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11 19:11
수정 : 2014.05.11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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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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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다.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선장과 승무원은 왜 그랬을까? 청해진해운, 해운조합, 한국선급, 해경, 해군, 해양수산부, 경기도교육청, 교육부, 안전행정부…. 어찌 그토록 많은 곳에서 위반이 일상화되고, 감시와 감독체계는 왜 하나같이 불능에 빠졌던가? 누가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나?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등 가면 속에 숨었던 이 나라 리더십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래도 사과는커녕 권한만 행사하려 드는 이 뻔뻔하고 전도된 리더십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됐는가? 우리가 그 실체를 몰랐던가? 알고도 모른 체 적당히 방관해오지 않았나? 상황이 명백한데도 대통령과 정부가 대응을 잘했다고 응답하는 이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인자는 또 무엇인가?
사건 발생 초 정부의 무능에 수많은 시민들이 공분했건만 거개의 정치인들은 진도와 팽목항, 안산으로 달려가면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보다 조문의 예를 갖추려는 데만 급급했다. 왜? 사건 직후 구조대책이 효과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자신들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다하지 못하고 늘 그랬듯 버스 지나간 뒤 사후약방문 격 대책만 논하고 있는가? 한국 정치의 이 기이한 모습의 뿌리는 무엇인가? 모두 우리가 뽑았다. 유권자인 우리 또한 그 정치의 책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기레기’, 기자란 직업을 근본적으로 회의케 하는 말이다. 참담한 표현이다. 언론이 비난의 대상을 넘어 이처럼 전국민적 공분과 혐오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던가? ‘전원 구조’란 대형 오보, 잔인한 질문, 유가족들에게 마구잡이로 들이댄 카메라, 선사 쪽 일가와 ‘해피아’엔 여지없이 메스를 들이대면서도 최고권력자엔 결코 들이대지 않는, 도리어 화면을 조작하며 비호하기에 급급한 비루한 언론을 탄생하게 한 주범과 공범은 누구인가? “왜 우리 뉴스는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건가요? 정권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하는 언론은 어디로 간 겁니까? 왜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 않는 건가요?” ‘개병신(KBS)’이란 소리를 더 듣고 싶지 않은 젊은 기자들의 반성문이다. 하지만 자신들 고백대로 “공기업 사장이 여당 대표에게 인사청탁을 한 사건이 기사화하지 않았을 때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던 이들이 바로 자신들 아닌가? 그때는 왜 그랬던가? 어쩌면 언론인 모두 “순간순간의 비겁함이 모여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은 아닐까?” 공론장이 무너진 곳에 민주주의가 꽃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자들은 몰랐던가?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지 한달 가까이 흘렀다. 하지만 나는, 우리는, 여전히 이 가공할 ‘그들’의 전모와 시스템의 실체를 또렷이 알지 못한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의문과 의혹, 물음만 더 켜켜이 쌓인다. 그 많은 희생에도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재난대책 하나 세우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마저 인다. “(사건 이후) 내려온 지시는 공무기강 점검, 연가를 자제하라, 회식하지 말라뿐이다. 어떤 근본적인 (성찰의) 질문을 받지 못했다.” 최근 만난 한 정부부처 공무원의 고백은 전대미문의 비극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관료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고발한다. 이 비정한 관료주의의 모습은 ‘세월호 이후’를 낙관할 수가 없음을 증언한다.
세월호로 정체를 드러낸 대한민국의 몹쓸 “껍데기들”은 결코 “가라”고 소리친다고 해 저절로 물러나지 않는다. 쫓아내야 한다. 살아있는 자들의 책무다. 그 출발은 기억하고 응시하고 답을 얻을 때까지 철저히 묻고 또 캐묻는 것이다. 이 물음을 통해 사건의 진상과 전모를 밝혀내고 책임질 이들에게 명확히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다시 신뢰를 말하고 희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거기까지는 가야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는 자로서 새로운 대한민국의 청사진을 논할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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