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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3.25 09:24 수정 : 2018.03.25 10:34

[토요판] 특집
고스트 스토리 ② 죽음의 지리학

한국 근현대 압축된 도시 인천
인천의료원서 무연사한 195명
지역분포로 보는 한국의 삶·죽음
살아 있을 때 보이지 않던 존재
죽고 나서야 지도 위에 드러나

도시의 역사·상흔·개발 방향과
밀접하게 얽힌 그들 최후 흔적
사망자 남구-동구-부평구 순이나
인구 대비로는 동구가 압도적
일제강점기부터 가난 밀집한 땅

인천광역시의료원 무연고 사망자(2001~2017년) 195명 전원의 사망 당시 주소지(또는 사망 장소)를 지도에 표시했다. 동인천 쪽으로 갈수록, 경인선 철도 위쪽일수록 밀도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픽 홍종길 기자 jonggeel@hani.co.kr, 사진 이문영 기자

▶첫 회에서 이름을 감춘 ‘이 도시’는 인천(흑백사진 속 풍경은 1970년대 동구 만석동·화도진도서관 제공)이다. 무연고 사망자 195명(2001~2017년)은 인천광역시의료원을 거쳐 삶을 정리한 사람들이다. 민간 의료기관이 거부하는 가장 가난한 죽음들을 이 공공의료원은 ‘최후의 거처’로서 품어왔다. 그들의 ‘마지막 자리’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지도에 표시했다. 살았을 때 눈에 띄지 않던 그들은 ‘지도 위의 죽음’으로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이 ‘죽음의 지도’는 앞으로 발생할 ‘미래 죽음의 지도’이기도 하다. 한 도시의 이야기면서 한국 전체의 이야기다.

나는 ‘이 도시’ 인천에서 죽었다.

나는 지난 17년 동안 이 도시에서 195차례(2001~2017년 인천광역시의료원 무연고 사망자 전수) 증발했다. 내가 이 도시에서 살다 죽었다는 사실은 재미없는 소문처럼 누구의 입에도 오르지 못했다. 보이지 않게 살다 ‘없는 사람’으로 사라진 나는 닦아내야 할 도시의 얼룩이었다. 도시의 눅눅한 땅에서 말갛게 지워진 나는 다만 걸레질되지 않는 유령으로 눌어붙어 있다.

나(2001년 사망 당시 50살·여)는 여기 있다.

“오래전 여기 살던 분 아세요?”

문 닫힌 내 집 앞에서 수첩과 볼펜을 든 남자(2018년 2월의 현장)가 두리번거렸다. 골목 입구에서 박스를 줍던 할아버지가 되물었다.

“오래전 언제?”

할아버지가 나를 알 리 없었다. 나도 할아버지를 알지 못했다. 17년 전 내가 죽지 않았다면 지금 나도 그만한 나이였을 것이다.

쇠락한 만석부두(동구 만석동)를 끼고 영세한 공장들 틈을 파고든 골목에 내 집은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었다. 너비 2m의 골목은 안쪽으로 갈수록 좁아져 어깨너비만해졌다. 방 한 칸이 집 한 채가 되어 다닥다닥 붙은 골목에서 나는 동네 사람들과 섞이지 못했다. 나는 주민센터에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다. 주민등록번호도 말소된 채였다.

“2001년쯤인데요.”

할아버지가 ‘목적이 뭐냐’는 눈빛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급하다”며 화장실 문을 열고 말했다.

“그러니까 기자가 그걸 왜 물어?”

내 집 바로 앞엔 골목(만석부두로) 주민들의 공동화장실이 있었다. 이 골목의 집들은 안에 화장실을 둘 만한 공간을 갖지 못했다. 갯벌을 매립(1905년 일본인 사업가 이나다)해 만든 땅에 소금처럼 달라붙은 사람들은 소금보다 짜게 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17년 전 그 소금 같은 의지가 내겐 없었다.

배추흰나비 유충과 진딧물은 농사를 괴롭히는 벌레들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밭에 치던 농약을 떠올려 사왔다. 두 병을 마신 뒤 방문턱을 베개 삼아 누웠다. 살아남아 하얀 나비로 날아오르려면 사람의 것이라도 갉아먹어야겠지. 그 생각이 나풀거릴 때 농약 핥은 애벌레처럼 의식이 꺼졌다. 오늘이 어제보다 낫고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 믿었다면 나는 벌레 죽이는 약으로 나를 죽이지 않았을까. 철물점 주인이 자물쇠를 끊고 들어와 나를 발견했다.

“혹시 아실 만한 분인가 해서….”

화장실로 따라 들어간 남자가 할아버지 뒤에서 우물쭈물했다. 나는 삶도 죽음도 ‘알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겐 주검을 인수해줄 가족이 없었다. 배다른 오빠와 동생은 ‘씨가 다르다’며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화장실 동파를 우려한 주민이 벽걸이 히터에 써 붙인 메모가 수첩 든 남자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코드 좀 뽑지 마세요.”

인천광역시의료원 무연고 사망자(2001~2017년) 195명 전국 분포.

도시의 얼룩처럼

이 도시 인천.

조선이 스스로를 챙길 틈 없이 세계로 끌려 나간 근대의 관문.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1876년 강화도조약)해 그들 필요에 따라 설계한 땅. 그때 짜인 구조가 한국전쟁과 산업화와 세계화를 거치며 지금까지 사람들의 살고 죽음에 손을 뻗는 도시. 이 도시가 형성돼온 역사와, 군데군데 파인 상흔과, 개발·확장돼가는 방향과, 내가 죽은 장소는 풀 수 없는 매듭처럼 서로 얽혀 있었다. 이 생의 내 마지막 흔적(주소지나 사망 장소 등)이 왜 이곳에 찍혀 있는지, 이 도시에서 내 흔적들이 어떻게 숨겨져 있는지, 살았을 때 말해지지 않던 나와 내 삶의 자리는 죽어서라도 말해져야 한다.

나(2010년 당시 51살·남)는 여기 있다.

“모르겠는데요.”

나도 ‘인지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2001년 만석부두로 사망 여성)로부터 400여m 떨어진 판자촌에서 죽었다. 수첩 든 남자가 나를 찾아왔을 때 마을에 오래 산 사람들도 내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일본이 병참기지로 조성한 만석동(*1회 기사의 흑백사진은 이 지역의 1970년대 모습·화도진도서관 제공)에선 시대마다 가장 가난한 내가 죽은 혼으로 쌓였다. 붉은 흙 위에 세워진 판자촌(옛 괭이부리마을·일제가 붙인 이름은 ‘아카사키촌’)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낡았다. 마을 오른쪽에선 조선기계제작소(1937년 설립·현 두산인프라코어 자리)가 전쟁을 뒷받침했다. 태평양으로 내보낼 잠수함(광복 때까지 4척이 진수돼 만석부두를 통해 출전) 제작에 투입된 공장 노동자들 숙소로 이 마을은 지어졌다. 한국전쟁 땐 남한으로 내려온 황해도 피란민들(현재 2명 안팎 생존)이 판자촌으로 들어와 이웃이 됐다. ‘잘살아 보세’를 외쳐도 잘살아지지 않던 시절엔 일자리를 찾아 농촌(전라·충청 출신 다수)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시궁창 위까지 집을 짓고 들어왔다. 마을 왼쪽 동양방적(1932년 설립)에서 일하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40년 뒤 동일방직(박정희 집권기 노동탄압의 대표적 사업장)이 된 공장에서 ‘알몸시위’(1976년)를 하고 ‘똥물테러’(1978년)를 당했다. 그 세월을 견디며 이 마을에서 살다 죽어간 이들의 혼 위에 나의 혼이 포개졌다.

나는 그 판잣집들을 허물고 영구임대아파트(괭이부리마을보금자리아파트·2012년 10월 착공)를 짓기 2년 전에 죽었다. 여기는 “어디선가 떠밀려온 사람들의 마을”(김중미 <괭이부리말 아이들>)이었다. 어느 순간(1990년대 중후반)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을”로 바뀌었다. 이젠 “가난한 사람들마저 떠난 자리로 더 가난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떠밀려오는 마을”(이 지역에서 30년간 공부방 활동을 해온 김중미 작가)이 됐다. 나는 그들 중 한 명일 수 있었고, 어느 누구도 아닐 수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나를 몰랐고, 죽은 나는 사라진 내 집 위치를 몰라 동호수를 찾아 헤맸다. 판자촌이 임대아파트(지하 1층 지상 4층 2개동)가 됐다고 내 가난까지 누군가에게 임대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2016년 당시 46살·남)는 여기 있다.

나는 여기(괭이부리아파트로부터 직선거리 570m)서 죽어 웅크리고 있다. 골목이란 말조차 지나친 이 실핏줄 통로에서 수첩 든 남자가 놀라 얼빠진 얼굴을 했다. 길가 건물과 길 뒤 건물 사이의 1m도 안 되는 틈새를 찾아 들어온 것만도 용했다. 그 틈 안에서도 배배 꼬인 통로가 사방으로 가지 치며 오르내렸다. 30여m 길이의 통로 좌우로 14개의 단칸방이 두더지 굴처럼 박혀 있었다.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찰’하고 ‘순시’한다고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보물 캐듯 찾아야 보이는 유령들이 있었다. 머리를 낮춰 배를 깔고 보지 않으면 나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인간은 거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존엄은 동거할 수 없는 방들에 나는 있었다. 틈 밖 밝은 대낮으로 돌아가 기지개를 켜는 남자 뒤에서 내 방에 사는 사람이 알전구를 켜고 깜깜한 대낮을 밝혔다.

195명 중 4명의 내가 여기 만석동에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밀집해 삶을 일군 인천 동구 만석동 옛 괭이부리마을이 2012년 철거되고 있다. 이 자리엔 영구임대와 국민임대가 섞인 보금자리아파트가 들어섰다. 기차길옆작은학교 유동훈 제공

보물 캐듯 찾아야 보이는

나는 여기 있다.

근대 인천의 중심은 개항장이 있던 중구였다. 인천 개항(1883년)으로 각국 조계(치외법권 지대)가 설치되자 조선인들은 경계 밖으로 쫓겨났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자국 유입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최초 조계(지금의 중구 관동·중앙동 일대 3만㎡)를 확장하며 동진(신포동→답동→선화동→도원동 등)했다. 일본인들에게 밀려난 조선인들은 경인선(1899년 개통된 한국 최초 철도·현재 지하철 1호선) 북쪽으로 올라가 판자촌(만석동·화수동·화평동·송현동·송림동 등)을 이루며 나의 선대가 됐다.

나는 여기 ‘가난을 몰아넣은 땅’에 있다.

일제는 인천을 구획하며 일본인 거주 마을엔 정(町)을 붙이고 조선인 마을엔 리(里)를 붙였다. 철도 북쪽에선 전시국가 일본이 군수공장을 몰아넣은 만석동만 정(町)을 받았다. 광복이 되고 시대가 바뀌는 사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지역 격차도 그 틀 위에 내려앉았다. 전쟁 피란민과 농촌 이주민들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땅도 철도 윗마을(동구)이었다.

195명 중 30명의 내가 여기 동구에 밀집해 있다.

머릿수로는 남구(43명) 다음이지만 동구의 인구(2016년 말 기준 7만1915명)는 남구(42만4869명)의 5.9분의 1이었다. 인구 대비(1만명당)로 따지면 남구에서 내가 1.01명 죽을 때 동구에선 4.17명(인천 최다)의 내가 죽었다. 수첩 든 남자는 인천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을 골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남자가 내 죽음의 거처를 찾아왔더니 이 도시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이었다. 나는 살았을 때나 죽은 뒤에나 늘 그 마을들(2010~2012년 동구의 연령표준화 사망률이 인천 전체 1위)에 가장 많았다.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었다.

나(1회 등장인물·2008년 당시 51살·남성)는 여기 있다.

“거주자. 박○○, 이○○, 박○○, 010-****-****.”

인천역 전동차 차고지에서 누운 채 발견된 나는 10년 뒤 내 주소지(동구 송현동)의 문 앞에서 안도했다. 세 사람 이름에 휴대전화번호까지 적은 팻말이 문에 걸려 있었다. 방은 하나지만 세 명이 산다는 것을 그들은 그렇게라도 공표하고 싶었는지 몰랐다. 그들이 혼자가 아니란 사실에 그 방에서 혼자였던 나는 덜 쓸쓸했다.

그 방 앞에서 나는 ‘수도국산’(꼭대기에 일본인 식수와 군수공장 용수 배수지가 설치돼 붙여진 이름) 주위로 떠다니는 다른 나의 혼들을 본다. 20년 전 산을 동그랗게 둘러쌌던 판자촌(1800여채가 촘촘했던 한국 대표 달동네)이 철거돼 3천여가구의 주공아파트가 됐지만 나의 혼들은 그 아파트에 입주하지 못했다.

산과 아파트를 가운데 두고 왼쪽으로 요양병원에서 죽은 나(2014년 당시 72살·여)와, 의과대학 해부용으로 보내진 나(2001년 당시 42살·남)와, 방광암이 온몸에 퍼진 내(2007년 당시 69살·여)가 150여m 간격으로 송현동(6명), 화평동(4명), 화수동(4명)에 뿌려져 바다에 닿았다. 오른쪽으로는 푸른 나이에 여인숙에서 목숨을 끊은 나(2001년 당시 34살·남)와, 담쟁이덩굴에 싸여 폐가로 방치되는 집의 나(2009년 당시 83살·여)와, ‘박철식으로 호칭되던’ 내(1회 등장인물·2014년 당시 50대 추정·남)가 가깝게는 30m에서 멀게는 850m씩 떨어져 송림동(12명)과 금곡동(1명)에 흩어져 있다.

나(박철식으로 호칭되던 자)는 여기 있다.

“박철식이든 박철식 비슷한 사람이든 전혀 기록이 없어요.”

미상자(노숙과 동상으로 손발 지문 상실)로 ‘처리’된 나를 수소문하는 남자에게 인천산업용품유통센터(송림동) 조합은 ‘확인 불가’만을 확인해줄 뿐이었다. 남자가 수첩을 들고 내가 일했던 사무실 문을 두드렸으나 잠겨 있었다. ‘나 여기 있다’고 안에서 말해도 남자는 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내게 일당 일을 주던 사장은 세 평짜리 사무실을 정리한 뒤 떠났다. 사장에게 세를 놓았던 소유주도 방을 팔았다. 단지(52개동 4700여 업체)를 관리하는 조합의 기록은 보존시한을 넘겨 모두 폐기됐다. 내가 누구였고 그곳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이야기해줄 사람이 내겐 남아 있지 않았다. ‘박철식으로 호칭되던 자’가 죽은 지 4년도 못 돼 ‘박철식으로도 기억되지 않는 자’가 됐다.

남자는 나 대신 다른 나의 소식만 수첩에 적을 수 있었다. 지난해 사무실에서 먹고 자던 사장 한 명이 부패 상태로 발견된 뒤 가족에게 인수 거부됐다고 조합은 전했다.

“말이 사장이지 혼자 일하거나 기껏해야 직원 한 명인 영세업자들이에요.”

나의 죽음을 확인하러 온 남자 앞에 다른 나의 죽음이 덩굴 감자처럼 딸려 나왔다.

2012년 철거되고 있는 인천 동구 만석동의 옛 괭이부리마을 판잣집들. 기차길옆작은학교 유동훈 제공

가난을 몰아넣은 땅마다

나(2012년 사망 당시 53살·남)는 여기 있다.

“누구 말이에요?”

여인숙 주인이 수첩 든 남자에게 물었다.

“여기서 장기투숙 중에 돌아가신 분인데요.”

“그러니까, 한 명은 죽어서 실려 갔고, 한 명은 병원에 실려 가서 죽었는데, 누구?”

한 명이 아니란 대답에 남자가 말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한 명은 화장실 변기에 앉은 자세로 죽었고, 한 명은 픽 쓰러지길래 119에 신고해줬는데, 누구?”

남자가 “병원에서 사망했다”며 내 이름을 말했다. 주인이 “이름은 들어봤자 모른다”며 나를 떠올렸다.

“그 사람, 구급차가 왔을 때만 해도 정신이 있었어. 손에 힘이 없으니까 쥐고 있던 동전을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실려 가면서도 주워 달래서 주워 줬어요. 그 와중에 푼돈 그거 얼마나 된다고.”

그 푼돈이 내겐 전부였다. 그 푼돈이 없어 나는 그곳에서 잤다. 육신과 분리되던 나는 무엇이라도 붙들 것이 필요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이 돌멩이였더라도 나는 주워 붙들었을 것이다.

여기 인현동(중구). 동인천역 지하상가(1972년)가 생긴 뒤 한때 지역 최고 번화가였던 땅. 54명의 생명이 호프집에서 불탄 뒤(1999년 ‘인현동 호프집 화재’) 물먹은 불씨처럼 사그라든 동네. 그 뒷골목에서 ‘장기방 있다’는 글귀를 붙인 여인숙들이 세월과 씨름했다. 죽기 직전까지 내가 머물렀던 방은 하루 1만5천원짜리(대실 1만원·2인실 2만원)였다. 월세(20만~25만원)로 내면 6천~8천원꼴로 잘 수 있었다. 한겨울 거리를 버틸 수 없는 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하루 1만원 혹은 7천원에 재워 달라며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에 벌어온 일당으로 밀린 방값을 치른 뒤 며칠치의 ‘외상잠’을 청하기도 했다.

“여기서 한 달쯤 묵었나. 병원으로 찾아갔더니 위독하다며 면회를 안 시켰어요. 며칠 뒤에 다시 가니까 죽었다더라고.”

성탄 전야에 병원으로 옮겨진 나는 새해 전날 아침 병원에서 죽었다. ‘고요하고 거룩한 밤’의 평화도, ‘해피 뉴 이어’의 들뜸도, 나의 마지막 시간과는 무관했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의료진에게 나는 의식이 흐린 채로 말했다.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서울 송파에서 살았다. 미혼이다. 자녀 없다. 5년 전 인천에 일하러 왔다. 노가다 하며 살았다. 이제 간다.

여인숙 주인이 “왜 자꾸 적냐”며 수첩 든 남자에게 당부했다.

“이 골목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들 많겠지. 그래도 여기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 안 해. 영업비밀이에요. 사람 죽은 방에서 누가 자고 싶겠어요. 절대 여관 밝히면 안 돼요.”

나는 죽음도 비밀이 되는 사람.

나는 여기 있다.

인천의 원도심 중구도 시간에 뒤처지며 구도심이 됐다. 권번(일제강점기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용동)이 한때 있었고, 한국 최초의 실내극장(애관극장·경동)이 아직 있고, 숙박업소들이 몰려 북적였던 유흥의 중심지는 이제 불이 꺼졌다. 남자 두 명이 죽어 나간 여인숙의 도로 맞은편 언덕 여관에서 내(2005년 당시 55살·여)가 죽고, 그 여관 위쪽 사방이 꽉꽉 틀어 막힌 방에서 내(2010년 당시 57살·남)가 죽고, 젊은 나이에 경로당에 주소를 올렸으나 경로당에선 아무도 모르는 나(2014년 당시 45살·남)로 죽어, 모두 16명의 내(인구 11만9434명 대비 1.33명으로 동구 다음 두번째)가 중구에서 죽었다. 연안부두(항동) 앞의 나(2003년 당시 55살·남)와, 나(2013년 당시 61살·남)와, 나(2013년 당시 83살·남)는 죽어서도 여전히 여관(하나는 폐쇄)에서 쪽잠을 잔다. 뱃사람들이 이 방에서 대기하며 승선을 기다렸던 부두는 이제 저녁 7시만 돼도 사람을 마주치면 무서울 만큼 으슥해졌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저 바다를 나는 여기서 바라볼 뿐이었다. 깜깜한 바다 저편에서 나(21명)의 ‘어떤 죽음들’(▶4회 ‘주민등록 111111-1111111의 운명’)이 파도에 실려 오르내렸다.

나는 여기 있다.

나(2006년 당시 59살·남)는 인천에서 부평에 이르는 첫 동네(십정동)에 박혀 있다. 경인선과 경인고속도로(1968년 개통된 한국 최초 고속도로)의 상경 길을 따라 인천의 도시들도 서에서 동으로 뻗어나갔다. 바다 쪽에서 중구와 동구가 인천의 첫 도시를 형성할 때 동쪽에선 부평(사망자 17명·인구 56만649명 대비 0.3명)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왔다. 부평은 노동자의 도시였다. 일본군이 전쟁 무기를 생산하던 일본육군조병창(1939년)을 광복 뒤 미군이 접수해 군대(미군수지원사령부)를 주둔시켰다. 미쓰비시 군수공장도 숙소(삼릉 줄사택)를 짓고 몸을 써 삶을 잇는 자들을 불러들였다. 동구 만석동과 서울의 철거민들이 밑에서부터 산을 타고 집을 올렸다. 치유 한센인들이 정착촌을 만들어 농장을 꾸렸다. 염전을 밀고 수출5·6공단(현 부평·주안산업단지)이 입주했다.

내 방은 문이 뜯기고 창틀은 떨어져나갔다. 2층짜리 단독주택의 지하방에 세들어 살던 나는 박살난 집에서 영혼까지 깨졌다. 주민들이 떠나버린 텅 빈 마을(십정2구역재개발)에서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노인과, 그와 쓰레기를 다투는 길고양이와, 빈 골목을 순찰하는 경찰차만 느리게 움직였다. 동네 전체가 이주를 끝냈는데 내 혼은 이사 갈 곳을 찾지 못해 빈집을 지키고 있다.

250m 떨어진 아랫집 나(2010년 당시 85살·남)도 파란 대문 밖으로 나서기가 무섭다. 대문을 넘는 순간 돌아갈 방을 잃을 것 같아 철거 반대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생계도 막막한데 빚까지 지고 죽으란 말이냐?”)만 내다보고 있다.

1970년께 인천 동구의 동인천역과 그 뒤의 수도국산. 수도국산은 1800여채의 판잣집들이 촘촘히 들어차 있던 한국의 대표적 달동네(1997년 철거·현재 아파트)였다. 화도진도서관 제공

<1970년도 시정백서>에 실린 인천시 인구분포도. 인천시의료원 무연고 사망자 분포와 비슷하다. <굿모닝인천> 유동현 편집장 제공

죽음의 자리 찾아간 곳 대부분
쪽방·여관·지하방·옥탑방·뒷골목
시내·도로변과는 떨어진 곳들
송도·청라·영종 경제자유구역엔
단 한 사람의 주소지도 없어

도시는 투명한 담장·철책 되어
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 나눠
죽은 유령 자리 찾아내는 것은
살아 있는 유령들 드러내는 일
“보이지 않는 나를 보이게 하라”

과거 죽음의 지도이자 미래 죽음의 지도

나(2014년 당시 82살·여)는 여기 있다.

나는 아들이 단지 딱하고 걱정됐다. 내(부평6동)가 죽은 뒤 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아들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특별귀휴를 얻어 나왔다. 복귀 날짜를 지키지 않고 동네에서 술을 마시다 잡혀갔다. 끌려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내 죽음이 아들에게 짧은 휴식이라도 선물했길 바랐다. 내 자리에서 2.5㎞ 떨어진 공장(한국지엠 부평공장)에선 아들뻘 되는 사람들이 여든 넘어 죽은 나만큼이나 굵은 주름을 달고 퇴근했다. 군산공장 폐쇄 여파가 부평에서까지 그들의 얼굴을 파고 있었다.

나는 여기 있다.

인천 서쪽(중구·동구)과 동쪽(부평)의 원도심들이 철도와 도로를 따라 퍼지다가 중간지대인 남구 주안(1963년 인천시가지계획에 따라 조성)에서 만났다. 태어난 지 몇 시간 안 돼 죽은 나(1회 기사의 ‘최연소 사망자’·2001년 당시 0살·여)는 주안역 화장실에서 발견됐고, 나(1회 등장인물·2014년 당시 47살·남)는 역에서 300m 떨어진 오피스텔 지하에서 청소작업 중 쓰러졌다. 나(2014년 당시 54·남)는 오피스텔에서 170m 거리의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먹었고, 나(2011년 당시 51살·남)는 무료급식소에서 900m 떨어진 마트 앞에서 의식을 잃었다.

주안에서 모두 15명의 내가 죽었다. 목매달아 죽으려다 추락사한 나(1회 등장인물·2002년 당시 72살·남·용현동)와 열아홉살 딸이 원망을 쏟아내며 시신 인수를 거부한 내(1회 등장인물·2002년 당시 53살·남·숭의동)가 주안이 속한 남구(43명)에서 죽었다.

나는 여기 있다.

동서로 넓어지던 도시가 남북으로 확장되면서 내 죽음의 자리도 아래위로 번졌다. 남동구 만수택지(1980년대 초)와 계양구 계산택지(1980년대 초)를 거쳐 연수구 연수택지가 조성(1980년대 말~1990년대 중반)됐다. 남동구에선 11명(인구 54만3038명 대비 0.27명)의 내가, 계양구에선 3명(인구 33만3344명 대비 0.09명)의 내가, 연수구에서도 3명(인구 33만6256명 대비 0.08명)의 내가 혼이 돼 떠돌았다. “까짓 죽으면 그뿐”이었던 내(1회 등장인물·2011년 당시 60살·남)가 10년 노숙 뒤 찾아간 옛 방은 서구(14명·인구 52만2360명 대비 0.26명) ‘루원시티’ 개발사업으로 쓸려나갔다.

수첩 든 남자의 발걸음은 좀처럼 시내로 진입하지 못했다. 배 없는 부두에서 창 없는 골목으로, 빛 없는 지하방에서 화장실 없는 단칸방으로, 생기 없는 쪽방에서 전망 없는 옥탑방으로, 남자는 동네만 바꿔가며 뱅글뱅글 돌았다. 대로변에 찍힌 주소지는 단 하나도 없었다. 붐비고, 깨끗하고, 밝은 곳에 묻은 내 흔적은 쓰러져 발견된 경우(▶3회 ‘부르혼의 혼’)가 전부였다.

나는 거기 없다.

도시가 질주할 때 내가 쫓아가지 못하고 문턱에서 멈추는 도시들이 있었다. 새로 솟구친 ‘국제도시들’엔 내가 없었다. 송도(연수구)와 청라(서구)와 영종(중구)에는 다른 인천엔 없는 고층빌딩들이 있었고, 다른 인천보다 훨씬 큰 ‘경제 자유’(경제자유구역)가 있었고, 다른 인천 어디에나 있는 나는 없었다. 그 도시들엔 ‘멸균 공간’처럼 내가 한 명도 없었다. 도시의 찬란이 뜨거울수록 나는 수증기처럼 날아갔다. 도시는 나를 보이지 않는 철책으로 둘러쳐 내가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을 나눴다.

2011년 인천대교에서 바라본 송도국제도시(연수구)가 짙은 안개에 덮여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나는 인천의 시간이 지나쳐 간 곳에 있다.

1970년 동구 인구는 17만6894명이었다. 당시 인천 인구(64만6013명)의 27.3%였다. 36년 사이 10만4979명(59.3%)이 줄었다. 이젠 인천 전체의 2.39%(7만1915명)만 동구에 산다. 동인천 쪽에 까맣게 몰려 있던 사람들(*1970년 인천시 인구분포도)이 빠져나가면서 인천의 인구 지도는 완벽하게 바뀌었다. 오늘 내 죽음의 자리를 표시한 지도는 36년 전 인구 지도를 닮았다. 내가 살고 죽어간 자리는 인천이 달려가는 방향과 정반대였다. 도시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는 유령이 돼서도 도시가 뒤돌아보지 않는 곳에 머물러 있다. 내 죽음의 장소가 여기인 까닭은 내 삶의 장소가 여기를 벗어날 수 없어서였다.

살아 있을 때 보이지 않던 나는 죽고 나서야 지도 위에서 드러났다. 나는 이 도시의 가장 주름 깊은 곳에서 죽었다. 앞으로도 그 주름 안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죽어 유령이 된 골목엔 여전히 죽지 않은 유령들이 살고 있다. 죽은 유령들의 자리를 찾아내는 일은 살아 있는 유령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나를 보이게 하는 것이다.

나의 거처, ‘유령이 머무는 곳’을 찾아다닌 남자가 수첩에 썼다.

‘여기’가 예고하는 죽음 앞에서 산 자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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