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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21 15:39 수정 : 2019.01.21 16:01

세계경제포럼은 매년 새로운 어젠다를 놓고 해법을 논의한다. 세계경제포럼 제공

[곽노필의 미래창]

세계경제포럼은 매년 새로운 어젠다를 놓고 해법을 논의한다. 세계경제포럼 제공

세계화 시각으로 본 인류 역사 30만년

물건을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리 보이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 사실도 마찬가지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역사적 사실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래서 역사적 관점은 결국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은 역사를 이성의 실현, 자유의 전개 과정으로, 20세기 영국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패러다임으로 보았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역사학자 가운데 하나인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의 지구 지배력 강화 과정으로 역사를 풀어낸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언어가 촉발한 인지혁명(7만년 전)에서 시작해 농업혁명(1만2천년 전), 과학혁명(500년 전)을 거치며 지구의 지배력을 강화해 갔다. 이것 말고도 생산 방식이나 정치 체제, 기술의 변화 등 역사를 보는 관점들은 다양하다.

리처드 볼드윈(Richard Baldwin) 스위스 제네바 국제경제대학원 교수는 인류의 역사를 세계화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경제학자다. 그는 2016년 <위대한 수렴>(The Great Convergence)에서 세계화를 생산과 소비가 일어나는 공간의 변화라는 시각으로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구석기 수렵채집 시대까지만 해도 세계화는 없었다. 생산과 소비는 한 곳에서 일어났다. 최초의 세계화, 즉 세계화 1.0 시대를 촉발시킨 건 기후변화였다. 기원전 30만년~기원전 1만년에 이르는 시기다. 볼드윈은 이 시기를 `지구의 인간화'라고 이름 붙였다. 7만년 전 대규모 화산 폭발로 구름이 하늘을 뒤덮으면서 기온이 뚝 떨어져 지구 생태계에 위기가 닥쳤다. 저온 현상과 가뭄으로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호모 사피엔스는 식량을 찾아 아프리카를 탈출했다. 한 무리는 북쪽 유럽으로, 다른 한 무리는 아시아로, 또 다른 한 무리는 더 남쪽으로 미지의 세상을 찾아 나섰다.

인류 역사를 세계화의 심화 과정으로 보는 사람들은 지금을 `세계화 4.0‘으로 규정한다. 픽사베이.

농업혁명에서 출발해 증기기관으로 가속

세계화 2.0(기원전 1만년~서기 1820년)은 지역 경제의 발흥기다. 신석기 시대를 연 농업혁명이 촉발했다. 농업 덕분에 사람들은 각자가 있는 곳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이때도 구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생산과 소비는 한 곳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인류는 아프리카라는 한 지역에 고정돼 있지 않았다. 필요한 것들을 자연에서 수집하는 대신 흙과 나무, 풀 등을 이용해 의식주를 해결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개발이 시작된 때다. 개발의 중심은 강 주변이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등지에선 거대한 강을 중심으로 고대 문명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볼드윈은 "이 시기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생산과 소비가 특정 지역에서 한 묶음으로 이뤄졌다"고 설명한다.

세계화 3.0(1820~1990년)은 지역경제의 세계화 시기다. 증기기관이 첫 물꼬를 텄다. 증기기관은 먼 곳까지 쉽게, 그리고 싸게 물건을 운송할 수 있게 해줬다. 운송비용이 급락해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생산과 소비 지역이 처음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장은 산업지구 같은 특정 지역에 몰려 있었다. 이는 특정 지역, 국가만이 부유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세계는 잘 나가는 자본주의 그룹 1세계와, 이에 반대의 깃발을 든 공산주의 2세계, 이도 저도 아닌 저개발 3세계로 나뉘었다.

주요 7개국과 중국, 인도의 세계화 단계별 경제 비중. 볼드윈 교수 링크드인

공장의 세계화에서 가상 세계화까지

세계화 4.0은 공장의 세계화다. 1990년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우선 정보통신기술이 상품과 서비스의 운송, 거래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공정의 표준화를 가능하게 해줬다. 생산과 소비의 분리를 넘어, 생산 과정의 분리가 시작됐다. 완제품 공장과 부품 공장이 한 나라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됐다. 두번째 분리다. 선진국 기업들은 저임금 개발도상국에 공장을 두는 게 더 유리했다. 오프쇼어링(해외생산)이 유행처럼 번져갔다. 선진국 제조업 독점 시대가 끝났다.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신흥경제가 급부상하게 됐다.

이제 모든 것이 디지털화하는 4차산업혁명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앞으로는 노동과 노동 서비스의 분리가 가능해진다. 즉 사람의 몸과 노동이 분리된다. 세번째 분리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전세계 어느 곳의 일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름하여 `가상(버추얼) 세계화'다. 공장의 세계화와 구분하자면 오피스의 세계화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마지막 장벽이라 할 언어장벽도 인공지능의 기계번역 기술 발전과 함께 점차 허물어질 것이다. 볼드윈은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현격한 임금 격차가 `가상 세계화'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는 이를 원격이민(telemigration)이라고 이름 붙였다. 사실 웹 개발 분야에선 벌써 많이 퍼져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여태까지 높은 숙련도와 전문성으로 버텨온 사람들도 이 물결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4차산업혁명에선 블루칼라에서 화이트칼라에 이르는 대부분의 노동자가 세계화 문턱에 서게 된다. 볼드윈은 24일에 출간하는 새 저서에서 이런 상황을 `글로보틱스 격변'(The Globotics Upheaval)으로 표현했다. 앞으로 진행될 세계화 4.0은 인류를 어디로 데려갈까?

세계경제포럼이 열리는 스위스 여름 휴양지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제공

세계경제포럼이 2019년 주제로 삼은 `세계화 4.0'

22일부터 나흘 동안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올해의 토론 주제를 `세계화 4.0 : 제4차 산업혁명 시대'로 정했다. 2년 전 이 포럼에서 논의한 4차산업혁명과 코드를 맞춘 작명이다. 하지만 4차산업혁명이 초래할 변화를 압축한 표현이기도 하다. 세계경제포럼은 전세계 거물급 기업인, 정치인, 관리, 학자들이 모여 세계 경제의 현안과 대안을 논의하는 모임이다. 해마다 연초에 스위스의 여름 휴양지 다보스에서 열린다 해서 다보스포럼이라고도 불린다. 참여자들이 다 거물 보스(boss)들이어서 `다 보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일부에선 부자들이 벌이는 `그들만의 잔치판'이라며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1971년 하버드대 교수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이 창립한 유럽경영포럼에서 시작했지만 1987년부터 세계 현안을 논의하는 세계경제포럼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제는 굴지의 민간 국제포럼으로 발돋움했다. 더 나은 세계(2010), 유연한 역동성(2013), 세계의 재편(2014), 4차 산업혁명(2016)에 이어 지난해 `소통과 책임 리더십'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포럼이 내세우는 주제들은 전세계 리더들을 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포럼의 슈밥 대표는 세계화 4.0을 들고나온 이유에 대해 "닥쳐올 변화는 엄청나지만 이를 맞을 준비가 거의 안 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세계화, 즉 세계화 4.0을 이끌어가는 흐름으로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세계 경제가 다자주의(multilateralism)에서 다원주의(plurilateralism)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생존의 룰이 경쟁이나 협력에서 공존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세계의 힘의 균형은 일극에서 다극으로 이동했다는 인식이다. 셋째는 기후변화를 포함한 생태적 도전이 사회경제 발전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넷째 4차산업혁명으로 기술이 사상 유례없는 속도와 규모로 인류의 삶에 파고들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의 새우 경매장. 옥스팜 보고서

세계화의 어두운 그림자 `약육강식'과 `불평등'

하지만 인류가 경험해온 세계화가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해준 것만은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 오랜 기간 세계화는 세계적인 약육강식 사태를 불렀다. 자유방임주의, 제국주의, 독점자본 환경이 이를 조장했다. 세상은 강자들만의 무대였다. 아무도 감히 이들을 막지 못했다. 한쪽은 제국의 신민으로, 다른 한쪽은 식민지 노예로 엇갈렸다. 가진 자의 부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렇지 못한 자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 이는 결국 피를 불렀다. 세계대전, 대공황, 공산주의 혁명, 파시즘 반동이 이어졌다. 수억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야 인류는 위기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유엔, 아이엠에프, 세계은행 같은 것들이다.

세계화의 또 다른 얼굴은 불평등 심화다. 완전고용과 사회보장, 노동권 등은 선진국에만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부의 편중은 자산의 평형추를 `20 대 80'에서 `1 대 99'로 바꿔놓았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7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최상위 1%가 새로운 창출된 부의 82%를 가져갔다. 세계 전체의 빈곤율은 줄어들고 있지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선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2030년 빈곤 퇴치라는 유엔 목표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평가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은 최저임금을 벌기 위해 시간당 950마리의 새우 껍질을 벗겨야 하는 동아시아시아 노동자가 미국 슈퍼마켓 경영자의 1년치 수입을 벌려면 5천년 이상을 일해야 한다고 고발했다.

성장이 주춤해지면서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미국의 시스템을 전세계에 퍼뜨렸다. 1994년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협정(TRIPS)은 그 사례다. 거대 제약사와 기술 기업들이 덕분에 엄청난 지대수입(불로소득)을 올렸다. 비대해진 선진국 금융자본은 세계 구석구석의 자산을 곶감 빼먹듯 했다. 명분은 시장개방과 금융 자유화였지만, 그 속은 자국에 유리한 무역과 투자 규칙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렀다. 벼랑에 내몰린 이들에게 포퓰리즘 세력들은 화살을 내부의 기득권층이 아닌 외부로 돌리게 했다.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 미국의 트럼프 당선 등은 포퓰리스트들의 증오 전략이 먹혀든 결과였다. 가이 스탠딩(Guy Standing) 런던대 소아즈(SOAS) 교수는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약탈이 더 심해지면서, 프롤레타리아보다 더욱 불안정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새로운 무산계층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세계는 소수 글로벌 공룡과 나머지 수십억 파편들로 나뉘었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노란조끼 시위. 위키백과

디지털 기술이 펼칠 세계화 4.0은 어떤 모습일까

불평등은 불만의 증폭제다. 방치된 불만은 결국 충돌을 부른다. 수많은 피의 역사가 이를 말해준다. 지난해 말 유류세 인상에 반발해 순식간에 반정부 시위로까지 번진 파리 서민들의 '노란 조끼'(gilet jaune) 운동은 아주 작은 사례다. 지난해 지구촌은 중산층과 인터넷 이용자 인구가 처음으로 전세계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는 분기점을 맞았다. 잠자던 의식을 일깨우는 중요한 기폭제가 등장한 셈이다. 빈곤을 넘어선 사람들은 앞으로 삶의 질을 따지기 시작할 것이다. 인터넷에 널린 정보들은 그들이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열악한지 깨닫게 해줄 것이다. 불평등 이슈가 빠르게 확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산업의 역사가 오랜 선진국들은 또 다른 문제를 코앞에 두고 있다. 불평등의 대물림이다. 인구 감소와 자산 승계, 저성장이 어우러지면서 문제가 복잡해지고 있다.

포럼이 이 시점에서 세계화를 화두로 삼은 건 100년 전 파국이 재현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의 반영이다. 여기엔 세계로 확산된 불평등이 세계 경제의 위험 요인이 됐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4차산업혁명의 중심인 디지털 기술은 불평등을 한 차원 더 심화시킬 잠재력을 갖고 있다. 디지털은 그나마 남아 있던 지리적 장벽마저 쓸모없게 만들 것이다. 샤란 버로우(Sharan Burrow) 국제노동조합총연맹(IYUC) 사무총장은 전세계인의 85%가 세계 경제의 규칙을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전했다. 4차산업혁명론자들이 지금 시점에서 `세계화 4.0'을 화두로 삼은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지난해 11월 두바이에서 열린 2019 세계경제포럼 사전 모임. 세계경제포럼 제공

불평등 해소는 정의의 문제...올바른 혁신 규칙 고민을

어떤 해법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볼드윈 교수는 각국 정부를 향해 변화의 속도를 늦추라고 권한다. 사람들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부의 할 일이며, 이를 위해선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스탠딩 교수는 정부가 할 일은 불안하고 고단한 삶에 노출된 프레카리아트를 구출해내는 것이며, 프레카리아트가 할 일은 정부에 기술진보의 과실을 좀 더 평등하게 나눌 수 있는 지속가능한 경제 시스템을 만들도록 압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포럼 대표인 슈밥은 공동번영의 미래를 위한 세계화의 규칙을 다시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는 이를 위해 모든 이해관계자의 꾸준한 대화와 국가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주문했다.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관통하는 기본 가치는 물론 휴머니즘이다. 세계화 4.0 시대에 중심으로 떠오르는 가치는 뭘까? 지난 100년의 세계화 흐름은 평등 문제가 시급한 과제임을 말해준다. 불평등을 완화하고 해소하는 건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평생을 정의론 정립에 바쳐온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는 최소 수혜자의 몫이 커지는 것이 바로 정의라고 했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회적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 `세계화 4.0' 논의는 세계적인 불평등 확산의 흐름을 바꾸는 물꼬를 틀 수 있을까?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곽노필의 미래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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