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7.10 19:27
수정 : 2013.06.17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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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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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을 내린다 만다거나 대학을 구조조정한다 어쩐다 같은 문제만이 아니라 대학이 ‘교육다운 교육’으로 한 사람의 대학생을 길러내자면 도대체 얼마의 교육비가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계산부터가 선행되어야 한다
“열심히 일하는 농민과 열심히 공부하는 대학생의 공통점 = 빚쟁이.” 방학인데도 서울의 한 대학 교정에는 이런 문구의 가로막이 걸려 있다. 왕년에 마르크스가 “노동자는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더 가난해진다”는 역설로 근대 사회에서의 노동자의 운명을 포착했던 한 대목을 생각나게 하는 문구다. 상당수 대학생이 재학 중에도 빚쟁이, 졸업 후에도 빚쟁이, 더 심한 경우에는 빚쟁이 중에서도 최악의 빚쟁이인 신용불량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선택자 책임론이나 수혜자 부담의 원칙 같은 주장만으로는 풀 수 없는 사회문제이다. 왜 그런가?
일단 대학교육은 개인의 수혜사항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이익과 국익에 직결된 사안이다. 물론 대학교육은 의무교육이 아니다. 그러나 고교 졸업자 80% 이상이 대학으로 진학하는 나라에서 대학교육은 이미 대중교육이고 국민적 교육이다. 어떤 국민을 길러내고 어떤 역량의 인재들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는 사회와 국가의 공적 과제이다. ‘길러낸다’는 표현이 좀 거북스럽긴 하지만, 국가주의적 함의를 떠나 교육은 어차피 ‘사람 길러내기’이다. 국민을 잘못 길러낸 나라가 어떤 운명에 처하는지 역사는 잘 보여준다. 대학교육이 공적 과제일 때, 거기에는 문제를 풀기 위한 치열한 사회적 사유의 투입이 필요하고 국가가 국민 세금으로 감당해야 할 응분의 재정투입 책임도 요구된다.
그런데 사회적 현안으로서의 등록금 문제를 푸는 데는 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등록금을 내린다 만다거나 대학을 구조조정한다 어쩐다 같은 문제만이 아니라 대학이 ‘교육다운 교육’으로 한 사람의 대학생을 길러내자면 도대체 얼마의 교육비가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계산부터가 선행되어야 한다. 교육비는 개인 부담의 등록금을 포함하되 등록금 이상의 것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수년 전의 것이긴 하지만) 한국 대학생 1인에 투입되는 교육비 총계는 미국 대학생의 60분의 1, 일본의 10분의 1로 집계된 예가 있다. 등록금만으로 교육비의 큰 몫이 해결되어야 한다면 미국 학생은 한국 학생의 수십배 등록금을 감당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다른 나라들의 대학생 교육비는 얼마이며 그 비용의 큰 부분은 누가 부담하는가? 우리가 긴 안목으로 양질의 대학교육을 실시하고자 한다면 학생 1인당 교육비의 이상적 수준은 얼마이고 차선의 수준은 얼마인가? 이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지금의 우리 대학생 교육비는 적정선에 있는가? 아니라면 적정 교육비의 큰 몫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 이런 질문과 접근법 없이 등록금의 규모 그 자체만이 문제의 전부라고 생각하거나 대학을 구조조정하기만 하면 해법이 얻어질 것이라 여긴다면 그것은 교육을 위한 발상이 아니다.
나는 방금 ‘교육다운 교육’이니 ‘양질의 대학교육’이니 하는 말을 썼는데, 이런 표현은 등록금 파동과 관련해서 그러나 그것과는 좀 다른 각도에서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는 또 다른 교육적 현안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대학교육의 목적과 책임에 관한 문제가 그것이다. 대학교육이 공적 사업일 때, 그 교육의 공공성은 어떻게 확보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등록금 문제와는 별 관계 없는 사안으로 비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학교육이 순전히 개인의 성공과 영달을 위한 것이라면 거기 국고를 투입할 근거는 미약해진다. ‘성공적’ 개인이 많아지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이득이다. 그러나 개인의 성공을 위해 국가가 공공 재원으로 그의 대학교육을 지원한다면 대학에 진학하지 않거나 못한 사람은 어찌 되는가? 우리는 등록금 파동이라는 쓰나미에 밀려 이 문제의 중요성을 곧잘 망각하고 있고, ‘반값 등록금’을 외치는 학생들도 그 질문에 대한 응답 없이는 ‘반값’ 주장의 근거가 심히 허약해진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대학교육의 공적 도덕적 책임은 무엇인가? 등록금의 국고 지원이라는 명백한 불평등은 어느 때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 대학은 유능하고 탁월한 개인을 배출함과 동시에 ‘책임 있는 시민’을 양성해내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유능하고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질 줄 아는 시민을 길러내는 일 ─ 이것이 대학교육의 본질적 목적이다. 대학은 다수의 크고 작은 교육적 목표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목표들을 넘어서고 관통하는 핵심적 과제는 대학이 ‘개인적 능력과 시민적 능력의 동시 함양’을 대학교육의 양보할 수 없는 목적으로 정립하고 그 목적에 충실한 교육을 실시하는 일이다. 대학교육이 공공성을 획득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 더 정확히는 대학교육의 ‘시민교육적 책임’ 때문이다.
‘책임 있는 시민’을 키워내는 대학교육의 시민교육적 성격과 책임이 깊이 인식되고 선명히 부각될 때에만 사회는 물론 사회적 약자들과 최저수혜자들도 대학 등록금을 국고로 지원하는 일의 불평등을 수긍하고 용납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교육(civic education)은 대학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사회에 대해 져야 할 책임을 알게 하는 교육, 대학교육의 혜택을 자기 개인의 영달이나 이익 추구에만 쓰지 않고 그 혜택과 그로부터 얻는 이득을 비수혜자들과도 나누고 공유할 줄 알게 하는 교육, 자기가 선 자리에서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나서고 그 일에 참여하며 그 일에 봉사하는 것을 자신이 추구하는 ‘좋은 삶’의 비전과 동일 궤도에 세울 줄 알게 하는 교육이다. 대학의 사회적 책임은 여러 각도에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시민’(responsible citizen)을 키워내는 일은 대학의 사회적 책임들 가운데서도 첫 번째 자리에 놓여야 할 책임사항이다. 시민은 자유만 외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유와 동시에 책임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런 시민이 사회의 버팀목을 만들고 공동체의 따뜻한 가슴이 된다. 대학교육의 이런 시민교육적 성격과 책임이 깊이 인식되고 선명히 부각될 때에만 사회는 물론 사회적 약자들과 최저수혜자들도 대학 등록금을 국고로 지원하는 일의 불평등을 수긍하고 용납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성이 불가피하다. 등록금 파동의 쓰나미에 밀려 떠내려가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쓰나미를 타고 넘어서는 일이 필요하다. 현행 대학교육은 책임 있는 시민의 양성을 교육의 본질 목적 속에 포함시키고 있는가? ‘시민’에게 요구되는 능력과 덕목들을 함양하고 있는가? 비판적 사고력, 합리적 판단력, 공감의 상상력은 시민의 기본 능력들이고 ‘교육받은 사람’의 정신적·도덕적 기초 장비이다. 대학들은 그런 능력을 길러주기 위한 교육적 설계, 의지, 열정을 갖고 있는가? 학생들은? 상당수 대학생들은 강의실에서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뗄 줄 모른다. 사고력, 판단력, 집중력의 돌이킬 수 없는 파손이 발생하고 있다. 사회에도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지금 대학교육의 본질 목적을 왜곡시키고 공공성을 망가뜨리면서 젊은 세대를 오도하는 최대 세력은 사회의 무자비한 시장제일주의와 경쟁제일주의다. 사실 이 두 가지는 등록금 파동의 쓰나미를 무색하게 하는 거대한 사회적 쓰나미이다. 등록금 논란의 와중에서도 우리는 교육을 납치하는 또 다른 쓰나미─사회적 쓰나미의 파괴적 위험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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