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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20 19:09 수정 : 2013.06.20 19:09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

어떤 이는 가장 높은 차원의 희망
은 극복된 절망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전에 여기에 아직 정치가 있다면,
그것이 새 정치든 아니든, 지금 여기
의 절망에 응답하라!

“안철수 싱크탱크 ‘진보적 자유주의’ 공식제시”라는 제목 아래 어제치 <한겨레> 6면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안철수 무소속 의원의 싱크탱크인 ‘정책네트워크 내일’이 19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창립 심포지엄을 열고 ‘안철수 새 정치’의 핵심 기조로 진보적 자유주의를 제시했다.” 이어서 최장집 이사장의 “‘진보적’의 의미는 신자유주의의 시장근본주의 원리와 그로 인한 양극화와 불평등을 민주적 방법으로 개선하려는 것”이라는 말을 전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기대와 궁금증을 품게 했던 안철수의 ‘새 정치’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미 충분히 봤다는 느낌이, 그것도 흐릿하지 않고 또렷하게 드는 것은 나만의 일일까?

손학규씨가 십여년 전에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에서 빌려와 자신의 버전으로 내놓았던 게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이어서만이 아니다. 한국의 노동계는 외환위기 직후 집권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주장했던 김대중 정부에 대한 “만델라인 줄 알았더니 대처더라”라는 평가와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곱씹어야 했다. 그렇다면, 새롭게 대안정당을 모색한다면서 내놓은 진보적 자유주의는 김대중 정권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나 노무현 정권의 ‘좌파 신자유주의’와 어떻게 다른가. 특히 배제된 노동자들의 처지에서 어떻게 다른가. ‘포함된 자’에서 ‘배제된 자’로의 일방통행밖에 허용하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칼날 앞에서 노동자들에겐 굴종만이 생존의 길로 남아 있다. 그것은 최근에 자살로 삶을 마감하면서 자발적 굴종의 밑바닥을 기고 있는 노동조합의 참담한 상황을 고발한 케이티(KT) 노조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양극화와 불평등을 민주적 방법으로 개선한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오늘 신자유주의 지배질서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서 양극화와 불평등을 개선한다는 주장은 정치의 언어이기보다 권력이나 지배를 위한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위험사회론>으로 잘 알려진 울리히 벡은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유로화의 위기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면서 메르켈의 정치적 술수를 마키아벨리에 빗대어 ‘메르키아벨리 모델’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밖으로는 잔인할 정도의 신자유주의를, 내부에는 사회민주주의를 강조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유로화 지역만의 일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아랫목이 따뜻해야 윗목도 따뜻해진다”는 적하효과를 주장하지만 윗목으로 가는 것은 따뜻함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게 끊임없이 전가되는 고통과 절망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대에 정리해고법, 파견법, 비정규직법이 통과되면서 한국 사회에서 노동의 분할과 배제는 가속화됐다. 그 법들은 진보 또는 좌파라고 자칭하는 자유주의 세력이 앞장섰기에 더 별 저항 없이 관철되었다. 그렇게 노동의 분할과 배제를 공식화한 것이 사회에 끼칠 가공할 만한 결과에 대해서 그들이 미리 알고 있었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예컨대 비정규직 ‘보호’법이 ‘보호’ 아닌 ‘양산’을 낳은 실제적 결과 앞에서 ‘보호’를 강변했던 이들 중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그들에게 선의의 정치보다 권력, 지배의 욕망이 더 컸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묻고 싶은 것은 이른바 ‘새 정치’의 핵심 기조로 표방된 진보적 자유주의가 지금 여기서 거리에 내쫓기거나 생존의 기로에 선 프레카리아트들에게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지금 여기 펼쳐지는 ‘비참한 세계’의 고통과 절망 앞에서 응답하지 않는 정치는 정치라고 할 수 없다.

앙드레 고르가 벌써 1980년에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에서 지적했듯이, 노동(자)의 지위는 자동화·정보화·인공두뇌로 무장한 기계 앞에서 일자리를 잃으면서 기계에 비해 주변화·종속화되는 자리로 밀려나는, 이중으로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완전고용이나 숙련노동이 빠르고 정교한 기계한테 밀려날 때, “지배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 노동자들이 다른 경제적 합리성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대신 아주 희소한 일자리를 놓고 자신들끼리 다투게끔 만들 것이다. 실제로 실업은 단지 세계적 위기의 결과인 것만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기업 내에 복종과 규율을 정립할 수 있게 하는 무기다”라고 경고했는데 그의 경고는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새로운 노동사회 환경 앞에서 유럽의 전통 좌파정치세력은 “노동자들이 다른 경제적 합리성을 위해 함께 투쟁”하도록 이끄는 정치 대신 권력과 지배의 길을 택했다. 기계가 대신 일하기 때문에 강제된 노동에서 해방된 인간에게 새 가능성으로 다가온 기존 사회체제의 근본 변화를 두려워했던 것은 보수세력만의 일이 아니었다. 특히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면서 이념 지향을 왼쪽으로 당겼던 외부 힘마저 사라지자, 그들은 득표를 위해 거리낌없이 중도를 지향한다. 중도로 갈수록 득표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우파는 우파대로 중도를 지향하여 좌우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중도 수렴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권력 장악이 목표임을 솔직히 드러내는 대신 이념을 표방한다. 그것이 영국 신노동당의 ‘제3의 길’이었고 프랑스 사회당 우파의 ‘사회적 자유주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수용하는 것인데, 신자유주의의 시장 과잉이 낳은 양극화와 불평등을 완화하는 국가의 역할이 바로 그들이 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반의 정치에서 배제된 하층 노동자들과 서민들이 극우이념에 휩쓸리게 됐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렇게 유럽에서는 이미 흘러간 옛 노래에 속하는 ‘제3의 길’이나 ‘사회적 자유주의’가 오늘 여기서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새 정치’의 핵심 기조로 등장한 것이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태로 24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이 이 세상을 등졌다.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 후보 시절 공약했던 국정조사를 실시하는 대신 대한문 분향소조차 용인하지 않고 김정우 지부장을 구속했다. 정치가 사라진 자리에 권력의 지배만 남아 있는 것이다. 정리해고의 근거가 된 회계감사 문서에 담당자와 책임자의 날인도 없는 황당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을 뭉개고, 선거 전에는 그나마 관심을 보였던 민주당도 선거가 끝나자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최근에 스페인의 열쇠공과 소방서원들은 주택담보대출금을 갚지 못해 쫓겨나게 된 집의 문을 열어 달라는 채권자 은행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한다. 심적 갈등 때문에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단다. 맹자님은 수오지심과 측은지심을 인간의 조건으로 꼽았는데, 수오지심도 측은지심도 찾기 어려운 곳, 인간성이 실추된 곳에서 정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지금 정치가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은 차라리 대한문이다. 매일 오후 6시30분에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 사태의 조속한 해결과 이 땅의 해고노동자를 위한 매일 미사”를 연다. 오늘 저녁 미사에 참석하는 분들은 “사람아, 희망이 되어라”라고 적힌 회람지 밑에서 다음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흥국생명 3062일, 코오롱 3042일, 영남대의료원 2351일, 콜트콜텍 2333일, 재능교육 2010일(종탑 136일), 쌍용자동차 1493일, 3M 1488일, 대우자동차판매 880일, 골든브릿지 425일, 현대차 철탑농성 248일, 강정 해군기지 반대 7년째, 밀양 송전탑 반대 8년째, 용산참사 발생 1614일째, 대학강사 지위회복투쟁 2114일.”

어떤 이는 가장 높은 차원의 희망은 극복된 절망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전에 여기에 아직 정치가 있다면, 그것이 새 정치든 아니든, 지금 여기의 절망에 응답하라!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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