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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04 11:12 수정 : 2019.05.04 11:19

[토요판] 이슈
중국 5·4운동 100주년의 의미
베이징에서 두 학술회의 열려
“미완성 형태의 사상적 초고”
“3·1과 함께 세계사적 대사건”
‘청말부터의 연속성’ 강조 분위기
당국, 사회운동보다 ‘신문화’ 강조

3·1과 5·4는 한·중 개별 역사면서
동아시아 지역사이자 지구사 일부
백년 뒤 지금 또다른 문명전환기

지난 4월27~28일 중국 베이징 근교에서 열린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중국현대문화학회 주관 ‘5·4운동 100주년 기념 국제회의’ 모습. 백영서 교수 제공

▶ 5월4일은 중국의 5·4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 되는 날이다. 5·4운동은 항일운동이자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운동으로,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두달 전에 일어난 우리나라 3·1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평가된다. 지난 3월과 4월에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5·4운동 기념 학술회의에 참석한 백영서 연세대 명예교수(사학과)가 5·4운동의 의미를 담은 참관기를 보내왔다.

“20년 전 학생들은 5·4운동에 대해 공감했고, 10년 전 학생들은 이해하면서 동정했는데, 지금의 학생들은 무감각하다.”

천핑위안 중국 베이징대학 교수가 지난 3월 말 한 강연에서 자신의 경험에 비춰 한 말이다. 1919년 5월4일부터 시작된 반일운동인 5·4운동은 좁은 의미로는 애국운동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민주’와 ‘과학’을 구호로 내세운) 신문화운동이다. 중국인은 지금 어떻게 5·4운동을 기억하고 있을까.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3·1운동과 5·4운동의 동아시아적 의미를 찾는 필자에게 중국에서 열리는 5·4운동 기념 회의는 이 질문에 답을 찾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필자는 이미 80주년, 90주년 기념 회의를 모두 직접 관찰한 바 있다. 이번에도 두 차례의 학술회의에 참여해 비교할 기회를 가졌다.

80주년·90주년과 또 다른 분위기

지난 3월30일 베이징대 인문사회과학연구원이 주최한 ‘5·4와 현대 중국’이라는 국제회의 형식은 독특했다. 오전에는 텔레비전에서 흔히 보는 대중강연 형식으로 꾸려졌고, 오후에는 학술회의 형식의 몇개 패널로 나눠 진행했다. 오전 강연은 상당히 청중이 많았지만 질문이나 토론 없이 진행되었다. 오후에도 많은 청중이 참여했는데, 그들은 다른 방에서 화면을 통해 시청해야 했다. 주최 쪽은 예상을 넘는 열기에 고무되었다. 나는 오후 발표 시간에 오전에 천 교수가 말한 오늘날 학생의 5·4에 대한 ‘무감각’이 사실이 아닌 것 같다고 반농담처럼 말했다.

오전 프로그램에서 명망가 두 사람의 강연이 눈길을 끌었다. 중문학자인 천핑위안 교수는 5·4가 20세기 중국인에게 “미완성 형태의 사상적 초고”라고 요약했다. 그리고 “당시 학술저널이나 대학보다 신문·잡지에 실린 문장이 더 영향력이 컸고, 이 같은 저널 중심의 사고와 표현이 연설이 아닌 대화 형태이기에 그 시대에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 역사학자인 뤄즈톈(쓰촨대학)은 “5·4는 현재진행형이고, 당시 과제로 제기된 민주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무정부적인 해방으로 이해되었다”고 해석했다. 중국은 국민국가도 제국도 아닌 독자적 문명국가라는 의미에서 천하 개념이 한창 부각되는 추세인데, 그 역시 이 시각에서 5·4의 재해석을 시도해 특히 주목을 끌었다. 그는 국가와 비국가, 개인과 국가(및 사회)의 경계가 명료한 서구 근대와 달리 서로 혼재한 당시 중국 상황은 각 개인이 천하와 연결된다는 시각에서 봐야 현실에 더 부합한다고 강조했다.

오후 패널의 다채로운 주제들 가운데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두 가지이다. 한 발표자는 마오쩌둥 사거 직후 덩샤오핑으로 권력이 넘어가기 전인 짧은 과도기 지도자였던 화궈펑의 역할을 ‘약한 리더십’으로 규정하면서 그가 보인 포용력을 재평가했다. 그 주장은 현실적인 함의도 있어 보였고, 그래서인지 발표가 끝난 뒤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을 받았다. 또한 한 여성 청중이 5·4기 여성의 역할에 대한 발표가 없음을 지적한 것도 돋보였다. 그의 논평을 듣고 다시 살펴보니, 대부분이 사상 문화 분야에 관한 주제들일 뿐, 예전처럼 각종 사회운동에 대한 발표가 안 보이는 것도 특이했다.

지난달 27~28일 이틀간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와 중국현대문화학회가 주관한 ‘5·4운동 100주년 기념 국제회의’는 예전과 달리 베이징 시내에서 먼 외곽의 한 호텔에서 열렸다. 일반 청중이 없는 전문가만의 토론 자리였다. 마르크스주의의 전파와 역할에 관한 첫 패널이 눈에 띄는 것 말고 뚜렷한 방향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근대사연구소 왕젠랑 소장은 개막사에서 “5·4는 3·1운동을 비롯한 다른 민족운동과 함께 세계사적 차원에서 민족 각성의 신기운을 보여준 ‘세계사적 대사건’이기에 올해 세계 여러 곳에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중국 전장(진강)시 박물관에서 열린 ‘5·4 신문화운동 백년기념 특별전’에 전시된 당시 주요 잡지들. 백영서 교수 제공
필자는 폐막식에서 논평자로 요청된 기회를 빌려, 올해 참여한 두 차례 회의와 그전에 관찰한 80주년, 90주년 회의를 각각의 열쇳말을 통해 비교했다.

1999년의 80주년은 애국주의와 ‘신화에서 역사로’로 설명된다. 중국공산당의 공식 역사관인 신민주주의혁명사관에 따르면, 5·4는 반제 반봉건투쟁을 이끈 신민주주의 혁명의 시발점이다. 이 신화로부터 벗어나 역사의 현장에 다가가자는 분위기가 애국운동에 대한 강조와 공존했다.

2009년의 90주년은 다양성과 전통의 긍정이다. 연구 주제와 접근 방식이 다양해지는 가운데 5·4 때 공격당한 유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첫날 원로학자 몇명이 발언자로 나선 ‘전통논단’이 중요한 패널로 구성되어 필자로서는 놀랐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뒤 문화보수주의가 날로 힘을 얻었다. 지금 신유학의 주창자들은 자유주의파, 신좌파와 더불어 중국 사상계를 삼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100주년은? 다양성과 청말로부터의 연속성이다. 5·4를 신화의 틀에서 벗기는 데서 더 나아가 탈중심화 또는 상대화하면서 이와 대조적으로 청말 사조에 더 무게를 둔다. 이전처럼 서구 가치를 추구한 5·4를 기준으로 청말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청말 사상의 내재적 발전의 시각에서 5·4를 본다. 근대로의 이행을 서구적 시각에서 단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다원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청말의 캉유웨이나 장빙린 및 1920~30년대의 량수밍 같은 토착적 사상가의 재해석이 활기를 띤다.

그런데 다양성은 90주년에서 연속된 열쇳말이긴 하나, 통제 속의 다양성이라고 고쳐 말해야 하지 않을까. 들리는 말로는 당국이 5·4의 사회운동(특히 학생운동)의 측면보다는 신문화의 측면을 더 강조하길 권한다고도 한다. 오는 6월4일로 30주년을 맞는 천안문 사건을 고려해 사회운동을 촉발할 어떤 움직임도 꺼리는 탓일 듯하다. 물론 시진핑 주석은 공식적으로 5·4정신을 ‘애국·진보·민주·과학’으로 규정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근대사연구소의 회의도 비준을 받기까지 오래 걸려 일정이 아주 늦게 결정되었다. 중국 밖의 예상과 달리 100주년을 맞아 5·4를 기념하는 학술행사가 드물게 소규모로 열리는 편이다.

그러나 통제 속의 다양성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만도 없다. 젊은 연구자들이 공식석상에서는 진행 중인 회의 방향에 따르는 모양새지만, 개인적으로 들어보면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3월 말 열린 회의에 방청한 학생들의 열기와 관심도 그 근거이다. 한 청중은 필자에게 중국이 정상국가 같지 않은데, 동아시아에서 정상국가란 과연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그러니 통제와 이에 대한 잠재된 반발 사이의 거리 또는 장력이 100주년의 열쇳말이 될 것이다.

중국 전장(진강)시 박물관에서 열린 ‘5·4 신문화운동 백년기념 특별전’에 전시된 사진. 5·4운동 시위 때 체포됐다 5월7일 석방된 학생들과 이들을 환영하는 인파를 찍었다. 백영서 교수 제공

중국 학계, 한국사 이해 부족

두 차례의 회의에서 필자가 발표한 글은 서로 연속된 작업으로서 ‘연동하는 동아시아’와 ‘근대 적응과 근대 극복의 이중과제’의 시각에서 5·4를 재해석하거나 3·1과 5·4의 역사적 성격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에서 경험한 촛불혁명에서 촉발되어 3·1과 5·4를 ‘계속 학습되는 혁명’ 또는 ‘현재 진행 중인 혁명’으로 보려는 시도이다. 두 사건의 세계사적 ‘동시성’과 더불어 식민지 조선과 반식민지 중국의 차이가 갖는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각각이 두 국가의 개별 역사의 일부지만, 동시에 동아시아 지역사이자 지구사와 상호작용하는 그 일부였음을 보여주었다.

참석자들은 개인과 혁명을 융합하는 ‘사회개혁적 자아’ 개념에 주목하고, 동아시아적 시각의 연장에서 두 사건을 세계사적 차원과 연결한 시도에 특히 흥미를 보였다. 그런데 이러한 일국사를 넘는 문제의식에 중국 학자들이 흥미를 보여 반가우면서도 한·중 간의 (지식의) 비대칭성이 새삼 민감하게 느껴졌다. 3·1을 전후한 시대상황뿐만 아니라 한국사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 자체가 부족하다. 그나마 지식의 수요 자체가 적은 것이 아니라 흥미를 이끌 적절한 공급이 부족한 것을 확인한 것은 다행이다.

일대일로 사업이 추진되면서 그 일환으로 동아시아 지역 연구도 자못 활기를 띠고 있다. 한류의 영향을 넘어 우리 학계와 문화계가 적극 대응해볼 적기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북핵 문제와 남북 화해의 진행도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높여주고 있다. 한 중국 학자는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이 모두 강력한 권위적 리더(强人)가 통치하는데, 한국은 예외가 아닌가 물었다. 그에 대한 답은 우리가 100년 전부터 점진적이고 누적적으로 성취를 쌓아온 자주와 민주를 향한 근원적 변혁을 계속 구현해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어 ‘신천지’를 기대하던 역동적인 1919년에서 100년이 지난 지금, 또 한 번의 문명전환기를 맞아 3·1과 5·4를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는 중국과 우리가 제각기 당면한 엄중한 선택의 문제이자 서로 연동하는 과제이다.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

“5·4가 추구한 가치와 제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아”

인터뷰/쉬지린 화둥사범대 역사학과 교수

쉬지린 화둥사범대 교수(역사학). 백영서 교수 제공
지난달 30일 중국의 대표적 공공지식인으로서 자유주의파로 분류되는 쉬지린 화둥사범대학 역사학과 교수를 화둥사범대 교정에서 만나 5·4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5·4의 현재적 의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5·4는 하나의 가치 표지이자 방향 제시이다. 5·4가 추구한 가치와 제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지난 100년간 과학과 민주는 너무 평면화되었다. 과학은 본래 회의주의가 핵심인데, 이데올로기화되어 문화대혁명 같은 반과학적 현상도 나타났다. 민주주의도 포퓰리즘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서방을 기준으로 한 것이니 심화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5·4가 그간 소외된 셈이다. 그러나 당시 의제 설정 자체가 그 이후의 흐름을 규정한 기점임은 변함이 없다.”

―최근 중국 학계는 5·4를 청말의 연속성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분위기가 짙어지면서 5·4의 의의가 약화되고 중국 사상의 내재적 발전을 강조하는 경향이 중국 특색을 강조한 나머지 예외주의로 치우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간 5·4가 청말 사상을 비롯해 모든 가치를 재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일종의 목적론으로 그에 부합되는 알맹이와 그렇지 못한 찌꺼기를 가르는 작용을 한 셈이니 이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청말 사조를 통해 전통과 현대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는 것은 필요한 과제이다. 내가 신천하주의를 말하는 것도 중국 사상에서 대안적 보편성을 찾는 시도이다.”

―일반인들도 5·4에 대해 관심이 많은가?

“그렇다. 내가 접촉한 화이트칼라 계층도 교과서에서 배운 반제·반봉건 투쟁으로서의 5·4를 넘어선 새로운 해석에 흥미를 보였다.”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그는 주요 열쇳말로 한·중·일을 설명해보자고 제안했다. 한·중·일 각각의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중요 쟁점을 찾아보자는 뜻이다.

“오늘의 중국의 열쇳말은 개혁이다. 시진핑의 경우 문화대혁명의 분위기를 계승하고 있어 중국을 세계주의의 원동력으로 삼으려 하고, 중국 특색과 사회주의가 그의 열쇳말이다. 일본의 경우 헌법이라고 일본 지인이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무엇이 있나?” 나는 한참 생각하다 ‘시민과 참여’라고 대답했다.

☞ 5·4운동이란 1919년 5월4일 중국 베이징의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운동이자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운동.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승국인 일본, 영국, 미국 등이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했고, 중국 산둥성에 대한 권한이 일본에 넘겨지는 내용의 강화조약이 맺어졌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모여들어 반대 집회를 벌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정부가 탄압에 나서자 다른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고 노동자 파업, 공장 폐쇄 등도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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