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5.23 19:13
수정 : 2013.06.1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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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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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처럼 살아야 하는 상태를 벗어
나기 위해 정치사회를 조직했는데 그
결과가 여전히 ‘늑대사회’라면 애당초
정치사회는 왜 구성하고 국가는 왜
만들고 공동체는 왜 일구었는가?
“나는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 쌍둥이의 하나는 나이고, 다른 하나는 공포다.” 17세기 영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말이다.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자유롭게 살기를 포기하고 왜 공동체니 국가니 하는 정치사회로 이행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홉스 시대 정치사상가들이 몰두했던 화두의 하나다. 물론 그 화두는 지금도 사회·국가·정치질서의 필요성을 생각해보도록 학생들을 유도할 때 교수들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기본 질문의 목록에 올라 있다. 잘 알려져 있듯 홉스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옮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공포’다. 무슨 공포? 자연상태에서 사람들은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그 자유가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지는 않는다. 생존을 위해 서로 다투어야 하고 약자는 강자의 폭력을 피할 길이 없다. 생명·재산·행복의 어느 것도 안전하지 않다.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다. 만인을 상대로 한 만인의 투쟁이 불가피하고 무질서가 평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공포란 바로 그런 무질서에 대한 공포다.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자면 절대적 권위를 가진 권력 주체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그 절대적 권력 주체에게 자유를 반납 혹은 양도하고 거기 복종할 때에만 질서·안전·평화가 가능하다. 홉스가 주장한 그 절대권력의 주체는 국가다.
민주주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홉스의 정치철학은 ‘웃기는 이야기’ 한 토막 같은 데가 있다. 존 로크나 장 자크 루소 같은 이들이 근대 민주주의 이론의 단골 참조 지점으로 대접받는 동안 홉스 이론은 ‘괴물’ 비슷한 것으로 여겨져 왔는데, 이유는 그의 사상이 지닌 비민주적 성격에 있다. 그러나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면 홉스의 주장에서 참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는 ‘공포이론’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생존의 공포로부터 누가 자유로운가? 누가 안전한가? 누가 평화로운가? 지금의 한국인들 가운데 공포의 쌍생아 아닌 사람이 있는가? “나는 두렵지 않고 억울하지 않고 서럽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누군가의 표현대로 우리는 하나같이 ‘철봉신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철봉에 대롱대롱 매달려 추락의 순간을 조금이나마 늦추기 위해 버둥거려야 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가 아니다”라고 품위 있게 말할 여유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둘째로 참조할 만한 것은 ‘무질서 이론’이다. 인간은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치사회를 구성하게 되었다고 홉스는 말했는데 현대 문맥에서 뼈아프게 성찰할 것은 홉스의 정치사회 기원론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주장이 제기하는 역설적 질문이다. 늑대처럼 살아야 하는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정치사회를 조직했는데 그 결과가 여전히 ‘늑대사회’라면 애당초 정치사회는 왜 구성하고 국가는 왜 만들고 공동체는 왜 일구었는가? 민주주의의 용도는 무엇인가? 민주주의 정치질서가 사회의 밀림화를 막아내고 무질서의 공포를 다스리게 되었는가? 사회가 정글이 될 때 그 공포사회를 고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어떻게 고칠 것인가? 더 많은 늑대들을 풀고 너와 내가 모두 늑대가 되어 늑대의 방식으로 밀림을 탈출한다? 민주주의 정치가 밀림화 사회를 교정할 수 있을 것인가? 로크·루소 같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의 뒤통수를 치는 홉스의 조롱조 웃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나는 지금 홉스 사상을 지지하기 위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신장하고 정치권력의 횡포를 제어하는 데 웬만큼 성공한 것은 근대 자유주의의 공로이고 민주주의의 성취다. 그러나 권력에는 정치권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세계에서 정치권력을 압도하는 것은 경제권력이고 시장의 권력이다. 애덤 스미스 식의 경제자유주의가 경제활동의 자유를 확장하는 데 기여하는 동안 그 경제적 자유로부터 초래된 경제권력의 횡포를 막아내지 못한 것은 지난 200년간의 정치자유주의의 실패이고 그 실패의 고통을 톡톡히 당하고 있는 것이 현대 사회다.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확장함과 동시에 정치권력의 독단을 제어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질서다. 그러나 제어되어야 하는 것은 정치권력만이 아니다. 경제권력도 사회적으로 통제되고 제어되어야 한다. 경제권력의 횡포를 막아낼 유효한 사회적 통제 수단이 없을 때 사회는 밀림이 되고 국민 모두가 생존의 위협 앞에 덜덜 떨어야 하는 공포사회가 된다. 지금 한국인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공포사회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나는 통제경제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권력의 폭력화’를 제어할 사회적 통제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경제활동의 자유와 경제권력의 폭력화는 완전히 별개 문제다.
그런데 경제권력을 제어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정치권력의 전횡을 막아내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질서라면 경제권력의 횡포를 제어하는 것도 민주주의 ‘정치질서’의 책임인가? 그렇다. 우리 사회의 문맥에서 그 제어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은 정치의 책임이다. 그것도 정치의 부차적 방계적 책임이 아니라 ‘핵심적’ 책임이다. 지금 한국인의 삶이 절실히 요구하고 있는 것은 경제권력에 대한 사회적 통제다. 이 통제야말로 우리 사회가 모처럼 의제화한 ‘경제민주화’의 진정한 목표여야 하고 실질적 내용이어야 한다. 경제민주화란 경제질서를 정치질서화하는 일, 달리 말하면 경제질서를 민주적 정치질서의 일부가 되게 하는 일이다. 정치 따로 경제 따로의 방식으로는 경제민주화가 불가능하다. 경제민주화는 정치에 의한 경제 장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질서를 사회질서의 핵심부 속으로 위치시키고 경제권력의 폭력화를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일이다.
경제권력의 횡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의 하나가 이른바 ‘갑의 횡포’다. 근대적 개념에서 갑을관계란 계약관계이지 지배/복종의 권력관계가 아니다. 누구나 갑이 되기도 하고 을이 되기도 하는 것이 경제활동에 필요한 계약관계다. 이 관계를 비틀어 우열과 서열, 지배와 복종, 영원한 갑, 영원한 을의 권력관계로 고정시키는 것은 봉건적 사회질서이지 민주주의 시대의 사회질서가 아니다. 전근대적 봉건질서를 민주주의 사회질서로 바꿔내는 일은 경제민주화의 필수적 절차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경제질서는 불가피하게 정치적 질서의 일부다.
경제질서를 바꿔내는 일이 민주주의 정치의 책임이 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국가의 책임임과 동시에 시민의 책임이라는 사실에 있다. 시민은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권리를 갖고 있고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다. 시민은 국적에 따른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시민인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권리와 책임이 ‘시민성’의 핵심이다. 시민은 국가나 정치권력이 민주주의 질서를 지키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고 국가권력이 그 질서를 파괴할 때에는 거기 저항할 권리를 갖고 있다. 로크가 시민의 권리 속에 저항권과 혁명권을 포함시킨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마찬가지로 시민은 그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경제적 조건의 형성을 국가와 정치권력에 요구할 권리가 있고 스스로 그런 조건을 만들 책임을 지고 있다. 그는 경제정의의 수동적 수혜자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영원한 을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그 자신 갑이 되기도 해야 하는 경제주체다. 갑의 위치에 설 때, 그는 자기 손으로 만드는 갑을관계가 공정성의 원칙을 준수하는 것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민적 덕목이며, 그 덕목을 발휘할 때에만 그는 ‘책임 있는 시민’이 된다. 책임 있는 시민은 타율에 지배되지 않는다. 그는 자율성의 원칙 위에서 판단하고 행동한다.
인간이 정치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이유는 정치사회가 상생의 질서를 만드는 데 불가결의 것이기 때문이다. 상생의 질서가 사회정의다. 각자도생의 공포사회를 벗어나고자 할 때 사회정의는 정치의 목표이고 정치의 선(善)이 된다. 상생은 그 정의의 원칙이며 그 원칙을 향한 열정과 의지가 정치다. 경제민주화가 정치적 과제가 되는 이유다.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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