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101
첫 편지를 보낸 2년 전,
어떻게든 당신이 잘하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건 헛된 기대였고 공연한 바람이었습니다
절대왕정의 공주로서 성장을 멈춘
당신의 꿈은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이젠 이 편지를 끝내려 합니다
안녕할 전망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안녕을 빕니다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당신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이미 <한겨레>의 석진환 기자가 왜 가야 했는지 의문을 제기했고(28일치 2면), 권보드래 교수가 세습의 또다른 왕조 싱가포르의 천박성을 따진 글(28일치 23면)을 기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되짚어보는 까닭은 이번 행차만큼 ‘당신의 꿈’을 잘 드러낸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석 기자가 지적한 대로, 나라의 품격을 높이자면 지지난해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추모식에 참석했어야 합니다. 실리를 따지자면, 지난 1월 사망한 세계 최고의 갑부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 장례식에 갔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와 황우여 교육부 장관을 각각 조문 사절로 보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해외 조문을 한 건 15년 전이었습니다. 이렇게 드물고 귀한 대통령 조문외교의 대상으로 당신은 리 전 총리를 택했으니, 당신은 그를 얼마나 가슴 깊이 새겨두었던 것일까요.
리콴유 전 총리 장례식 조문단의 면면을 보면…
아버지가 40년, 아들이 10년째 통치하는 현대판 세습체제가 싱가포르라는 사실을 애써 상기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조문단의 면면을 보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37년째 군사정권인 미얀마에선 대통령이 왔고, 3대 세습 체제인 북한도 대규모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공산당 1당 지배 체제인 중국에서도 부총리가 왔고, 2차 대전 A급 전범으로 일본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 총리가 왔습니다. 그들과 나란히 있었던 것은 리콴유보다 먼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총통체제를 굳혔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었습니다.
싱가포르는 잘사는 나라일지는 몰라도 행복한 나라는 아닙니다. 정문태 분쟁지역 전문기자는 이 사실을 <한겨레>(28일치)에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돈은 넘쳐나지만 국민은 기계의 부품처럼 살아가고, 엘리트들은 최고의 풍요를 누리지만 서민은 가난한 나라의 지표를 말입니다.
국내총생산, 청렴, 정보기술, 사업 편의, 국제 경쟁력, 경제 자유 및 세계화 지표에선 단연 정상급입니다. 하지만 국민의 행복지수는 조사 대상 151개국 가운데 90위(2012년 신경제재단)였습니다. 껌 씹기와 화장실 물 내리기 그리고 성적 취향까지 법으로 규제하고 있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아직도 태형이 존재하고 사형 집행률이 가장 높기도 합니다. 돈 많은 아랍의 이슬람 국가나 다를 게 없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171개 조사 대상 국가 가운데 153위(2015년 ‘국경 없는 기자회’ 언론자유 보고서)에 올랐습니다. 독재로 악명이 높은 미얀마(144위)나 콩고민주공화국(150위)보다 떨어집니다. 모든 신문과 방송을 리씨 집안이 장악하고 있으니 언론 자유는 논할 계제도 아닙니다. <조선일보>는 이번에 리 전 총리를 신격화하기라도 하듯이 칭송했는데, 언론을 사실상 국유화하고 세습 족벌의 지배 아래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랬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통제받는 까닭에 싱가포르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국민으로 꼽혔습니다.(2012년 갤럽 조사) 국민은 입 닫고 눈감고 귀 막고, 그저 국가가 시키는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싱가포르와 리콴유를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북한의 세습 병영 체제를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싱가포르는 우리보다 더 오랫동안 북한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그런 지도자를 두고 당신은 조문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리 전 총리는 우리 시대의 기념비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 이름은 세계사의 페이지에 영원히 각인될 것입니다.” 국민을 ‘최첨단 우리 속 배부른 돼지’로 키우는 사육사가 위대한 지도자라고요? 그런 사육사가 꿈인 지도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칭송할까요.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듯이, 국민도 사육당하는 것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첫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순 없었는데…
당신에게 이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2013년 4월이었습니다. 상습적인 탈세, 병역 회피, 투기, 사기, 표절, 극단주의 등으로 점철된 ‘조각 명단’ 때문에 새 행정부가 출범도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국가기관의 선거부정 때문에 실망하고, 또 그런 최악의 인선 때문에 다시 실망했지만,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인 당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당신이 잘하기를 바랐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던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대한 진저리쳐지는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임기는 비비케이 거짓말에서 시작해 자원외교, 4대강 거짓말 등으로 채워졌습니다. 국민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국가보다 패거리를 더 챙기고, 마사지 걸 등 추접을 떨면서도 근엄한 척, 경건한 척, 아는 척, 잘난 척 하는 것에 넌더리가 났습니다. 게다가 불치병을 핑계로 병역을 회피한 사람이 걸핏하면 군용잠바에 선글라스 착용하고, 당신의 부친 ‘박정희 흉내’를 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끔찍했습니다. 당신은 적어도 그렇게 천박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둘째는 부친의 출세주의와 기회주의로 뒤얽힌 난잡한 개인사가 당신에겐 반면교사가 되리라 여겼습니다. 부친은 일제 치하에선 일본 천황에게 혈서로 충성을 맹서하고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 등 출세 코스를 밟았습니다. 해방이 되자 사회변혁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민족적 사회주의 계열로 표변해 여순반란사건의 한 주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동지들을 팔아넘겨 구명도생한 뒤 반공의 화신으로 출세주의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결국 총으로 권력을 잡았고, 총의 힘으로 종신지배체제를 구축했고, 결국엔 총으로 피살되어 18년의 왕조를 마감했습니다. 그런 개인사를 곁에서 지켜봤을 당신이 그런 부친의 뒤틀린 길을 갈 리 없으며, 자신과 국민을 또 불행에 빠트리는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2월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원 정치·대선 개입 사건’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가고 있다. 1심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던 원 전 원장은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곧바로 법정 구속됐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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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3월24일 오후 서울 서초동 특위 사무실을 방문한 세월호 유족들과 만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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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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