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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Un-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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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서울시장 선거는 생활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원인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굉장히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현상이다.
동반성장위원회를 맡은 뒤 나 자신이 ‘신문고’가 된 느낌이다. 난생처음 보는 분들도 마치 신문고를 울리듯 나를 붙잡고 하소연을 한다. 첨단 정보기술(IT)부터 제과점, 패션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참 다채로운 분야의 중소기업인들이 거의 울먹이며 말한다. “정부에서 유망직종이라 강조해 시작했는데 대기업이 다 잠식했습니다.” “신입사원을 훈련시켜 팀을 만들면 팀 전원을 대기업에서 스카우트해 가버립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생산업’을 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인내와 애국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애국자들에게 아직은 속 시원한 해결책을 드리지 못해 답답할 뿐이다.
세계경제가 침체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재작년의 글로벌 경제위기에 비해 침체의 골은 깊지 않지만 상당히 오래가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리스나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이 바로 그날 오후 한국 증시에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시대에 세계경제 침체는 곧 우리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경제도 이미 하강국면에 들어섰다. 다가오는 도전을 우리 경제가 무사히 헤쳐 갈 수 있을지 안심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소기업과 청년층, 그리고 저소득층이 걱정된다. 이들은 침체가 찾아올 때마다 상대적으로 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비단 경기침체만이 아니더라도 내수 부진, 일자리 부족, 청년실업, 비정규직 문제, 가계소득 둔화, 가계부채 확대 등등의 현안 문제들은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커다란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이 문제들은 지난 정부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시간이 갈수록 구조적으로 고착화되고 있다. 이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중소기업, 청년층, 저소득층의 형편이 나아질 가망성은 별로 없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 국민은 은근과 끈기로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가난 속에서도 강인함을 잃지 않았던 것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믿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현실을 이겨보려 애썼다. 그런데 아이엠에프(IMF) 위기와 카드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인의 강인함은 점차 사라졌다. 어려움이 닥치면 끝내 견디지 못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이혼하며 자살한다.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희망이 사라진 곳에 분노가 찾아왔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2040세대’의 분노가 선거 결과를 갈랐다. 여태까지 혼자 삭여왔던 분노를 정치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이를 가능케 해준 새로운 매개체였을 뿐인데 여당은 에스엔에스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을 패인의 하나로 본다. 난센스다. 생활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원인이 내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있고,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굉장히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현상이다. 요즈음 정당정치의 위기를 말하는 정치인들이 있지만, 2040세대의 분노는 정당정치 자체가 아니라 정치인들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만의 싸움터가 되고 있는 지금의 양당 구도가 더 이상 사회적 요구를 담아내지 못한다면 이를 과감하게 해체하는 것도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정치권의 일대 각성을 촉구한다.
경제 양극화는 복지 확대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양극화는 복지가 부족했다기보다 경제가, 특히 중소기업이 활력을 잃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지금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저런 복지정책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지만 성급한 복지 확대가 정곡을 찌르는 해답이 될 수는 없다. 대책을 수립하기 전에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짚어야 한다. 내수가 부진하니 내수를 부양하고, 일자리가 부족하니 일자리를 만들며, 청년실업이 줄지 않으니 인턴을 확대하고, 가계부채가 심각하니 대출을 줄이겠다는 식의 단선적 대응은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 경제의 활력을 가로막는 고질적 패러다임에 거대한 전환이 있어야 문제가 풀린다.
어떻게 하면 기업부문, 특히 재벌 기업에 잠겨 있는 여유자금이 여타 부문으로 흘러들어가게 하느냐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 기업은 돈을 빌려 투자를 하고, 기업이 번 돈으로 가계는 소득을 증가시키고 저축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 경제는 저축을 해야 할 가계가 빚을 지고 있고, 투자를 해야 할 기업이 저축에 몰두하고 있다. 경제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이래서는 아무리 성장률이 높아져도 성장의 과실이 기업부문에 고일 뿐 가계로 흘러들어갈 방법이 없다. 1970년대부터 아이엠에프 위기 전까지 기업소득과 가계소득은 평균 8% 정도씩 거의 비슷하게 늘어났다. 하지만 2005년부터 작년까지는 기업소득이 연평균 19%로 대폭 늘어난 반면 가계소득 증가율은 불과 연평균 1.6%밖에 되지 않았다. 기업부문에서 돈이 나오지 않으니 가계가 죽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가계소득 둔화와 부채 확대, 내수 부진, 일자리 부족, 청년실업,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결정체인 경제 양극화는 끊임없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선봉장으로 나서서 외국에서 공사를 따오고, 몇가지 업종을 골라 집중 육성한다고 해결될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의 인센티브 체계를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는 엄청난 작업,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새는 구멍을 틀어막고 새로운 물꼬를 트는 작업을 수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해야만 거대한 물길이 방향을 돌릴 수 있다. 세제, 예산, 산업정책, 금융정책 등 경제정책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고칠 점이 너무나 많다. 사법부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제도와 관행 그리고 사고방식이 달라져야 패러다임이 바뀐다.
동반성장위원회의 목적도 경제 패러다임 전환에 있다. 한마디로 “대기업의 것은 대기업에, 중소기업의 것은 중소기업에 돌리자는 것”이다. 하지만 재벌기업들은 중소기업의 몫까지 차지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몫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자기 몫을 빼앗긴다는 생각에 초과이익공유제나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을 두고 사회주의니 심지어 공산주의니 하며 흥분하고 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몫은 중소기업에 돌려주고, 그렇게 해서 남는 힘과 에너지를 세계와 경쟁하는 데에 사용한다면 국민들로부터 또다시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지 않겠는가.
약자의 몫까지 움켜쥐고 놓지 않는 것은 탐욕이다. 부자가 탐욕스러워지면 가난한 자는 원망을 품게 된다. 건전한 이익추구는 자본주의의 활력이지만 탐욕추구는 자본주의를 해치는 길이다. 자본주의의 기본정신은 오히려 절제에 있다. 이익추구는 장려하되 탐욕은 억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로 자본주의 정신을 설명했다.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의 문제점은 이익 극대화만을 말하고 ‘윤리’를 말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불우이웃 돕기, 장학사업, 자선활동을 많이 하는 것이 윤리경영의 전부가 아니다. 중소기업의 몫을 차지하면서까지 돈을 벌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시급하고도 중요하다. 대기업은 다만 대기업의 역할을 잘해주기 바라는 것이다. 중소기업이 못하는 투자와 이노베이션을 통해 세계와 경쟁하여 돈을 벌어오는 일이다. 개발연대 이후 재벌의 역할이 그랬다. 재작년 세계적 금융위기 때에도 대기업들은 예상 밖의 선전을 했고 우리 경제의 추락을 막는 버팀목이 되었다. 우리 국민들은 이 점을 충분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재벌에 대해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제부터는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중소기업의 몫은 중소기업에 돌려주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남는 힘과 에너지를 세계와 경쟁하는 데에 사용하여, 우리 경제를 다시 한번 힘차게 이끌어 준다면 국민들로부터 또다시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지 않겠는가.
어디까지가 대기업의 몫이고 어디부터가 중소기업의 몫인지는 상식적으로도 얼마든지 판단이 가능하다. 전체 기업 수의 99%, 전체 근로자의 88%를 차지하는 중소기업한테 그들의 정당한 몫이 흘러들어가도록 한다면 가계소득도 그만큼 더 늘어날 것이며, 가계소득이 늘어나면 내수가 확대되고, 일자리가 더 늘어나 청년실업도 완화될 수 있다. 가계가 빚을 내야 할 필요도 줄어든다. 경제 양극화도 자연스럽게 해소되어 우리 경제의 왕년의 역동성도 되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2040세대의 분노도 조금씩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다.
동반성장만이 우리 경제의 유일한 탈출구라는 믿음 하나만을 붙잡고 지난 1년 동안 예산도 인력도 권한도 없는 동반성장위원회를 꾸려왔다. 가장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야 할 정부는 대통령의 진의를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은 동반성장하라고 하는데 대통령을 모시는 사람들은 비협조적이다. 정부가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다른 데에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99%인 중소기업과 청년층, 그리고 저소득층이 분노의 화살을 꺼내기 전에 정부와 대기업이 그들의 분노의 목소리라도 제대로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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