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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18 19:31 수정 : 2019.10.18 19:31

이낙연 국무총리는 오는 28일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장수 총리가 된다. 문재인 정부 초대 총리인 그는 차기 대선 주자 지지율에서도 1위를 달리고 있다. 지난 8월12일 정부서울청사 집무실에서 이 총리가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특집
최장수 국무총리 이낙연

전례 없는 실세 총리로 고공행진
내부적으로 차기 대선 준비 들어가
‘연말 당 복귀 후 총선 역할론’ 솔솔

중도 확장성과 높은 지지율이 강점
“포용과 통합이 다음 시대정신이면
보수적 성향 이 총리가 적임” 주장

세 약하고 정치 철학 약한 건 약점
“오랜 정치생활에도 자기 사람 없어”
“퇴임 후 지지율 유지가 관건”

이낙연 국무총리는 오는 28일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장수 총리가 된다. 문재인 정부 초대 총리인 그는 차기 대선 주자 지지율에서도 1위를 달리고 있다. 지난 8월12일 정부서울청사 집무실에서 이 총리가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오는 28일이면 이낙연 국무총리가 민주화 이후 최장수 총리의 기록(현 기록보유자 김황식)을 새로 쓴다. 2년4개월이 넘는 긴 재임 기간을 가진 총리가 모처럼 탄생하는데다 현직 총리가 공공연한 차기 대선주자의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낙연 총리가 걸어온 길과 나아갈 길을 탐색해본다.

국무총리 이낙연(이하 호칭 생략)은 한국 정치사에서 독특하다. 총리로서 차기 대선 주자 지지율 1위를 달리는 것부터 사상 처음이다. 이회창·고건·이수성 등 역대로 총리 출신의 유력 대선 주자가 많았지만, 모두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의 일이다. 황교안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낙연은 대선에 대한 꿈을 숨기기는커녕 때때로 은근슬쩍 내비친다. 대통령 권력으로부터 견제받기 쉽지만, 청와대나 여당에서는 그를 멀리하기보다는 보호하는 분위기다. ‘현재’도 탄탄하고 ‘미래’의 가능성도 품고 있는 현직 총리다.

2017년 5월 전남도지사 이낙연이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가 됐을 때만 해도 그의 정치적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4선 의원에 도지사 출신이긴 하지만, 대중적 인지도나 여권 내부의 위상이 높지 않았다. 차기 주자군에서도 박원순·안희정·이재명·김부겸보다 밀렸다.

“총리 때문에 장관들 늘 긴장해”

이낙연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총리 업무를 하면서부터다. 야당 의원들의 놀이터였던 국회 대정부 질문 자리는 이낙연의 내공을 보여주는 무대가 됐다. 그는 야당 의원들의 질문 공세를 품격 있는 언어와 날카로운 논리, 엄정한 팩트로 맞받아치는 이른바 ‘사이다 답변’으로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내각 운영에서도 실력을 발휘했다. 인수위(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거치지 못하고 출범했던 문재인 정부가 안정감을 가질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장관은 “회의 때 총리가 날카롭고 구체적인 질문을 많이 하기 때문에, 국무회의나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 때 장관들이 정말로 긴장한다. 장관이 자기 부처의 현안을 대충 알고 회의에 임할 수가 없다. 부처 수장들이 늘 긴장감을 갖고 있기에 이 정부 들어서 큰 사고나 사건이 적고, 발생하더라도 빨리 수습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낙연표 행정의 한 사례로 지난겨울 조류독감(AI)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을 들었다. 평창겨울올림픽을 앞두고 총리 주재로 조류독감 예방을 위해 미리 대책을 논의했으며, 농민 출신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야생 오리가 지나가는 지역에서는 오리 사육을 금지하는 선제적 조처를 했다는 것이다. 해마다 생기던 조류독감이 그해 없었던 원인인지는 더 분석해야 하지만, 현장 중심으로 꼼꼼하게 국정을 챙기는 이낙연 정치 리더십의 한 면을 보여준다.

이낙연의 일솜씨는 문재인 대통령의 깊은 신뢰를 얻었다. 4년 연임제 개헌안이 대통령 발의로 지난해 상반기에 국회에 제출됐을 때였다. 개헌에 반대하는 자유한국당에서 뒤늦게 국무총리를 국회에서 추천하는 내용의 개헌안을 만들었다. 당시 청와대 아침 참모회의 때 문 대통령은 ‘자유한국당 안은 대통령제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 식으로 국회가 총리를 사실상 결정하게 되면 이낙연 총리처럼 좋은 분을 우리가 모실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했다. 이낙연에 대한 문 대통령의 신뢰는 월요일마다 총리와 오찬 회동을 하고, 개발도상국과 하는 정상외교 일부를 총리에게 위임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대통령과 총리로 만나기 전, 두 사람의 개인적 관계나 친분은 전혀 없었다.

“2012년 대선 패배 직후에 제 딴에는 당내의 어떤 문화를 바꿀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제 홈페이지에 우리가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태도는 신중히 하는 ‘태도 보수’를 하자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 막말 파동 등이 있어서 그랬다. 어느 날 당시 문재인 의원님이 전화를 해서 책을 쓰는데 저의 글 중에 그 부분을 인용해도 되겠느냐고 물으셨다. 그게 개인적 인연으로는 처음이다. 국회 기획재정위 활동을 2년간 함께했지만, 제가 도지사 경선을 준비하느라고 바쁘고 해서 깊은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다.”(이낙연, 8월12일 <한겨레> 인터뷰)

문 대통령과 가까운 한 여권 인사도 이낙연의 총리 기용과 관련해 “지난 대선 때 고전했던 호남에서 이낙연 당시 전남지사 쪽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나 총리 발탁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영남이어서 초대 총리는 호남으로 하고, 또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분으로 한다는 원칙이 있었는데 이 총리가 가장 적임이었다”고 말했다.

이낙연 총리는 국회 대정부질문 때 야당 의원들의 질문 공세에 대해 품격있는 언어와 정확한 팩트로 ‘사이다 답변’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총리가 지난 1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인생 바꾼 기자 생활은 우연의 산물

이낙연은 <동아일보> 국제부장을 하다가 2000년 총선거(16대 국회)에서 당시 집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공천으로 고향인 전남 함평·영광에서 당선돼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낙연은 정치 초년생인 2001년, 여당 대변인으로 발탁될 정도로 정치의 무기인 말을 다루는 데 뛰어났다. 절제된 표현에 정확한 단어와 간결한 문장을 구사하는 그는 모두 다섯번의 대변인을 지냈다. “지름길을 모르거든 큰길로 가라. 큰길도 모르겠거든 직진하라. 그것도 어렵거든 멈춰 서서 생각해보라”는 대변인 논평(2002년 10월)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지지율이 떨어진 노무현 대선 후보 교체를 요구하면서 잇따라 탈당하는 소속 의원들을 겨냥한 말이었다.

“우리 민주당에서 탈당자가 연속해서 나오던 때였다. 당에서는 특히 노무현 후보 진영에서는 탈당자들을 강하게 비판해야 한다는 기류가 많았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기도 지쳤고 생각도 달랐다. 국민들이 우리 당을 어떻게 볼까 걱정됐다. 게다가 대통령 후보가 단일화되면 다시 합쳐야 할 정치인들에게 심한 말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낙연의 낮은 목소리>, 2003년)

노무현은 이런 이낙연을 좋아해, 그를 후보 대변인과 당선인 대변인으로 늘 측근에 뒀다. 노무현은 2003년 2월 이낙연에게 청와대로 같이 들어가자고 요청한 데 이어 그해 11월 열린우리당 창당 때는 세 차례나 사람을 보내 합류를 권했다. 그러나 이낙연은 둘 다 거절했다. 17대 국회 때 민주당 원내대표와 사무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옛 동지였던 노무현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했다.

이낙연은 2017년 10월19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뒤 “나라다운 나라로 사람 사는 세상, 이루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못난 이낙연”이라고 적었다. 그는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세번이나 사람을 보내 열린우리당 합류를 종용했는데, 그걸 도와드리지 못한 것은 미안하다는 의미”(이낙연, 8월12일 <한겨레> 인터뷰)라고 말했다.

이낙연은 1952년 전남 영광의 농가에서 7남매 중 둘째(장남)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해 어머니(2018년 작고)가 직접 기른 채소를 새벽마다 광주리에 이고 법성포 장에 가서 내다팔아 생계에 보탰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부모는 명석했던 장남을 가난한 살림에도 광주(북성중)로 조기 유학 보냈다. 대신 형제들 다수는 고향에서 중·고교만 마쳤다. 이낙연은 광주제일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입학(1970년)했다. 고교와 대학 친구인 조순용(한국TV홈쇼핑협회장)은 “고교 때 시험을 보면 성적순으로 게시판에 이름이 나붙는데, 이낙연 총리가 항상 1등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국어를 특히 잘했다”고 말했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때는 유신 쿠데타(1972년)로 박정희의 독재정치가 심한 시기였다. “야당 대선 후보 김대중의 유세장(1971년)을 쫓아다니고, 학생 시위가 벌어지면 뒷줄에서 구호도 따라불렀”(이낙연, 8월12일 <한겨레> 인터뷰)지만, 학생운동권은 아니었다. 사법고시와 행정고시에 한차례 도전했던, 가난한 집안의 평범한 법대생이었다.

“당시 하숙비가 없어서 선배네 하숙집과 친구네 자취방을 전전하는 생활을 2, 3년 했고, 1년은 입주 가정교사를 했다. 그러다 보니 영양실조 상태에 빠지는 등 몸이 망가져 있었는데 영장이 나오길래 연기하지 않고 졸업식 1주일 전에 입대(카투사)했다. 제대 후에 한 친구가 자신의 월급 절반을 주면서 7개월 동안 고시 공부를 하도록 후원해줬지만, 동생들은 점점 크는데 나만 공부한다는 게 양심에 용납이 되지 않아 그만두고 취직했다.”(이낙연, 8월12일 <한겨레> 인터뷰)

정치부 기자·4선 의원·도지사 지내

대변인 5번…‘품격 언어’ 탁월해

디테일 강하고 꼼꼼한 완벽주의자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총애받아

“엘리트주의·아랫사람 힘들어” 평도

이낙연은 투자신탁회사에 잠시 적을 뒀다가 1979년 우연한 계기로 당시 야당지로 알려진 <동아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투자신탁이라는 금융업 자체가 국내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던 때여서 친구들도 제 회사 이름을 외우지 못하고 만날 때마다 뭐하는 데냐고 물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중에 어느 날 선배네 집의 신문에서 우연히 기자 모집 광고를 봤다. 그게 언론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였다.”(이낙연, 8월12일 <한겨레> 인터뷰)

그의 인생 항로가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글을 잘 쓰는 그는 신문사에서 정치부 기자와 도쿄 특파원, 논설위원 등을 지내며 필명을 날렸다. 민주화 직후였던 1980년대 말 평화민주당(현 민주당의 전신)의 김대중 총재가 바이라인이 없어도 출입기자 이낙연이 쓴 기사를 알아보고, 자신의 차량에 동승할 수 있는 ‘특권’을 줄 정도였다. 김대중은 1990년 함평·영광 보궐선거 때를 비롯해 일찍부터 이낙연에게 정치권 입문을 권유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8월12일 정부종합청사 총리 집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보수적 진보 아닌 진보적 보수”

정치인 이낙연의 원형인 기자 이낙연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한쪽은 그의 성실함과 자기 일에 대한 완벽주의 등을 높게 평가한다. 임채청(현 <동아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은 이낙연의 책(<이낙연의 낮은 목소리>, 2003년) 추천 글에서 “머리카락이 들어 있는 청국장은 아무렇지 않게 먹어도, 군더더기가 들어 있는 글은 결코 용납하지 못했다. … 조사 하나, 접속사 하나의 적합성까지도 음미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는 후배 기자들에게 ‘걸어다니는 교과서’로 통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너그러움이 부족한 엘리트주의자라는 평도 많다. 함께 일했던 한 전직 후배 기자는 “그는 늘 완벽하게 일을 하려고 하기에 윗사람들은 좋아하지만, 아랫사람들은 정말 힘들어했다. 마음에 들게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심하게 꾸짖는다. 대신 서울 법대 후배 등을 특별히 챙겼다”고 말했다.

전남도지사 시절이나 총리실 업무에 대한 증언도 비슷하다. 전남도청의 한 출입기자는 “대충주의를 용납하지 않고, 만기친람(모든 일 샅샅이 보살핌)에 빨간펜 선생처럼 문서를 꼼꼼하게 봤기 때문에 공무원들은 정말 힘들어했다. 그러나 도의 기강이 잡히고 일이 잘 돌아갔다. 도민 입장에서는 좋은 지사였다”고 말했다.

이낙연은 대선 얘기가 나올 때마다 “총리 일도 벅찬데 과분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오래전부터 대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격주로 경제 분야 등 국정 전반에 대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고 있으며, 그를 돕는 외곽 그룹도 형성되고 있다. ‘이낙연 대통령 만들기’에 발 벗고 나선 정치 원로 그룹도 있다. 민주당의 한 핵심 인사는 “이 총리는 다음 대선에 나갈 결심을 한 것으로 안다. 이 총리 쪽에서 연말까지 당으로 돌아가겠다고 얘기하는 것은 그런 차원이다.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내년 총선에서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총리를 관둬야 한다는 판단인 것이다”고 말했다.

이낙연의 ‘가능성’은 어떨까. 변수가 많이 남아 있지만, 높은 지지율과 중도 확장성은 가장 큰 강점이다. 이달 초 한국갤럽의 차기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에서 이낙연은 10명 가운데 전체 1위(22%)를 기록했으며, 특히 민주당의 다른 경쟁자들(이재명 7%, 조국 5%, 박원순 3%)보다 크게 앞서 있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최근의 대선 후보 경쟁에서 어느 정당이든 대중 지지도가 핵심적 요소가 되는 점을 고려하면 이낙연의 지지율 고공행진은 큰 자산이다. 더구나 안희정, 이재명, 김경수, 조국 등 여권 내 잠재적 경쟁자들이 잇따라 악재에 휘말려 탈락하거나 고전하고 있어서 이낙연은 상대적으로도 유리한 위치에 있다.

합리적이고 중도 보수적인 성향이 도움이 될 거라는 분석도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정무수석을 지낸 조순용은 “이 총리는 보수적 진보가 아니라 진보적 보수”라며 “진보 정권에 국민이 실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본선 경쟁력이 있는 후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이낙연과 가까웠던 김효석(대한석유협회 회장)도 “다음 대선의 시대정신은 포용과 통합이 될 것이다. 거기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이낙연이다. 사회적 갈등을 치유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높아지면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낙연을 지지하는 정대철(전 새천년민주당 의원)은 “총리나 국회의장은 정치에서 보면 착실히 실력을 키운 정규군이다. 그동안은 한번도 이들이 대통령이 된 적이 없지만, 안정된 사회에서는 가능하다. 우리도 이제 시대적으로 그럴 때가 됐다고 본다. 더구나 이 총리는 임명직만 맡았던 황교안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이낙연 총리는 품격 있는 언어와 신사적인 매너로 유명하다. 지난 8월12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마친 이낙연 국무총리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집무실 밖에까지 나와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호남은 약점 아니나 시대정신이 핵심”

하지만 세력이 약하고, 정치 지도자로서 시대적 철학이나 비전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 약점이라는 평이 나온다. 그는 4선 의원까지 지냈지만, 자기 계보나 이낙연 사람으로 알려진 의원이 없다.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꼴찌를 했을 정도로 동료들에게 인기가 별로다. 야당의 한 다선 의원은 “이 총리는 남에 대한 배려나 칭찬에 인색하다. 그러다 보니 따르는 사람이 없는데, 정치 지도자로서는 약점”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수도권 중진 의원도 “정치 지도자는 합리적이고 훌륭한 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꿈과 비전, 시대정신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이 총리는 그런 게 아직 잘 안 보인다”고 말했다. 정치 컨설턴트인 박성민(정치컨설팅그룹 ‘민’ 대표)은 “모처럼 등장한 호남 대표 주자라는 점은 오히려 긍정적이다. 품격과 안정감도 플러스 요인이다. 그러나 스스로 만든 지지율이 아니라 문 대통령과 가까이 있음으로 해서 얻은 점수가 많아서 한계가 있다. 퇴임 후 지지율이 꺼지면 다시 오르기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약점을 극복하고 잠재성을 극대화할 수 있을지는 본인의 정치력과 시대적 흐름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전략가이기도 한 이철희(민주당 의원)는 “이 총리가 열심히 일한다는 것 말고 자신의 어젠다가 없기는 하지만, 자기가 하기에 따라 후보가 충분히 될 수 있다고 본다. 다음 시대가 어떤 지도자를 원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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