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1.06.12 19:14 수정 : 2013.06.17 15:36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우리 공동체 앞에 놓인 과제와 앞으로 닥쳐올 숱한 난제와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지도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현실에 국민들은 퍽 불안해하고 있다. 즉 국가 리더십의 부재 현상을 크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나라가 이렇게 된 데에는 스테이트크래프트를 결여한 정치 리더십에 큰 책임이 있다. 그러나 훌륭한 국가 리더십은 결국 훌륭한 팔로어십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정치권이 몹시 부산하다. 한나라당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 떠나간 민심을 되돌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응징심리에 힘입어 정권을 되찾겠다고 벼르고 있다. 보수세력은 친이-친박으로 분열해 내년 대선에서 패배할까 전전긍긍하고 있고, 진보세력은 연대를 통해 기필코 승리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최근 여야는 부산저축은행 사건이건 반값 등록금 문제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기보다는 오직 내년 선거를 의식한 정략적 정치공세에 매달리는 모습이다.

그러나 정작 심판을 내릴 국민들의 관심은 차원이 다르다. 그동안 국민들은 한나라당-민주당 혹은 보수-진보의 집권을 두루 경험하면서 양쪽 모두 실패했다는 판단을 내린 지 오래다. 다음 정권이 보수나 진보 또는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중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는 관심의 초점이 아니다. 지금 우리 공동체 앞에 놓인 과제와 앞으로 닥쳐올 나라 안팎의 숱한 난제와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지도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현실에 국민들은 퍽 불안해하고 있다. 즉 국가 리더십의 부재 현상을 크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부문에는 리더십이 있다. 학교 교실에서부터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공동체는 모두 리더십을 필요로 하고 또 실제로 리더십이 있다. 그러나 국가 리더십은 이런 일반 리더십과는 다른 것이다. 국가가 갖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국가는 모든 공동체를 포괄하는 정치공동체로서 합법적 폭력의 독점과 강제력의 행사를 특징으로 한다. 국가가 국민에게 생명(국방 의무)과 재산(납세 의무)을 요구하는 강제력은 공동체 전체를 위한 공공성이 그 정당성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리더십이 이상적인 국가 리더십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이명박 대통령이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기업의 시이오다”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중요한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공공성이 국가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가치라는 것을 제대로 알았을 리 만무하다. 이 대통령의 중대한 과오 중의 하나는 바로 공공성을 무너뜨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취임 초의 ‘강부자·고소영 내각’, ‘만사형통’(萬事兄通) 등은 공공성 파괴의 분명한 사례들이다. 최근 부산저축은행 사건에서 드러난 것처럼 감사원과 금융감독원 소속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는 바로 국가의 공공성을 무너뜨린 중대한 범죄행위였다고 하겠다.

이렇게 국가를 통치하는 데는 공공성이 생명인 만큼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고도의 윤리의식과 더불어 독특한 스테이트크래프트(statecraft), 다시 말해 치국경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올바른 스테이트크래프트를 갖추려면 무엇보다 공동체 전체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제지표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건전성과 연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 특히 사회에서 소외되고 그늘진 계층에 대해서 골고루 따뜻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각 부문 간의 균형과 조화, 단기적 이익과 장기적 이익, 즉 현재와 미래적 관점 간의 적절한 조응도 아주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부문 간 힘의 격차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법질서의 수호’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름으로써 약자를 더욱 약하게 만든다든지, 반대로 현재의 다중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인기영합주의는 올바른 스테이트크래프트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국가가 갖고 있는 힘의 사용에서도 절제의 미덕이 필요하다. 특히 대통령은 그 자체가 국가라는 제도의 최고 행위자로서 그 영향이 지대한 만큼, 언행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해야 하며 고도의 품위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 여당이 국민이 요구하는 국정의 본질적 변화보다 내년 선거 승리를 위한 정치 공학적 접근을 계속한다면 떠난 민심은 분노의 표심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런 민심은 작년 6월 지방선거와 지난번 재보궐선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정부는 거시경제 지표를 들어 경제 성과를 자랑하고 있지만 이것은 오히려 갈수록 팍팍해지는 삶의 여건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기 쉽다. 이 정부 출범 이후 대기업은 엄청나게 성장했다. 현직 청와대 정책실장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환율 높았지, 금리 낮았지, 세금까지 깎아주었으니 대통령이 사실 수출하는 대기업들에는 현금을 갖다 안겨준 꼴”이라고 말했을 정도다.(<한겨레21> 856호, 4월18일치 표지이야기 참조) 대기업이 돈을 많이 벌어야 그것이 흘러넘쳐 서민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간다는 말(적하효과)을 믿고 목마르게 기다리던 서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다름 아닌 가계부채 폭증, 전월세 대란, 물가고였다. 나날이 심화되는 양극화에 대한 서민들의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약간의 자극으로도 자칫 시장경제가 지속가능하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된다.

최근 사회 일각에서 공동체 붕괴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 ‘불신’ 때문이라고 본다. 첫째, 국가의 능력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심각한 수준이다. 천안함·연평도·구제역 사건을 겪으면서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 임무이다. 둘째는 정치 리더십에 대한 불신이다. 특임장관실에서 지난 2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신뢰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회가 2.9%로 꼴찌고 청와대가 3.4%로 꼴찌에서 둘째였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국민의 대표인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대표성의 위기이자 대의민주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셋째는 시민 상호 간의 불신이다. 흔히 사회적 자본이라고 일컫는 신뢰가 무너진 탓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라가 이렇게 된 데에는 스테이트크래프트를 결여한 정치 리더십에 큰 책임이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정치적 수준은 그 나라의 국민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어느 나라나 국민 수준에 맞는 정부와 지도자를 갖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훌륭한 국가 리더십은 결국 훌륭한 팔로어십(followership)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우리 국민들도 더 이상 사적 인연이나 지역감정 또는 단순한 응징심리에 따라 우리의 대표를 선택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대통령 또는 국회의원으로서 얼마나 공공성을 갖추었는지, 얼마나 국가 통치에 필요한 자질과 덕목을 갖추었는지, 그리고 시대정신에 맞는 비전으로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가 선택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내년 선거가 스테이트크래프트를 제대로 갖춘 국가지도자를 선택하는 의미 있는 출발이 되기를 바란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특별기고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