레>가 창간되던 1988년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으며, 그 심각성도 결코 전보다 덜하다고 할 수 없는 실정이다. 노동자와 그를 고용한 자본가 간의 분배뿐 아니라 노동자집단 내부의 격차도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치솟는 주거비와 1200조원을 훌쩍 넘은 가계부채가 이 땅의 다수를 ‘인간다움’의 한계선상으로 내몰고 있다. 정운영은 이를 시정하는 것을 “‘민주경제’ 건설의 길”이라고 불렀다. “분배가 반대하는 것은 소수를 향한 독점이지 결코 전체를 위한 성장이 아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분배 양상을 시정하는 일이 경제 성장을 저해하지는 않을까? 정운영은 이러한 믿음을 “우리가 버려야 할 고정관념”이라고 못박는다. 특히 “분배가 반대하는 것은 소수를 향한 독점이지 결코 전체를 위한 성장이 아니다”라는 구절은 성장과 분배에 관한 그릇된 신화 앞에서 무기력한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실제로 2007년 이후 세계 경제를 휩쓴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를 겪고 나서야, 그리고 장기화되고 있는 침체를 겪으면서야 비로소 경제학자들은 소득(임금) 주도 성장론과 같이 분배의 공정성 제고가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론들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경제의 민주화는 밀알을 키우는 노력을 중지하지 않으면서, 그 수확이 모두의 능력과 필요에 따라 분배되도록 규제하는 힘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정부만이 국민이 원하는 소비재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실로 확고한 것이라면, 그 소망을 성취시키려는 작업이 바로 ‘민주경제’ 건설의 길이 된다.” 앞서 말했듯이 정운영이 28년 전 <한겨레> 첫 칼럼에서 염두에 두었던 경제적 정의, 곧 공정한 분배란 기본적으로 경제영역 자체의 논리에 의해 규정되는 본원적 성격의 분배였다. 이는 경제영역에서 대립되는 세력들 간의 힘의 논리에 의해 일차적으로 결정될 것이므로, 만약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다수 노동자의 삶을 개선시키는 방향으로 분배 양상을 교정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힘을 북돋워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12%의 노동자들이 법률에 뻔히 명시된 최저임금도 못 받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그리고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언제나 중요한 과제다. 다만 정운영이 당시엔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했던 게 하나 있다. 바로 국가 또는 정부의 역할이다. 어쩌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던 정운영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국민이 원하는 정부”란 자본주의 질서 바깥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는 형식적인 정치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는 실현되었지만 여전히 권좌엔 ‘그때 그 사람들’이 앉아 있던 당시로서는 “‘민주경제’ 건설”에 있어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하거나 촉구하기는 무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 다시 말해 정치권력을 군사독재세력의 손아귀에서 빼앗아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정치 민주화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문제임을, 우리의 지난 28년의 경험은 잘 일깨워준다. 조세·재정을 통한 소득재분배나 적극적인 복지정책의 실시, 그리고 그 비용의 마련을 위한 증세와 같은 문제들에서부터 최근 위기를 맞고 있는 조선·해운업에 대한 국가 개입의 형태와 범위를 정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현재 우리 사회의 당면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이슈들은 단순히 국가의 몇몇 특정 기능을 결정하는 차원의 사안이 아니다. 그것은 요컨대 국가의 성격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이냐 하는 문제다. 바로 그 성격에 따라 여러 사회세력들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국가가 어떤 원칙을 가지고 조정할 것인가가 결정된다면, 결국 정치권력의 민주적 재편조차도 “‘민주경제’ 건설의 길”의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최근 국가 권력기관에 의한 대국민 사찰이나 테러방지법 제정 움직임 등을 접하며 많은 이들이 지난 30년간 어렵게 이뤄낸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고 있다. 우리 국민이 그간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지켜낸 민주주의가 이렇게 허망한 것이었느냐는 탄식도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퇴행이 줄잡아 1997년 외환·금융위기 이후 경제 민주주의의 꾸준한 뒷걸음질의 결과임을 우리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정치 민주주의의 내실은 경제 민주주의로 채워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신장시키는 정치 행위와 정의를 확보하려는 경제 행위가 전혀 별개의 사항이 아니다.”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위원 gg@hani.co.kr
[한겨레 창간호] 정운영, ‘경제민주화의 방향과 과제’
출처: <한겨레신문> 창간호(1988년 5월 15일) 18면. 영국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은 언젠가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국민이 그들이 원하는 정부를 선택할 수 있고 그들이 원하는 상품을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사실 원하는 정부를 세우고 원하는 상품을 만드는 사회를 ‘이상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최초의 기본적 요구마저 쉽사리 수락되지 않는 현실의 온갖 갈등 때문에 그것을 이상적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습관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여기서 ‘원하는 정부’라는 뜻 안에는 유권자의 의사가 완벽하게 개진되고 전달되는 과정, 그 중에서도 특히 자유의 신장이라는 항목이 가장 중요한 몫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사상, 정치, 문화 등 사회의 상부 구조에 속하는 여러 영역에서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제일차적 지표가 되어야 한다. ‘원하는 상품’의 의미 역시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소비재의 질과 양이 사회 전체의 합의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소비재의 질에 대한 판단은 예컨대 추위를 가릴 서민의 집과 한가함을 달래기 위한 호화로운 별장 가운데 무엇을 먼저 지을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벽돌을 찍느냐 아니면 대리석을 수입하느냐는 토론은 단순히 비용이나 효율성의 측면이 아닌 사회의 양식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와 직결된다. 소비재의 양이 결정되는 방법도 한 개인의 근면이나 한 개인의 자비심에 맡길 일이 아니다. 한편에서는 불과 몇 장의 지폐를 봉급 봉투에 보태기 위해서 소리 지르고, 얻어터지고, 잡혀 다니고 그러다가 어떤 때는 목숨을, 단 하나뿐인 그 목숨을 잃기도 하는데, 어째서 다른 한편에서는 수억원이 선거마당으로 풀려나가고, 수십억원이 나라 밖으로 도망나가고 수백억원의 돈이 성금이란 이름으로 호기롭게 한 사람의 주머니를 채워줄 수 있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을 우리는 사회 전체에 제기해야 한다. 자유의 보완 개념인 평등은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수고와 노력의 댓가인 생산물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서로 나누는 행위를 뜻한다. 여기서 사회의 양식 또는 공정한 분배를 사회의 정의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하다면, 원하는 정부와 원하는 상품에 대한 강조는 한마디로 자유와 정의에 대한 요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요컨대 자유가 숨쉬고 정의가 흐르는 사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찾고 바라고 세워야 할 사회이다. 그 과정을 당분간 ‘경제의 민주화’라고 불러도 좋다. 실제로 자유를 신장시키는 정치 행위와 정의를 확보하려는 경제 행위가 전혀 별개의 사항이 아니다. 우선 사회의 재물이 몇몇 선택된 사람들에게 집중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정치권력이 필요하며, 반대로 권력은 자신이 수행한 경호 업무에 대한 보상으로 독점된 이익의 일부를 떼어주도록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분명한 사실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서 정경유착이니 국가독점 자본주의니 하는 어려운 이론을 끌어댈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회에 축적된 재산을 그 구성원 전체의 이익이 되도록 사용하기 위해서도, 합의된 본래의 궤도로부터의 이탈을 예방하고 바른 진행방향을 꾸준히 일깨우는 정치 세력의 존재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는 앞서 가고 있으나 정치는 뒷걸음을 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현실을 잘못 진단한 실수이거나 사실의 한 면을 고의적으로 가리려는 음모일 수밖에 없다. 되풀이하자면 경제가 성장한 만큼 정치가 발전했다고 말하거나 정치가 낙후된 만큼 경제도 불안하다고 말해야 정확하게 그 뜻이 전달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전자의 주장에 흔쾌하게 찬표를 던질 수 없는 여러 가지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다수가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됨으로써 소수가 인간 이상답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추방된 니카라과의 독재자가 훔쳐 달아난 재산이 그 나라의 성장과 관계가 없었고, 폐위된 이디오피아의 황제가 마차 밖으로 뿌리고 다녔던 동전 역시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듯이, 정녕 경제에서의 성장이 정의라는 내실을 갖출 때에만 그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경제는 바로 이 점에서 실로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는 약속은 1961년 5월 총을 들고 한강을 넘어 온 사람들이 내건 명분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 그들이 하나의 밀알 이야기를 꺼내면서 지금 먹지 말고 더 불려서 나누자는 논리를 폈을 때 아무도 거기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제 그 밀알은 15곱으로 크게 늘어났지만, 각성제를 먹고 제 살을 찔러가며 재봉틀을 돌려야 하는 ‘자유’와 밖으로 닫아건 방 속에서 불이 나면 고스란히 타죽을 수밖에 없는 ‘정의’가 절망과 기아선상을 대신했을 뿐이라면, 그 밀알을 키우는 데 쏟았던 우리의 노동과 애정은 도대체 어떻게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인가? 역사가 가르치는 바가 그렇고 우리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도 그러하듯이, 비록 그 밀알이 1백50배로 켜져도 자발적으로 나누어 주지 않으리라는 점만은 분명할 것 같다. 그러므로 경제의 민주화는 밀알을 키우는 노력을 중지하지 않으면서, 그 수확이 모두의 능력과 필요에 따라 분배되도록 규제하는 힘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고정관념의 하나는 분배가 성장을 방해한다는 그릇된 믿음이다. 분배가 반대하는 것은 소수를 향한 독점이지 결코 전체를 위한 성장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의가 성장의 적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정의는 한쪽에서의 애걸과 다른 한쪽의 동정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강인한 투쟁과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정부만이 국민이 원하는 소비재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실로 확고한 것이라면, 그 소망을 성취시키려는 작업이 바로 ‘민주경제’ 건설의 길이 된다.
출처: <한겨레신문> 창간호(1988년 5월 15일) 18면. 영국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은 언젠가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국민이 그들이 원하는 정부를 선택할 수 있고 그들이 원하는 상품을 소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사실 원하는 정부를 세우고 원하는 상품을 만드는 사회를 ‘이상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최초의 기본적 요구마저 쉽사리 수락되지 않는 현실의 온갖 갈등 때문에 그것을 이상적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습관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여기서 ‘원하는 정부’라는 뜻 안에는 유권자의 의사가 완벽하게 개진되고 전달되는 과정, 그 중에서도 특히 자유의 신장이라는 항목이 가장 중요한 몫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사상, 정치, 문화 등 사회의 상부 구조에 속하는 여러 영역에서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제일차적 지표가 되어야 한다. ‘원하는 상품’의 의미 역시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소비재의 질과 양이 사회 전체의 합의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소비재의 질에 대한 판단은 예컨대 추위를 가릴 서민의 집과 한가함을 달래기 위한 호화로운 별장 가운데 무엇을 먼저 지을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벽돌을 찍느냐 아니면 대리석을 수입하느냐는 토론은 단순히 비용이나 효율성의 측면이 아닌 사회의 양식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와 직결된다. 소비재의 양이 결정되는 방법도 한 개인의 근면이나 한 개인의 자비심에 맡길 일이 아니다. 한편에서는 불과 몇 장의 지폐를 봉급 봉투에 보태기 위해서 소리 지르고, 얻어터지고, 잡혀 다니고 그러다가 어떤 때는 목숨을, 단 하나뿐인 그 목숨을 잃기도 하는데, 어째서 다른 한편에서는 수억원이 선거마당으로 풀려나가고, 수십억원이 나라 밖으로 도망나가고 수백억원의 돈이 성금이란 이름으로 호기롭게 한 사람의 주머니를 채워줄 수 있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을 우리는 사회 전체에 제기해야 한다. 자유의 보완 개념인 평등은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수고와 노력의 댓가인 생산물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서로 나누는 행위를 뜻한다. 여기서 사회의 양식 또는 공정한 분배를 사회의 정의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하다면, 원하는 정부와 원하는 상품에 대한 강조는 한마디로 자유와 정의에 대한 요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요컨대 자유가 숨쉬고 정의가 흐르는 사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찾고 바라고 세워야 할 사회이다. 그 과정을 당분간 ‘경제의 민주화’라고 불러도 좋다. 실제로 자유를 신장시키는 정치 행위와 정의를 확보하려는 경제 행위가 전혀 별개의 사항이 아니다. 우선 사회의 재물이 몇몇 선택된 사람들에게 집중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정치권력이 필요하며, 반대로 권력은 자신이 수행한 경호 업무에 대한 보상으로 독점된 이익의 일부를 떼어주도록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분명한 사실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서 정경유착이니 국가독점 자본주의니 하는 어려운 이론을 끌어댈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회에 축적된 재산을 그 구성원 전체의 이익이 되도록 사용하기 위해서도, 합의된 본래의 궤도로부터의 이탈을 예방하고 바른 진행방향을 꾸준히 일깨우는 정치 세력의 존재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는 앞서 가고 있으나 정치는 뒷걸음을 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현실을 잘못 진단한 실수이거나 사실의 한 면을 고의적으로 가리려는 음모일 수밖에 없다. 되풀이하자면 경제가 성장한 만큼 정치가 발전했다고 말하거나 정치가 낙후된 만큼 경제도 불안하다고 말해야 정확하게 그 뜻이 전달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전자의 주장에 흔쾌하게 찬표를 던질 수 없는 여러 가지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다수가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됨으로써 소수가 인간 이상답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추방된 니카라과의 독재자가 훔쳐 달아난 재산이 그 나라의 성장과 관계가 없었고, 폐위된 이디오피아의 황제가 마차 밖으로 뿌리고 다녔던 동전 역시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듯이, 정녕 경제에서의 성장이 정의라는 내실을 갖출 때에만 그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경제는 바로 이 점에서 실로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는 약속은 1961년 5월 총을 들고 한강을 넘어 온 사람들이 내건 명분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 그들이 하나의 밀알 이야기를 꺼내면서 지금 먹지 말고 더 불려서 나누자는 논리를 폈을 때 아무도 거기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제 그 밀알은 15곱으로 크게 늘어났지만, 각성제를 먹고 제 살을 찔러가며 재봉틀을 돌려야 하는 ‘자유’와 밖으로 닫아건 방 속에서 불이 나면 고스란히 타죽을 수밖에 없는 ‘정의’가 절망과 기아선상을 대신했을 뿐이라면, 그 밀알을 키우는 데 쏟았던 우리의 노동과 애정은 도대체 어떻게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인가? 역사가 가르치는 바가 그렇고 우리의 경험이 보여주는 바도 그러하듯이, 비록 그 밀알이 1백50배로 켜져도 자발적으로 나누어 주지 않으리라는 점만은 분명할 것 같다. 그러므로 경제의 민주화는 밀알을 키우는 노력을 중지하지 않으면서, 그 수확이 모두의 능력과 필요에 따라 분배되도록 규제하는 힘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고정관념의 하나는 분배가 성장을 방해한다는 그릇된 믿음이다. 분배가 반대하는 것은 소수를 향한 독점이지 결코 전체를 위한 성장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의가 성장의 적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정의는 한쪽에서의 애걸과 다른 한쪽의 동정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강인한 투쟁과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정부만이 국민이 원하는 소비재를 줄 수 있다는 믿음이 실로 확고한 것이라면, 그 소망을 성취시키려는 작업이 바로 ‘민주경제’ 건설의 길이 된다.
정운영은 누구?
1944년 충남 온양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뒤, 온양으로 돌아와 온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4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 1972년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벨기에로 유학을 떠나 1981년 루뱅대학교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의 핵심인 이윤율 저하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귀국해 한신대학교 경상학부 교수로 일하다가 학내 민주화투쟁에 연루돼 1987년 초 해직됐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때부터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문화방송> ‘100분 토론’의 사회를 맡기도 했다. 2005년 9월24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노동가치이론 연구>(1993) 등 경제학 이론서와 <광대의 경제학>(1989),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2006) 등 여러 권의 칼럼집을 남겼다.
정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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