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3.07 20:30 수정 : 2012.11.20 10:19

엄현승(28·안양 한라)

[별별스타] 안양 한라 아이스하키 골리 엄현승

내년 군입대 앞두고 ‘불꽃’
PO 슈팅방어율 95% 육박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시즌
“정신무장 단단히 하고 왔죠”
아시아리그 첫 3연패 노려

멍을 달고 사는 남자가 있다. 20㎏이 넘는 보호구로 중무장을 했어도 최고 시속 200㎞의 퍽이 눈앞으로 날아올 땐 살기를 느낀다. 보호구 사이로 퍽이 꽂히기라도 하면 턱, 하고 숨이 막힌다. 경기가 끝난 뒤엔 온몸이 멍투성이다. 흔히 ‘골리’(Goalie)로 불리는 아이스하키 수문장.

안양 한라의 주전 골리 엄현승(28)이 무거운 부담을 짊어지고 이제 내로라하는 일본의 구단들도 이루지 못한 기적에 도전한다. 한·중·일 아이스하키 아시아리그에서 지난 두 시즌 연속 우승 축배를 든 한라는 아시아리그 사상 최초로 3회 연속 우승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 중심에 한라의 수호신 엄현승이 있다. 엄현승은 2011~2012 시즌 닛코 아이스벅스와의 4강 플레이오프(5전3선승제) 안방 3연전에서 신들린 선방을 거듭하며 2승(1패)을 지켜냈·다. 한라는 10일부터 아이스벅스의 홈인 일본에서 원정경기를 치른다.

플레이오프에서 엄현승의 활약은 눈부시다. 3경기 84세이브(유효슈팅 방어). 95%에 육박하는 세이브율로 정규시즌(90.5%)을 훌쩍 웃도는 철벽방어가 따로 없다. 아이스벅스 수문장 후쿠후지 유타카는 3경기 88.6%에 그쳤다. 후쿠후지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를 경험한 베테랑이다. “정규리그 기록이 만족스럽지 못해 플레이오프 시작하면서 정신무장을 단단히 하고 나왔습니다. 또 동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한발 더 뛰려고 했고, 내 역할만 충실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줬어요.”

엄현승의 체격은 175㎝, 73㎏으로 다른 골리에 견줘 크지 않다. 신체적 약점을 그는 훈련으로 극복한다. 쉬는 날에도 꼬박 훈련을 빼놓지 않는다. 심의식 한라 감독은 “무엇보다 기본기와 성실함이 현승이의 장점”이라고 치켜세웠다. 엄현승이 북미아이스하키리그 보스턴 브루인스의 골리 팀 토마스(38)를 최고 우상으로 꼽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세계 최고 무대에서 나이의 한계를 극복하고 최정상의 자리에 서 있는 선수죠. 가장 존경하고 또 닮고 싶은 존재입니다.”

엄현승에게 골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초등학교 때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형을 따라 경기를 보러 갔다가 마침 팀에 골리가 없다는 이유로 엉겁결에 헬멧을 쓰게 된 것이 인생을 바꿨다. 경성중·고를 거쳐 연세대에 입학했고 3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면서 한국 아이스하키의 간판 골리로 성장했다. “만약 형이 아이스하키를 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날 구경을 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평범한 회사원이 돼 있었을 겁니다. 그만큼 아이스하키는 내게 운명입니다.”

엄현승이 4일 안양빙상장에서 열린 닛코 아이스벅스전에서 슛을 막아내고 있다. 안양 한라 제공
엄현승은 올 시즌 우승 트로피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간절하다. 내년 군 입대가 확정돼 마지막 시즌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다시 한번 아시아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려 팀을 3연패로 이끌고 홀가분하게 입대하고 싶습니다.” 상무팀이 없는 아이스하키 선수에게 입대는 곧 은퇴나 다름없는 게 현실이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2년의 공백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선수로 추락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심의식 한라 감독은 “선수들이 군대라는 공백기 이후에 제 기량을 회복하지 못해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양승준 한라 사무국장은 “상무팀이 없어 엄현승처럼 전성기 때 제 능력을 맘껏 발휘하지도 못하는 것이 2018년 겨울올림픽을 유치한 한국 아이스하키의 우울한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아이스하키 선수가 골리로 살아간다는 것. 모든 포지션이 다 힘들겠지만 골리는 백번 잘해도 한번 잘못하면 욕을 먹는 자리다. 뒤에서 궂은일을 도맡아하지만 한번 실수는 날카로운 비수가 돼 그들에게 날아온다. 엄현승이라고 이를 피해갈 도리는 없다. “실수에 대한 압박감이 가장 힘들어요. 골문을 지키다 보니 실점하거나 경기에 지고 나면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는 부담감을 떨치기 쉽지 않죠. 하지만 또 반대로 이기게 되면 이런 부담감이 단숨에 날아가 그 순간이 가장 보람있습니다.” 퍽과 욕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엄현승. 이번 아시아리그가 끝나면 그는 또 얼마나 많은 멍자국을 남겨놓을까?

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별별스타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