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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3 09:33 수정 : 2019.03.23 09:43

[토요판] 특집. 민중예술가 백기완의 미학

백기완 선생 ‘버선발 이야기’ 펴내
지난해 수술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원고지부터 찾으며 쓰기 시작한 글
일본 고문 이긴 어른한테 들은 소재

평생 젊은이들 영혼 일깨워온 선생
민중의 이야기 글과 무대로 전해
호박 한 포기 심을 땅 없는 버선발
그가 비로소 얻은 문제의식·깨달음

새 책 <버선발 이야기>를 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사진 가운데)이 13일 서울 대학로의 한 찻집에서 기자들과 만나 책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오른쪽)이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왼쪽)과 함께 동석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 병상을 이겨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신작 <버선발 이야기>를 내고 지난 13일 서울 대학로의 한 찻집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버선발 이야기>는 머슴의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 ‘버선발’이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그에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다. 설화적 형식 안에 백 소장의 민중 사상이 담겨 있다. 기자간담회에 동석했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민중예술가 백기완’의 미학을 글로 써 보내왔다.

백기완 선생이 오랜만에 <버선발 이야기>(<한겨레> 3월14일 19면 ‘노나메기 쓰면서 ‘죽지만 영원히 살 수 있겠다’ 깨우쳤지’)라는 구전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면서 글쓴이의 한마디를 하면서 외래어는 물론 한자어도 하나 없는 순우리말로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자그마치 여든 해가 넘도록 내 속에서 홀로 눈물 젖어온 것임을 털어놓고 싶다. 나는 이 ‘버선발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니나(민중)를 알았다. 이어서 니나의 새름(정서)과 갈마(역사)와 든메(사상)와 하제(희망)를 깨우치면서 내 잔뼈가 굵어왔음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난해엔 더 달구름(세월)이 가기 앞서 이 이야기를 글로 엮으려다가 그만 덜컹, 가슴탈(심장병)이 나빠져 아홉 때결(시간)도 더 칼을 댄 끝에 겨우 살아나서 목숨을 걸고 글로 써서 매듭을 지은 것이 이 버선발 이야기라.”

실제로 선생님은 작년에 수술을 마치고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원고지부터 찾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책이 나온 날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독자 입장에서 다시 한번 읽으면서 그만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고 그 감회를 말하셨다. 사자 갈기머리에 지축을 흔드는 목청으로 어떤 폭압에도 거침없이 나아가는 ‘거리의 백발 투사’ 백기완 선생이 왜 이 책을 펴내고 울었는가.

나는 그 눈물의 내력을 안다. 사람들은 백기완 선생을 ‘불굴의 통일 전사’로 먼저 떠올리겠지만, 선생은 한편으로는 여든 평생 뼛속 깊이 사무치도록 간직해온 민중의 이야기로 젊은이들의 영혼을 일깨워주셨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이 대대로 후손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으셨다. 그렇게 펴낸 것이 거의 서른 편이나 된다. 백기완 선생이 일찍이 우리에게 처음 들려준 이야기는 <장산곶매>였다.

지난 2월9일 사망(지난해 12월11일) 60일 만에 열린 고 김용균씨의 장례식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선생의 첫 이야기 ‘장산곶매’

옛날에 황해도 구월산 줄기가 황해바다를 만나 무뜩 멈춘 장산곶 마을의 솔숲에는 낙락장송을 둥지로 삼아 살고 있는 매가 있었다. 그중 장수매를 동네 사람들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생각해왔다. 장산곶매는 1년에 딱 두 번 대륙으로 사냥을 나가는데 사냥 떠나기 전날 밤에는 자기 집에 대한 집착을 버리려고 ‘딱 딱 딱’ 부리질로 자기 둥지를 부수고 날아갔다. 그래서 이 고장 사람들은 장산곶매가 부리질을 시작하면 같이 마음을 졸이다가 드디어 사냥에서 돌아오면 춤을 추며 기뻐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대륙에서 집채보다 더 큰 독수리가 쳐들어와서 온 동네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그놈은 송아지도 잡아가고, 아기도 채어갔다. 사람들이 어쩌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는데 이때 장산곶매가 날아올라 맞대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징을 치고 꽹과리를 울리면서 장산곶매를 응원했다. 그러나 독수리가 큰 날개를 한번 휘두르면 장산곶매는 그 날개바람에 나가떨어져 피투성이가 되곤 했다. 그래도 장산곶매는 굴하지 않고 끝까지 대들며 싸우고 또 싸웠다. 장산곶매가 흩뿌린 피가 날리어 사람들의 흰옷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다 장산곶매는 마침내 그놈의 약점을 알아챘다. 날개를 활짝 다 펼치고 내리 치달리기 위해 잠시 허공에 멈추어선 순간 가슴팍을 파고들어 있는 힘을 다해 날갯죽지를 찍어버렸다. 그러자 날개가 떨어져나간 독수리는 땅으로 내리 곤두박혔다.

길고 긴 싸움이 끝나고 장산곶매는 피투성이가 된 지친 몸을 낙락장송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 바로 그때 피 냄새를 맡은 큰 구렁이가 나타나 장산곶매가 앉아 있는 나무를 감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빨리 날아오르라고 소리를 지르며 꽹과리를 쳐댔다. 그러나 장산곶매는 퍼득이기만 할 뿐 날아오르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장산곶매가 새끼였을 때 사람들이 마을을 지키는 장수매라고 발목에 표시를 해놓은 끈이 나뭇가지에 걸렸던 것이다.

마침내 구렁이가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달려들었을 때 장산곶매는 외다리로 이쪽으로 피하고 저쪽으로 피하면서 맞대하였다. 그러다 구렁이가 머리를 한껏 치켜올리고 내리꽂으려는 순간 온 힘을 다해 한쪽 발톱으로 구렁이 눈을 찍었다. 그러자 그놈이 잠시 휘청거리는 순간 부리로 머리통을 쪼아버렸다. 구렁이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며 땅으로 떨어졌고 장산곶매는 나뭇가지에 걸렸던 끈을 매단 채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꽹과리를 치면서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던 어느 날 장산곶매는 하늘로 훨훨 날아가 멀리 사라졌다. 동네 사람들은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데 다시는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도 칠흑 같은 캄캄한 밤하늘에 대고 ‘딱’ 하고 쪼기만 하면 샛별이 하나 생기고, ‘딱’ 하고 쪼기만 하면 또 샛별이 하나 생겨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의 길라잡이가 되고 지금도 장산곶매는 캄캄한 밤하늘을 가르며 ‘딱딱’ 하고 부리질을 하면서 영원히 날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감동적인 장편 서사는 황석영이 소설 <장길산>의 서막에 그대로 인용하였고, 영화패 동아리 이름으로도, 최병수의 목판화로 형상화되기도 하였다. 백기완 선생은 어려서 이런 이야기를 엄마 품에 안겨 듣고 할머니,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듣고, 마을 누나 곁에서 들으며 그 속에 들어 있는 든메(사상)를 속으로 새겨왔다고 한다.

이 <장산곶매 이야기>는 어머니에게 들은 것이었다고 한다. 작고 어질고 착한 물고기인 이심이가 엄청난 덩치의 큰 물고기에게 당하다가 끝까지 싸워 마침내는 비늘이 철갑이 되어 힘센 바닷물고기가 되는 <이심이 이야기>는 할머니에게 들은 것이고, <쇠뿔이 이야기>는 대장간 음전이 누나에게 들은 것이고, <달거지 이야기>는 강원도 삼척으로 농민운동 갔을 때 영감님한테 들은 것이고, 이 <버선발 이야기>는 일본 놈의 모진 고문과 옥살이를 이겨낸 집안 어르신에게 들은 것이었다고 한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민중의 삶 속에서 간취한 희망

백기완 선생은 민중들의 삶 속에서 엮어낸 이 이야기 속의 사상과 희망을 예리하게 간취하셨다. 탈춤에서 먹중이가 춘정을 못 이겨 추는 춤은 ‘멍석말이 춤’을 각색한 가짜라고 했다. 그것은 본래 멍석에 둘둘 말려 매질을 당한 노비가 죽지 않고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꿈틀꿈틀 대며 일어나는 춤사위가 그렇게 변질된 것이라고 했다. 또 ‘살풀이춤’이라는 것도 몸에 박힌 화살을 하나씩 뽑아내는 몸짓에서 나온 것임을 해방 무렵 들쑥이 누나에게 들었다고 한다.

백기완 선생은 이를 틈틈이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고 한판 이야기 마당으로 우리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백기완 선생의 민중미학 특강’이라는 이름으로 2015년 12월 소극장 학전 무대에 올린, 골난 사람들이 굿하는 떼거리의 이야기인 <꼴굿떼 이야기>는 그것이 곧 우리의 민족미학이고 민중예술의 한마당이었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나로서는 선생은 전승도 이수도 불가능한 인간문화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와 춤만이 아니었다. 대중가요로 일제강점기에 널리 불렸으나 지금은 어디에도 악보가 남아 있지 않은 ‘진달래 무르녹은 언덕 밑에는’이라는 노래를 가슴에 간직하고 있고 <버선발 이야기> 출판간담회 때는 벅찬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북만주 벌판”으로 시작하는 ‘아 싸우는 조국이여’를 즉석에서 부르셨다.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 충무로 낡고 허름한 신영건물 2층에 있던 백범사상연구소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러 젊은이들이 드나들었다. 창작판소리의 임진택, 썽풀이 춤의 이애주, 탈춤계의 교주 채희완, 가수 김민기, 화가 주재환, 김정헌, 홍선웅 그리고 고인이 된 판화가 오윤과 민예총의 김용태. 이들이 80년대 들어와 본격적으로 펼쳤던 민족예술 제1세대이다. 후배들은 이들을 민족예술의 ‘백두혈통’이라고 부러워한다. 그러나 영원한 청춘인 백기완 선생의 곁에는 제2세대, 제3세대가 여전히 그 뒤를 이어 민중의 사상을 배우며 자라고 있다.

백기완 선생이 젊은이들을 품에 안고 그들을 일깨워주는 것은 설교도 아니고 훈계는 더욱 아니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한동안 나는 벗들과 해마다 설날이면 장충동 선생님 댁으로 세배를 드리러 갔다. 그럴 때면 선생님은 이런저런 이야기의 한 대목을 들려주시곤 했다.

“야. 홍준아. 너 말뜸이라는 것 아냐. 말뜸이란 네 식으로 말하자면 문제제기야. 문제의식을 갖추어야 세상을 생각하는 틀거리가 서는 거지. 그 말뜸을 얻으면 흐릿한 눈이 활짝 열리고 생각도 열리고 마음까지도 열리지. 그 깨달음을 ‘다슬’이라고 한다.”

이번에 펴낸 <버선발 이야기>는 머슴의 아들 버선발(맨발)이 사람에게 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말뜸을 얻는 것에서 시작한다. “호박 한 포기 심어먹을 땅 한줌이 없는” 버선발이 말뜸을 얻어 비로소 깨친 다슬(깨달음)은 다름 아닌 노나메기였다. 노나메기는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벗나래(세상)를 말한다.

백기완 선생의 이 이야기 속에는 은유와 상징으로 민중의 삶, 민중의 생각, 민중의 꿈이 이렇게 그대로 담겨 있다. 그런데 백 선생님이 <버선발 이야기>에서 유독 목숨을 거는 마음으로 여기에 온 힘을 다하고 책이 나오자 기어이 눈물까지 흘린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는 <장산곶매>는 새 이야기이고 <이심이>는 물고기 이야기이지만, <버선발 이야기>는 다름 아닌 사람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새와 물고기 이야기에서는 피투성이로 싸운다는 것이 은유로 들려왔지만 버선발이 아픔을 당할 때면 내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이 그대로 전해진다. 두 번째는 이 이야기는 바로 어머니 품에서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엄마 생각’에 절로 눈물이 났던 것이다.

지난 13일 <버선발 이야기> 출판간담회에 일부러 찾아뵈니 선생님은 예쁘게 꾸며진 책을 가슴에 품고서 ‘나는 이제 늙어서 언젠가 죽겠지만, 이 책이 있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겠구나’라며 감격해 하셨다. 그래서 내가 “이제 한판 말림(온몸으로 하는 공연)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 주셔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하자 선생님은 내 손을 꼭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셨다. “힘만 생기면 그렇게 해야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전 문화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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