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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2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본관 앞에서 학생들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본관 점거농성 중인 학생들은 총장 사퇴와 이화학당 이사회의 사태 해결, 경찰의 소환조사 중단 등을 요구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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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특집 /아직 아프고 두렵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로 평가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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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2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본관 앞에서 학생들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본관 점거농성 중인 학생들은 총장 사퇴와 이화학당 이사회의 사태 해결, 경찰의 소환조사 중단 등을 요구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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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전 여름, 이화여대 학생들의 시위는 특별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서 스스로 모였고 일체의 ‘외부’를 거부했다. 외부의 손길을 거부했고 외부의 시선을 거부했다. 그들은 어쩌면 ‘특별하다’는 의미 부여도 거부할지 모른다. 그들을 알기 위해선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7월28일 이화여대 학생들은 평생교육 단과대 사업인 미래라이프대학(미라대) 설립 계획 철회와 최경희 총장 사퇴를 요구하며 본관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대생들은 외부의 도움을 거부한 대신 내연을 넓혔다. 시위엔 졸업생들이 가세했다. 농성 6일 만에 미라대 신설 계획이 철회됐고 10월19일 최경희 총장이 사퇴했다. 농성은 86일 동안 계속됐다.
미라대 설립 계획 철회와 총장 사퇴는 어쩌면 시작에 불과했다. 학생들이 한창 농성 중이던 9월말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 의혹이 불거졌다. 동시에 2015년 이대에 특기생으로 들어온 최씨의 딸 정유라씨의 입학·학사 과정 특혜 의혹이 잇따랐다. 그 결과와 파장은…. 지금 우리가 보고 듣는 현실이다. 총장과 입학처장, 단과대 학장은 구속기소됐다. 지난 5월 이대는 개교 131년 만에 학생과 졸업생까지 참여한 첫 직선제 총장 선거를 치렀고 학생들이 지지하는 김혜숙 후보가 당선됐다. 그사이에 대통령은 탄핵됐고 정권은 바뀌었다.
새로운 학생운동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마저 나오는 ‘이대의 난’을 이뤄낸 학생들은 내심 뿌듯하지 않을까. 이대 사태 1년이 지난 지금 학생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는 기획은 이 ‘순진한’ 생각에서 시작됐다. 시위엔 수백명의 학생이 참여했는데 그날을 기억하고 말하려는 이를 찾기 어려웠다. 그때서야 아직 많은 이대생들이 당시 입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학생, 직원, 선생님 모두가 그 시기를 겪으면서 각자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의 기억을 여전히 안고 있었다. 때론 그 안에서 대립했고 서로 비난했으며 농성했던 학생들은 그들대로 몸과 마음이 망가졌고, 참가하지 못했던 학생들은 또 그들대로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김혜숙 총장 인터뷰 <조선일보> 2017년 7월8일)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는 건 조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마냥 미룰 순 없었다.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로 고통받고 있다면, 말하지 않는다고 그 고통이 치유되진 않을 거라 믿는다. 대신 섣불리 결론내지 않고 어떤 대표성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을, 힘겹게 시간을 내준 이들에게 약속했다. 거듭 말하지만 이 기사에 등장하는 이대생 4명은 1년 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 외엔 어떠한 공통점도 특성도 대표성도 없다. 이들의 의견 역시 순전히 개인 의견임을 밝힌다. 이들과의 대화는 15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이뤄졌다. 1년 전 이대 시위를 집중 보도했던 <한겨레> 24시팀 박수진 기자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대생들은 모두 가명을 썼다.
농성 3일째 강행한 경찰 진입
사회적 지지 얻는 계기 됐지만
학생들에게 깊은 상처 남겨
“차라리 없었던 일이었으면”
-86일의 시위 기간 중 언제부터 참여했나?
정은정(2015학번) 미라대 설립 반대 시위 시작날(7월28일)부터 본관에 들어가 있었다. 반대 시위에 아주 공감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다만 학내 구성원들이 마음을 모으는 상황에서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남지연(2015학번) 첫날 시위부터 참여했다. 미라대 설립이 바람직한지 어떤지는 사실 잘 판단이 되지 않았다. 당시엔 총학생회도 미라대 설립에 대한 의견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중이었는데, 비민주적인 학사 행정을 비판하는 취지엔 동의해 참가하게 됐다.
최주영(2016학번) 학내 커뮤니티를 통해 공론화되기 시작한 시기가 7월26~27일이었다. 기사를 통해 미라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다음날 열린 비상중앙운영위원회를 참관했다. 경찰이 진입할 땐(7월30일) 가족들과 휴가라 없었다.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다.
김윤형(2012학번) 7월28일부터 본관에 있었다. 9월부터는 간헐적으로 참여했다.
이화여대는 2016년 7월 초 교육부의 ‘평생교육 단과대학 지원사업 추가 대상’에 선정됐다. 미래라이프대학이라는 단과대를 설립해 2017년부터 150명의 학생을 받겠다는 계획이었다. 뉴미디어 산업 전공과 웰니스 산업 전공 학과를 개설할 예정이었다.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 재직자나 30살 이상 성인 여성이 대상이었다. 학교는 “경력단절 여성의 사회 재진입을 돕고 여성 평생학습자의 고등교육 수요 증가로 학교 재정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학교 안에) 평생대학원을 통해 유사 전공 과정 교육이 진행되고 있는데 굳이 단과대까지 만들어야 하느냐”고 반발했다. 학교 이름을 내세워 학위 장사를 한다는 비판이었다. 뷰티나 웰니스 등 여성 성역할을 고착화하는 전공을 개설하는 데 대한 반감도 있었다.
학생들의 반발은 7월28일 이대가 평생교육 단과대학을 설립한다고 전격 발표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학교 쪽은 단과대 신설 규정을 만들기 위한 평의원회를 개최한 28일에야 교수들에게 관련 사실을 전자우편으로 알리기도 했다.
점거농성은 교내 온라인커뮤니티 ‘이화이언’을 통해 재학생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특성화 고등학교 출신과 일반 학생들과의 공정성 문제, 학교 ‘레벨’의 하락, 최경희 총장을 비롯한 학교 쪽의 소통 부재에 대한 걱정과 비난이 쏟아졌고 ‘교내 시위를 하자’는 제안이 이어졌다. 일부 학생들은 토론을 거쳐 대학평의원회가 열리는 본관으로 이동해 학칙 개정 심의 반대시위에 이어 본관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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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1일 농성 닷새째. 2016년 8월1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본관 뒤뜰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농성 장소인 본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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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만 봐도 손이 떨린다”
-점거 농성 이틀 만에 경찰이 진입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해 본다면?
남 진입 하루 전인 금요일(7월29일) 경찰이 와서 혐의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때도 분위기가 좀 무서웠다. 과대표가 자기가 남을 테니 집에 가라고 해서 갔다. 토요일 아르바이트 끝나고 학교 앞을 지나는데 경찰버스가 엄청 많았다. 학교로 들어가니 경찰들이 줄지어 뛰어가고 카메라로 채증하고 그랬다. 학교에 구경 오는 외부인들이 평소처럼 많았는데, 보는 눈들이 그렇게 많은데 경찰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는 게 놀라웠다.
최 가족들이랑 서울을 떠나 있었다. 실시간 검색어에 학교 이름이 뜨더니 경찰 1600명이 들어왔다는 기사를 봤다. 그곳에 있지 못해 너무 미안했다. 난 새내기였고 그 전엔 학내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학우들과 같이 농성을 하면서 벅찬 감정이 있었다. 이화인으로 큰일을 겪고 있다는. 그랬는데… 하필 왜 이때 휴가를 왔나 자책하기도 했다.
김 오전까지 본관에 있었고, 오후엔 학교 밖에 볼일이 있어 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커뮤니티에서, 총장이 온다고 다들 모여달라는 글을 보고 뒤늦게 본관으로 달려갔다.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출입구가 봉쇄된 상태였다. 오후 1시쯤이었는데… 그렇게 많은 경찰을 학교 안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시위를 한 이후 물리적 위협을 느끼기도 처음이었다. 경찰들은 본관 안으로 계속 들어가서 학생들을 끌고 나왔다. 엄청 더운 날씨였고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쓰러져 있었다.
박수진 기자 시위 진압하는 경찰을 기자들은 셀 수 없이 자주 보는데, 당시 한 학생이 땀을 흘리고 있길래 휴지를 건네려고 손을 내미는데 경찰인 줄 알고 소리를 지르면서 놀라 뛰어가더라. 그 장면이 생생하다. 누군가에겐 익숙한 장면이겠지만, 학생들에겐 너무나 공포스러운 시간이었던 거다. 경찰 진압이.
-경찰의 과잉진압은 이대생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공분한 계기가 됐다.
정 언론엔 굉장히 자극적인 소재였다고 생각한다. 사실 미라대 추진엔 (언론들이) 크게 관심 없다가 경찰 투입이라는, 1차원적인 분노를 일으키는 사태가 터지니까 주목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비판하는 쪽으로 논조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김 학생들은 아직도 신상이 털려서 학교로부터 불이익을 받을까봐 두려워한다. 난 트라우마 같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아예 일상생활을 못하는 친구들도 많다. 경찰만 봐도 손이 떨린다는 글들도 여전하다. 결과적으로는 학생들이 승리했지만, 차라리 없었던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전히 한다.
총학·운동권 배제한 시위
‘배타적’ ‘자발적’ 평가 공존
“소수 의견 부정당하기도”
“프레임에 갇힐까봐 예민했었다”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은 지난 5월 ‘포스트-강남역 주체, 페미니스트 정치를 사유하다’라는 워크숍을 열었다. 워크숍 마지막 발표자로 예정된 건 당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이화여대 시위를 소재로 ‘순수한 여성연대로의 시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내용을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워크숍은 더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포스터가 공개되자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학내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내부적으로 합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표 자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시위 당시 트라우마로 휴학을 하거나 정신과 진료를 받는 학생들도 있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항의가 거셌다. 발표하기로 한 학생들이 연구원에 “발표를 못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연구원도 요구를 받아들이고 학생들에게 사과했다.
많은 이대생에게 1년 전 싸움의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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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서명. 2016년 8월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에 ‘미라대 사업 철폐와 최경희 총장 사퇴’ 요구 서명판이 붙어 있다. 김봉규 <한겨레21>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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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들은 왜 그렇게 뒤늦게…”
-농성 6일 만에 미라대 계획이 백지화됐다. 그때 분위기는 어땠나?
정 폐지를 이끌어내고 총장 사퇴를 요구할지 말지를 두고 많은 토론을 했다. 물러나라고 하고 싶으면서도, ‘곧 있으면 개강인데, 시위가 길어지면 어쩌나’ 하는 현실적인 걱정을 했다. 총장 사퇴를 요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유라 부정 입학 의혹이 터지면서 상황이 급변하기도 했고.
최 미라대는 폐지됐지만 농성이 길어지면서 다들 힘들어했다. 연대 거부한 뒤 비난도 받고 관심에서 멀어지기도 하면서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힘들고 처참하고 그랬다.
-성인이 돼 만난 첫 ‘스승’인 교수들, 그들이 구속되거나 죄인이 됐는데.
남 안타까운 기분이 들진 않는다. 미라대 사태 있기 전에도 학생들 불만이 컸다. 워낙에 불통이었다.
정 안산 단원고 졸업생들 특별전형 논의가 있었을 때 그때 이대가 많은 학생을 배정했다. 그때 남궁곤 입학처장 인터뷰를 본 기억이 난다. ‘어른들 잘못이고 그로 인해 학생들이 피해를 입었으니 우리도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감명 깊었고 참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때 정유라 관련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참….
김 ‘강단에서 당당했던 교수들이 어쩌다 저런 상황에까지 가게 됐을까’ 하는. 최경희 총장 사퇴할 땐 ‘불쌍하다’고 했다가 친구랑 싸운 적도 있었다. 청문회 태도 같은 장면에선 분노하기도 했지만 구속돼 수갑 찬 모습을 보면서 인간적인 안타까움이 들었다.
최 교수와 총장이 수갑 차는 걸 보면서, ‘최경희 총장 이전부터 쌓인 부패와 비리가 터진 것일 텐데 우리가 미처 모르는 일들이 더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정 최경희 총장은 교수들까지 들고일어나니까 결국 사퇴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교수들은 왜 그제야 총장 사퇴 요구 집회를 열려고 했는지 의문이다. 조금 앞당겨줬다면 그 상황이 빨리 끝날 수 있었을 텐데…. 사퇴 요구 서명도 안 한 교수가 더 많았다.
남 연대 서명도 늦게 참여하고, 시니컬한 태도를 보인 교수도 많았다. 스승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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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 학생들이 학내 곳곳에 “최 총장은 공식 사과하고 9일 오후 3시까지 총장직에서 사퇴할 것” 등의 문구가 담긴 대자보와 종이를 붙여놓았다. 김봉규 <한겨레21>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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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목소리 부정당하는 느낌도”
-언론의 보도 태도에 대한 불만도 많지 않았나? ‘학벌주의’라는 비판도 있었다.
정 당시 학생들은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뷰티 관련 전공이 웬 말이냐’ ‘교육 격차 해소가 아니라 오히려 격차를 늘리는 정책’이라고 비판했지만, 그것들이 학벌주의를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니) 감추기 위한 논리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 지적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비난이 학생들에게 가는 건 아니라고 본다.
-<한겨레>도 당시 ‘학벌주의’와 함께 외부 세력 배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쓰기도 했다.
남 학생들은 총학에 답답해하고 있었다. 커뮤니티는 익명의 사람들이라 주장하는 강도가 셀 수밖에 없는데, 총학은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이라 커뮤니티에서 요구하는 수준으로 강하게 나갈 수 없었고, 학생들은 그 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최 총학이나 운동권을 배제한 게 언론이 이대 사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남 이대에 입학한 순간부터 이유 없는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됐었다. 시위를 하면서도 모두가 그 점을 걱정했던 것 같다. 시위의 본질이 아닌 다른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될까봐 시빗거리를 시작부터 통제하자는 분위기가 강했다. 어른들이, 언론들이 운동권을 다루는 프레임이 있지 않나. 그런 프레임에 갇힐까봐 예민한 상황이었고 자기검열을 하던 때였다.
김 운동권이랑 연대하면 우리가 주장하는 경찰 투입의 문제나 미라대 졸속 추진 문제에 대한 얘긴 안 들으려 할 테니까. 학생들 목소리가 더 많이 잘 전달되려면 외부 세력과의 연대는 도움이 안 된다고, 내부에서 그런 동의와 합의가 있었다.
최 그 합의가 모든 이들의 의견을 반영했는지는 의문이다.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따라가야 하는 분위기긴 했다.
“이대는 선망과 조롱의 대상”
공통의 경험 통해 결속력 강해져
“여성도 할 수 있다는 분위기
개인 존중하는 문화 되살려야”
-‘자발적’ ‘자생적’ 시위라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 않았나?
정 본관 시위는 지도부가 있긴 했지만, 특정 누군가가 아니라 돌아가면서 맡는 식이었다. 어느 한 명에게 결정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온라인은 커뮤니티, 오프라인에선 만민공동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했다. 다만, 오프라인에선 반대 의견 내는 게 힘든 분위기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배제된 목소리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총학이 주도권을 내준 게 결과적으로는 시위가 성공한 요인이라고 본다.
최 (총학이 배제되고) 일반 학우들이 대표가 되거나 대표가 없다고 하면서 학교나 언론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본다. 직접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됐는지 의문이다. 만민공동회 현장에 있었지만 소수의 목소리는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커뮤니티에선) 운동권 학생의 신상이 털리기도 했는데 안쓰러웠다. 과거 학내 문제에 학생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줬는데 그 이유로 참여를 못 하거나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게 안쓰러웠다.
김 언론이 처음부터 그런 의미 부여를 하진 않았다. <한겨레>도 ‘소비자 운동’이라고 비판하지 않았나. 학교 커뮤니티를 갈무리해서 기사를 쓴 곳도 있었는데, 절반 이상은 비판조였다. 그런 이유로 인터뷰도 개인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온라인 언론팀을 꾸려서 답을 했다.
박수진 기자 학생들을 만나 이야기 듣는 게 어려웠다. 같은 여성 입장에서 이해를 하고 싶은 면도 있었는데 접점이 없었다. 커뮤니티를 통해서야 가능했는데 난 이대 출신이 아니라 또 불가능했다. 커뮤니티 안에서도 ‘불판’이라고 갑자기 생겼다가 또 갑자기 사라지기도 해서. ‘이런 대화와 소통이 어떻게 가능하지’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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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시위.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 입학 및 학점 특혜 논란이 불거진 뒤, 이화여대 교수들이 2016년 8월19일 오후 본관 앞에서 최경희 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모습.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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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생’이라는 의미
-‘특별한’ 시위가 혹시 여성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닌지? “남자들만 모였다면 서로 ‘대장질’ 하려다 끝났을 거”란 우스갯소리도 있더라.
남 굳이 성별이라기보다는 공통적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외부로부터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모였고 그래서 더 결속력이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정 본관에서 먹고 자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여자들만 모였으니 일종의 새로운 공동체 생활이 가능했겠다고 생각한다. 외부의 지지를 받는다는 측면에선, 여자들이라는 것보단 이대라서 더 주목을 받지 않았나 싶다.
-왜 이대가 주목받는 건가?
최 여성 혐오 사회니까. 이대는 여성 엘리트 집단인데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조롱의 대상이기도 하다. 온라인에선 늘 위협을 느낀다.
남 고등학교 땐 사실 이대에 오기 싫었다. 학생들 사이에선, 이대 가면 명품백 들어야 하고 시집가러 가는 대학이라고 했다. 칭찬이랍시고 영부인 많이 나오는 대학이라 하고. 대학 와서 보니 그 말들이 모두 여성 혐오였다.
김 세상은 이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른바 ‘이대 나온 여자’라는 프레임이 과거부터 사회에서 조롱의 대상으로 소비돼왔다고 생각한다. 이대생들은 악성 댓글에 상처를 받는데 학교에선 아무런 대응을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이대생이라고 말하는 걸 꺼린다. 이대생에게 이대는 애정의 대상이자 동시에 벗어나고 싶은 그런 곳 같다.
-이대만이 지닌 장점은 없나? 그런 것으로부터 나오는 애교심이라든지.
정 ‘커트라인’이 높은 학교라서 드는 애교심보단 여성집단이라는 특성에서 오는 애교심은 있다.
김 여성들이 모인 이대만의 문화가 있다. 개인주의라며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을 존중해주는 문화가 있다. 여성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철학이 모든 강의에 담겨 있다. 여성 혐오나 젠더 의식 같은 것도 이곳이 아니었다면 교육하지 못했을 거다.
최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런 비난을 들으면서 이 학교를 다니진 않겠지. 세상에 대한 색안경을 벗게 해준다.
박수진 기자 시위 자체도 발랄했고, 주장하기보다는 설득하고 설명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만난 세계’와 민중가요의 차이랄까. 다른 학교는 학생들이 전반적으로 학교 문제에 관심이 적거나 없다.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았던 기억
반복될까봐 말 아끼는 것일 수도”
“이대 시위가 끼친 긍정적 기여
평가하고 공유할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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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검 소환. 최경희 전 이화여대 총장이 2017년 2월26일 오후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로 소환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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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가 얼마나 절박했는지”
-지난 1년 동안 이대생들은 총장을 바꾸고 정권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 그럼에도 1년 전 기억에 대해 말하기를 꺼린다.
김 자랑스러운 역사일 수 있는데 또 조롱받을까봐 두려워서 말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당시 자료를 폐기하기로 합의한 것도 학교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최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아픈 이들이 많지만 그 과정에서 옳지 못했던 일들, 서로 상처줬던 일들은 반성하고 화해하는 시간이 있어야 된다.
정 당시 이대의 시위 형태가 이후 촛불시위로까지 이어졌다고 하면 비약이겠지만, 당시 우리가 스스로 높이 평가했던 내용들이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를 했다’고 말하기 위해서라도 그날의 기억과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 시위를 통해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많다. 무엇보다 학교 안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문화가 사라졌다. 통제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제된 하나의 목소리를 원했던 건데… 여전히 폐쇄된 분위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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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출발. 김혜숙 이화여대 총장이 2017년 5월31일 오전 이화여대에서 열린 ‘창립 131주년 기념식 및 제16대 총장 취임식’을 마친 뒤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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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 밖 사람들에게 바라는 점은?
최 있는 그대로 봐줬으면 좋겠다. 여대생이니까 여자애들이니까 얘네들 이기적이니까, 이런 편견 없이. 당시 우리가 얼마나 절박했는지, 왜 점거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어떻게 살고 있고 무엇을 추구하고…. 이런 것들을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것 같다.
김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오는 자기 검열이 너무 심했다. 그런 과정에서 서로 상처를 입혔다. 경찰에 의한 상처도 있지만 서로 조율하는 과정에서 초래된 것들도 많고, 여전히 남아 있기도 하다. 예전처럼 서로 존중해주는 문화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바깥 사람들에겐, ‘정유라 대학’ 따위의 비난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편견과 낙인은 다시 상처가 된다. 그 비난이 싫어 또 입을 닫게 될 테고.
진행·정리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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