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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03 13:37 수정 : 2018.11.04 14:04

[토요판] 특집
일본 <도쿄신문> 우에노 미키히코 특파원이 겪은 3년

지난 9월18일 오전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문재인 대통령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영접하는 모습이 생중계되는 장면을 서울 프레스센터에 모인 내외신 기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우에노 미키히코 <도쿄신문> 서울 특파원은 2015년 11월1일 부임해 오는 11일 특파원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우에노 특파원이 한국을 취재한 3년은 ‘한-일 위안부 합의’, 국정농단 사태와 대통령 탄핵, 남북·북미 정상회담 등 굵직한 사건들이 줄을 이었던 시기다. 일본인의 눈으로 바라본 격동의 한국 3년은 어떤 모습일까. 우에노 특파원이 한국을 떠나며 소회를 정리한 글을 길윤형 기자의 번역으로 싣는다. <도쿄신문>은 도쿄 지역의 종합 일간지로 한반도 문제, 재일 조선인 인권 문제, 한-일 과거사 문제 등에 대해 진보적인 논조를 유지하고 있다.

높고 넓어진 하늘 위에 구름이 조용히 오가고, 해가 지면 빨갛게 물든 석양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가을이 다가왔다. 사계절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지만, 한국에서 3년을 보낸 지금,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일본에서 많이 쓰는) ‘식욕의 가을’이 아닌 (한국에서 많이 쓰는) ‘천고마비의 계절’이 되었다. 같은 뜻의 말이지만 표현이 다른 것처럼 일본과 한국은 서로 닮은 문화와 관습을 지녔으면서도, 깊이 알면 알수록 미세하게 다르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 차이점은 때론 서로를 알아가는 재미를 주지만, 어떤 때는 알력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돼왔다.

일본 <도쿄신문>의 서울 특파원으로 살아온 지난 3년 동안 한반도와 일본을 둘러싼 정세는 몇번이나 다이내믹하게 변화했다. 오는 11일 복귀를 앞두고 재임 중에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며, 일본과 한국의 차이에 대해 느낀 점을 적어보려 한다.

오자마자 ‘위안부 합의’

내가 부임한 것은 2015년 11월1일이었다. 아베 신조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이 3년 만의 일-한 정상회담을 열기 전날이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맡기자마자 서울지국으로 출근해 다음날 취재 준비에 돌입했다. (호텔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화난 듯 나를 보던 눈빛이 지금도 생각난다.

이 회담으로부터 2개월 뒤인 12월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관한 일-한 정부 간 합의가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에 의해 발표됐다. 외교부 회의실에서 취재를 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두가지 생각이 오갔다. “(위안부) 문제가 정말로 해결된다면, 일-한 사이엔 획기적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기대와 “한국 사회가 합의를 받아들일까”라는 불안감이었다.

과연, 합의 직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을 방문한 임성남 외교부 제1차관은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로부터 엄혹한 비판을 받았다. 한국 보수 언론은 이 합의에 대해 일정 정도 평가했지만, 여론조사에선 긍정적인 평가가 부정적인 평가에 못 미쳤다. 이 합의는 하나의 실수가 있으면 바로 무너지고 마는 ‘유리 세공품’ 같은 것이었다.

정부 당국자와 전문가들의 노력에도 합의 이후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일본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본다. 한국 정부가 당사자의 이해를 얻고 합의를 이행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대응을 (일본 정부가) 하지 않고 상황을 악화시키려는 듯한 행동마저 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피해자 여성들에게 편지를 보내라는 일본 시민단체 등의 요구에 “털끝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외무성 관계자들도 모두 “한국 정부의 이행을 지켜보겠다”는 분위기였다. 지일파(일본을 깊이 이해하는 외국인) 전문가나 기자들 다수가 “일본 정부가 너무 냉담하다”고 말했다.

합의 파기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의 지지를 받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뒤 합의는 사실상 사문화되는 길을 걷게 된다. 문재인 정부는 “합의 파기나 재교섭은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일본에선 합의가 사실상 정지됐다는 강한 인상을 갖고 있다. 그로 인해 “국가 간에 나눈 약속을 정권이 바뀌면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냐”라는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규칙을 엄격히 지키는 일본’과 ‘목적 달성을 위해 규칙 변경에 관용적인 한국’. 나는 위안부 합의를 둘러싼 일-한의 사고방식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합의=규칙’이라고 바꿔 보면, ‘한국은 규칙을 왜 지키지 않는가’(일본) ‘피해자 구제라는 목적을 위해 규칙을 유연하게 바꾸려 하는데 일본은 왜 응하지 않는가’(한국)라고 양국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다. 이런 특성을 안 뒤에 조금씩 양보할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직접 취재한 내용 중에는 “납득되진 않지만, 나 스스로 매듭을 짓고 싶다. 일-한 정부가 노력해줬다”고 말하며 위로금을 받거나 합의를 받아들여준 위안부 피해자도 있었다는 것, 피해자의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고, 일-한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던 한국 정부 당국자나 전문가가 다수 있었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다.

2016년 1월28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에서 전해 12월28일 발표된 ‘한-일 위안부 합의’가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는지를 확인해달라는 유엔 청원서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H6s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촛불집회를 바라보며

이후 해가 바뀌어 2016년 가을이 됐다. 그해 11월 서울 중심부의 광화문광장에선 촛불집회가 시작됐다. 회를 거듭할수록 참가자가 늘어났고 심야까지 시위 행진이 이어졌다. 이 집회 취재를 위해 주말마다 발을 이끌고 나가 사진을 찍었다. 어둠에 물든 세종대로 빌딩군 안에 수만명의 시민이 들어 올린 촛불이 아름답게 비친 사진이 몇번이고 신문에 게재되고, <도쿄신문> 외신부가 운영하는 공식 트위터의 배경사진으로도 쓰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 일반인 여성에게 정치에 개입하게 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한국인 모두의 관심을 모은 대형 스캔들로 발전했다. 일본에서도 연일 보도가 이어졌다. 얼어버릴 듯한 추위 속에서 몇달이고 시민들이 모인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현상이다. 밤늦게까지 커다란 소리로 방송을 하고, 참가자들이 소리를 높여 행진하는 것을 일본에서는 ‘주변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로 여긴다. 또 가수와 연예인들이 자신의 정치지향을 분명히 밝히고 당당히 집회에 참가하는 모습이 청량하게까지 느껴졌다.

‘유리’ 같던 한-일 위안부 합의
양국 간 사고방식에 차이 있고
일본 정부 쪽 노력도 부족해

자신 주장 당당하게 밝히는
촛불집회 보며 청량감 느껴
일본 반정부 집회와 기세 달라

북 핵실험 때는 대피까지 고민
한국인 긴장하지 않는 모습 의외
김정은은 못 미더워…판단 틀렸길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한다”는 일본과 대조적으로 한국에선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말한다”는 것이 우선시되는 것 같다. 일본인에겐 “(자기)주장만 하고 이쪽 사정은 생각해주지 않는다”고 비치지만, 한국인끼리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주변이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로 논쟁을 벌인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담소하는 상황을 몇번이나 본 적이 있다. 거꾸로 한국인들로부터는 ‘일본 사람들의 본심을 알 수 없어 곤혹스럽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본디 타고난 기질에, 과거 시민의 손으로 민주화를 쟁취해냈다는 자긍심도 더해졌을 것이다. 촛불집회는 지치지 않고 4개월 넘게 이어져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으로 내몰았다. 일본에서도 총리관저 앞에서 정권에 반대하는 집회가 벌어지긴 하지만 한국 시위의 기세나 규모와는 완전히 다르다.

주장의 강함은 대립의 뿌리 깊음으로 이어진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그렇다. 지난해 대선에선 진보 쪽의 문재인 후보가 당선됐다. 취임 뒤 ‘적폐청산’이 시작됐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의 부정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두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기소를 당했다. 보수정권이 개입한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옳지 않다’고 단정하는 풍조, 반대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것 같은 숨 막힘도 다소 느낀다. 부정은 공정하게 재판해야 한다. 그러나 소리 높여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뒤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일본을 돌아보면, 명확한 정치적 주장을 피하는 국민성 탓인지 정권 교체가 거의 없다. 자민당 중심의 정치가 반세기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이 체제에도 문제가 많다. 일본 국민이 한국인처럼 자기주장을 좀 더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북한 핵실험을 취재하며

난 <도쿄신문> 서울 특파원 가운데 북한의 핵실험을 3차례 취재한 첫 기자이자,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을 취재한 첫번째 기자이기도 하다. 겨우 3년의 임기 중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그 과정은 평탄치 않았다. 특히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거듭 발사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군사적 위협으로 대응했던 2017년엔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감이 떠돌고 있었다. 우리 집을 포함한 재한 일본인 가족은 긴급사태가 발생했을 때 피란을 하거나 귀국을 하는 방법, 생필품을 비축하는 방법 등 정보 수집에 여념이 없었다. 일본 특파원들과 만나면, 가족들을 일본에 귀국시켜야 하나 회사의 피란 매뉴얼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등이 화제에 오르는 등 긴장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내가 보는 한 한국인들은 일본인처럼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왜 일본이 이렇게 소란스러워하나. 뭔가 특별한 정보라도 있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래서 현재 상황을 설명해도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한국인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준 이가 의정부시를 취재할 때 만난 한 대학생이었다. 그는 “북한이 예전부터 무력도발을 해왔기 때문에 익숙”하다고 했고, “김정은 정권이 미국을 상대로 정말로 전쟁할 리가 없다”는 낙관적 생각과 함께 “실제 전쟁이 발생하면 멀리 달아날 수도 없다”는 일정 부분 포기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70년 가까이 전쟁 상태를 겪고 있는 국가이기에 지닌 감각이었다. 일본엔 없는 강인함을 엿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2018년에 들어와 전쟁 위기는 일단 사라지고 북한과 한국, 미국 간 대화의 시기가 찾아왔다. 아직 정확하게 예상하기는 힘들지만,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향해 일보 전진한 것은 틀림없다. 최근 개인적으로 고뇌하는 것은 진보 쪽 전문가들을 인터뷰할 때마다 질책을 당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인은 왜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믿지 못하는가. 믿지 않으면 대화가 진행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라고 이따금 타박을 당한다.

어떤 행동을 해야 믿을 수 있는가라는 논쟁은 결국 최종적으로는 김 위원장이라는 인물을 믿을지 여부로 귀착된다. 지금도 나는 회의적인 견해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편, 언젠가 내가 전문가들에게 “제가 틀렸습니다”라고 사과하게 된다면 좋겠다는 기대도 간직하고 있다. 가급적 빨리 사죄할 기회가 찾아오길 신중하게 기다린다.

‘근친증오’(가깝고 친할수록 미워하게 된다는 말)라는 말이 있다. 비슷한 사람들이어서 오히려 서로를 싫어하게 되기 쉽다는 뜻이다. 일-한 간에도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느낀다. 민족적으로도, 먹을거리도, 생활습관도 닮았는데 왜 내 생각을 이해해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양국의 거리가 멀고 겉모습이 달랐다면 이런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을지 모른다.

우리들은 정말 닮았다. 그렇지만 역시 ‘다른 문화’를 지닌 ‘다른 나라’다. 그런 점에 눈을 돌린다면 차이를 좀 더 편하게 즐기게 되지 않을까. 사회 현안에 초점을 맞춰 이런 차이를 설명했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여러 차례 이런 특징들과 만났다. 다시 기회가 있다면, 그런 점도 얘기해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3년간 특파원 생활을 풍요롭게 해준 한국인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우에노 미키히코 <도쿄신문> 서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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