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30 18:46
수정 : 2014.03.3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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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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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10·4선언 계승선언’이라고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박근혜 대통령이 28일 독일 드레스덴공대에서 밝힌 드레스덴선언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인도적 문제 해결’, ‘공동번영을 위한 인프라 구축’, ‘남북 동질성 회복’이라는 3가지 화두로 북한에 여러 협력사업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 내용들은 대부분 10·4선언에 포함돼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시치미를 뚝 떼고’ 새로운 제안들인 양 발표했다. 보수언론들은 덩달아 대단한 통일 독트린이나 되는 듯 화려하게 보도했다. 그들이 10·4선언에 대해 퍼부었던 그 저주와 악담은 다 어디로 갔나 싶었다.
드레스덴선언은 인도지원 문제와 관련해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를 제안했다. 하지만 총 8개 항으로 이루어진 10·4선언은 제7항에서 “흩어진 가족과 친척들의 상봉을 확대하며 영상편지 교환사업을 추진”하는 방안에 이미 합의했다. 10·4선언이 계승됐다면 박 대통령이 멀리 독일에까지 가서 다시 제안하는 일 없이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가 이루어졌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은 공동번영 문제와 관련해 “한국은 교통·통신 등 가능한 부분의 인프라 건설에 투자하고, 북한은 한국에게 지하자원 개발을 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서도 이미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0·4선언 5항에서 “남과 북이 기반시설 확충과 자원개발을 적극 추진”하는 데 합의했다. 선언은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공동 이용하기 위한 개보수 문제”도 담고 있다. 하지만 보수정권이 10·4선언을 무시하는 동안 많은 북한 광산의 개발권이 중국에 넘어갔고, 신의주~개성 고속도로 사업권도 중국 기업이 따놓은 상태다.
박 대통령은 또 “순수 민간 접촉이 꾸준히 확대될 수 있는 역사연구와 보전, 문화예술, 스포츠 교류 등을 장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것은 “남과 북은 역사, 언어, 교육, 과학기술, 문화예술, 체육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키기로 한 10·4선언 6항을 베껴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당시 두 정상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남북응원단이 경의선 열차를 이용하여 참가”하는 구체방안까지 합의했었다.
10·4선언에는 있는데 드레스덴선언엔 없는 것도 있다. 이런 사업들의 실행에 든든한 버팀목이 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방안이다. 남북의 두 정상은 10·4선언에서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로 했다. 반면 박 대통령은 어떠한 평화체제 구축방안 제시도 없이 북한에 ‘핵을 버리는 결단’만 촉구했다. 그 뒤에야 북한의 국제투자 유치 등을 돕겠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의도야 어떻든 드레스덴선언은 결과적으로 10·4선언의 유용성을 현 정부에서도 일부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한다. 당연히 청와대는 드레스덴선언을 구상할 때 10·4선언도 참고했을 것이다. 그래서다. 박 대통령이 선언에서 “나의 제안들 중 상당 부분은 이미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0·4선언에서 함께 말씀하셨던 내용”이라고 밝혔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면 많은 이들이 박 대통령의 ‘진정성’을 좀더 평가했을 것이다.
통일정책에도 ‘저작권’이 있다. 나눠쓰면 더 값진 것이지만, 그래도 외국에까지 가서 뭘 발표할 때는 출처는 밝히는 게 옳다. 2007년 10월4일 남북의 두 정상이 발표한 내용들을 잊어버리기에는 10년도 채 안 된 역사의 시간이 너무 짧아 보인다.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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