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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24 10:08 수정 : 2013.06.24 10:36

21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 KT 사옥 앞에서 국정원 선거개입 국정조사 촉구하는 촛불 집회 열렸다.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소속 대학생과 시민 500여명 광화문에서 촛불 들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⑫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착잡합니다. 다짜고짜 이런 표현부터 떠오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용렬, 비열, 졸렬하다…. 모두 어리석고 서툰 짓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조금 다른 점은 용렬이란 변변치 못하고 어리석은 이가 하는 졸렬한 짓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라면, 비열은 제법 머리깨나 굴리는 자가 저지르는 졸렬한 짓을 두고 쓰는 말이라는 겁니다. 바탕은 졸렬이로되, 하는 자의 성품과 의도의 차이에 따라 달라집니다. 종합하면 졸렬이란 제 꾀에 제가 넘어갈 자가 저지르는 천박하고 지질한 짓을 두고 하는 말일 겁니다. 속어로는 ‘구리다’는 것과 비슷한 표현이겠죠.

요즘 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삼국지>의 첫 장면이 떠오릅니다. “… 천하가 다시 어지러워진 까닭을 미루어 보건대 (후한의) 환제와 영제로부터 그 위태로움이 시작된 것이다. 환제는 선한 무리를 잡아 가두고 내시들만 높이고 믿다가 죽음에 이르렀고, 영제 또한 내시 조절 등이 정권을 농락하고 있었는데….” 어린 영제는 십상시에게 농락당하다가 결국 불행하게 죽게 됩니다. 내시의 잘못을 간하는 상서를 올린 의랑 채옹이 내시들에게 쫓겨난 뒤 조정은 장양과 조충 등 내시 10명(‘십상시’)의 놀이판이 됩니다. “영제는 우두머리 장양을 신임하여 아예 아버지라고 부르니, 천하의 사람들은 반란을 꿈꾸기에 이르고 도적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게 된다.”

국정원 선거 개입 문제를 덮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국가와 국민에게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정리될 수 있던 것을 여당은 물론 국가와 국민에게 해를 끼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우려했던 지난 편지가 생각납니다. 이런 상황의 바닥에는 국민과 대통령을 언제든 속이고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오만과 얕은꾀가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 주인을 조삼모사(朝三暮四) 고사 속의 원숭이쯤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대뜸 <삼국지>의 ‘십상시’가 떠오른 까닭이기도 합니다.

사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집단이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두려워 저지른 짓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박근혜 후보가 좋아서 한 짓은 아닙니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말처럼 이명박-박근혜, 얼마나 서로 경원하던 사이였습니까. 따라서 님은 자초지종을 따져 죄지은 사람 벌주고, 잘못된 제도 바로잡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사건 은폐를 위해 여당이 국정원과 공모하여 대통령 기록물의 위·변조 및 공개라는 정치공작까지 벌이기에 이르렀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국정원의 선거 개입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대통령선거 때 한번 잘 우려먹었던 것을 다시 끌어내 문제를 삼은 것입니다. 선거 때는 그나마 불법의 경계선상에서 들락날락했지만, 이번엔 아예 불법의 한복판에서 난장을 죽이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생산한 기록물은 ‘대통령 기록물’입니다. 억지를 부린다고 ‘공공 기록물’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건 국정원에 보관돼 있건 마찬가지입니다. 기록물의 성격은 보관처가 아니라, 생산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정상회담 기록물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국정원이 그 기록물을 보고 발췌본을 만들었다 해도, 요약만 국정원이 했을 뿐 원생산자는 대통령이기 때문에 대통령 기록물입니다. 발췌 과정에서 전체 내용을 왜곡했다면 위·변조에 해당할 것입니다. 예컨대 중앙박물관이 절도당한 국보급 문화재를 사들였다고 해도, 마음대로 형상을 바꾸고 해외로 반출하거나 팔고 살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국정원은 저의 선거 개입 문제를 덮기 위해, 이 기록물을 이용했습니다. 대통령 기록물을 위와 같은 목적에 이용되도록 멋대로 열람시키고, 공개하도록 했습니다. 게다가 정상회담 배석자들은 이들이 공개한 내용이 원본과 뜻도 맥락도 다르다고 하니, 위·변조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참으로 악질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님이 노무현 정권에 날렸던, ‘참 나쁜 정권’이라는 평가를 님의 정권에 돌려줘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사태를 두고, 허태열 대통령 비서실장은 엊그제 “국정원 발췌본은 대통령 기록물이 아니”라며 국정원과 새누리당을 두둔했습니다. 엊그제 “문건 공개 여부는 청와대가 허락하고 할 문제가 아니”라고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발뺌했다가 비난을 산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 겁니다. 국정원은 대통령 직할 기구입니다. 국정원의 유일한 사용자는 대통령입니다. 국정원장은 대통령의 마름에 불과합니다. 그 국정원과 국정원장이 불과 6개월 전 선거판을 크게 뒤흔들고, 불법 시비로 얼룩졌던 짓을 대통령도 모르게 멋대로 저지를 리는 없습니다. 그런 일을 두고 청와대와 무관하다고 잡아뗐으니, 누가 믿겠습니까. 하긴 엎어치나 메치나,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보고도 못 받았다면 허수아비 대통령이 되는 셈이고, 보고받고 허락했다면 삼척동자만도 못한 대통령이 되기 때문입니다. ‘얼라 대통령’보다 ‘허수아비 대통령’이 낫다고 할 순 없습니다. 삼국지의 십상시와 영제가 떠오른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게다가 ‘한-중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사달을 일으켰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 부친이 말년에 비명에 간 것도 차지철 등 ‘상시’들에 둘러싸여 있던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부친에게 총구를 겨눈 김재규는 그런 사람들을 ‘버러지’라고 말하긴 했지만요. 취임한 지 이제 겨우 100일 지났습니다. 벌써부터 상시들이 끓을 때는 아닙니다. 갈 길이 멀고 어둡습니다. 거기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커지긴 했지만, 국정원의 선거 개입 문제를 밝게 밝게 처리하십시오.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것이니 님은 당사자입니다. 남에게 미룰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일이 꼬인 것은 그 처리를 상시들에게 미뤄놓은 까닭이 큽니다. 정상회담 대화록 문제도 원칙에 따라 정리해야 합니다. 그건 5년 뒤 바로 님의 일입니다. 문재인과 야당이 지정기록물을 절차를 밟아 공개하자고 나서자, ‘그게 아니고…’라며 딴소리를 해대는 저 상시들의 행태란 얼마나 졸렬합니까.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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