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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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내 짧은 영어로 이 책을 우리말
로 옮기자고 작심한 것은 … 매우 절박
한 현실적 공포감 속에서였다. 권력의
전유화를 시작한 군사 정부가 ‘기관원’
을 신문사에 파견하여 감시하며 지식
사회를 헤집고 영장 없이 연행하여 무
자비한 고문을 가하는 ‘남산 기관원’의
횡포가 주는 공포감으로 짓눌리며 이
미래소설이 고발하는 암울한 폭력의
예감에 전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국가안보국(NSA)과 영국 정보통신본부(GHCQ)가 신구 대륙을 잇는 광케이블을 통해 지난 1년6개월 동안 6억건의 전화 통화, 3900만기가바이트의 인터넷 전자우편과 접속기록을 도·감청했다고 한다. 두 나라 정부는 이를 위해 550명의 요원을 전속 배치했는데 <가디언>은 이들이 매일 도·감청한 정보량은 대영도서관이 보유한 정보 총량의 192배에 해당한다며 그것이 “광케이블로 연결된 모든 형태의 정보를 빨아들여 세계 인터넷 사용자 20억명의 일상을 감시했다”고 지적했다. 이 사태를 보도한 <한겨레>는 이 기사에 “베일 벗는 미·영 ‘빅 브러더’ 동맹”(2013년 6월24일치)이란 제목을 붙였다. ‘빅 브러더’라니, 나에게는 이 말과 그것의 출처인 <1984년>에 관심과 회포가 많다. 1948년에 완성되어 이듬해 출간된 오웰의 이 소설을 나는 1968년에 번역했다. 내 짧은 영어로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자고 작심한 것은 중학생 때 읽은 ‘현대명작 <1984년>’(이 책의 역자 ‘羅萬植’(나만식)의 신분도 궁금하지만 영국에서 출판된 지 1년도 안 된 1950년 3월15일자의 ‘譯者小記’(역자소기)가 쓰일 정도로 매우 신속하게 번역·출판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다)이 안겨준 그 괴기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매우 절박한 현실적 공포감 속에서였다. 권력의 전유화를 시작한 군사 정부가 ‘기관원’을 신문사에 파견하여 감시하며 지식사회를 헤집고 영장 없이 연행하여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는 ‘남산 기관원’의 횡포가 주는 공포감으로 짓눌리며 이 미래소설이 고발하는 암울한 폭력의 예감에 전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원히 임재(臨在)할 것 같지 않던 ‘1984년’에 끝내 마주쳤을 때, 그 전율감마저 만성화되어 나는 그 실재조차 시들해하고 있었다. <1984년>을 번역하던 16년 전의, “갓난아이를 옆에 누이고, 춥고 바람이 드센, 그래서 더 어둡고 썰렁하게 느껴지던” 밤을 회상하며 나는 “오지 않기를 헛되이 갈망했음에도 1984년은 우리 앞에 어김없이 다가서 있다”고 한숨 쉬었다. 그리고 정치·사회적으로, 과학 기술과 군대·사찰의 힘들을 통해 어떻게 시민들을 정탐하며 불령(不逞)분자를 감시하는지 짚어보았다. 빅 브러더는 여전히 억센 정보력으로 우리를 면밀하게 훑어보며 손짓 눈짓 하나 놓치지 않는 듯 그 정보의 힘과 기술은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러시아만 아니라 가장 자유로운 미국과 서구에도 마찬가지로 편만해 있는 세계적 현상으로 보였다. 내 비관적 예상은 희생자 하나하나를 치열하게 추적한 김원일의 연작소설 <푸른 혼>에서 폭로한 인혁당 사건으로 그 가혹한 실제가 확인되었지만, 가령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보는 폐회로텔레비전(CCTV)과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뒷골목의 범죄나 교통사고를 조사하는 데 이 폐회로 카메라가 매우 적극적인 해결사가 된다는 사실을 반가워하고 이 감시 시스템의 장점을 크게 인정하면서도, 외출해서 대중교통으로 시내를 돌아다니며 일을 보고 귀가하기까지 30여 차례 그 화면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끔찍하기 이를 데 없어졌다. 내가 언제, 어디에 있든 누군가로부터 감시당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라. 그것은 내 생활에서 나만의 사적 공간을 유리 천장 속으로 차압하고 내 존재의 독자성·은밀감을 지워버린다. 나는 그야말로 ‘대중 속의 고독’이 아니라 ‘공중 완전 노출’ 당하는 존재였다. 10년 전쯤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미남 배우 톰 크루즈가 주연하며 미래 사회의 ‘빅 브러더’적 양상을 보여준다. 그는 갖가지 수단을 통해 채집한 자료로 범죄를 저지를 인물을 사전에 처치하는 기관원이다. 그가 예방을 맡은 이 ‘예측 범죄’(인터넷에는 ‘프리크라임’(precrime)으로 적혀 있다)는 오웰의 <1984년>에서의 ‘표정죄’(facecrime)에 해당될 것으로 주인공은 시민들의 말·편지·표정 등 모든 걸 정보로 수집해서 잠재적 범죄를 미리 탐지하고 그를 처리함으로써 사태를 사전 방지하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이 수억 인구의 메일과 전화를 감청할 명분이 이 예측 범죄(혹은 표정죄)를 방지한다는 데 있었다. 미국 전직 기관원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신문이 시끄러울 때 나는 마침 오웰의 ‘악몽’을 대변하는 두 어휘를 뜻밖에 두 권의 경제학 도서에서 발견했다.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로 ‘1%에 의한, 1%를 위한, 1%의 월가’의 점령을 외친 스티글리츠의 최근작 <불평등의 대가>와 케인스주의 경제학자인 아버지와 철학자인 아들의 공저인 스키델스키 부자의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에서였다. 앞의 책은 미국 국민들의 엄청난 소득 격차를 고발하며 더욱 심화되는 미국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할 것을 강조하는 문제작인데 그 제6장 표제가 ‘현실로 다가온 1984’이다. 그러나 이 부분의 본문에는 <1984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상위 1%’가 발휘하는 여론 조작의 힘을 지적하고 여기에 속아 넘어가는 것을 ‘세뇌’ 혹은 ‘선전’이라고 부르며 이들이 “불평등을 용인하는 태도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 도구, 자원 그리고 유인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빅 브러더’가 우리 위에 엄연히 군림하고 있음을 깨우쳐준다. 두 번째 책에 나오는 오웰의 용어는 ‘빅 브러더’ 단 하나인데, 토머스 모어가 꿈꾼 유토피아의 삶을 위해 엄격한 시민 통제를 가하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모두 당신을 눈여겨보고 있다. 그래서 당신이 당신의 작업을 감당해내도록, 또 그렇게 하여 당신의 여분의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도록 강요당”하게 하는 주체로서, 자상한 형님 같지만 사실은 거대한 감시자인 통제의 실체를 밝혀준다. 이 책들에서 본 ‘1984년’과 ‘빅 브러더’는 오웰의 절대 권력의 전횡이란 이미지나 톰 크루즈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처럼 정치권력의 간섭으로 설정되지 않는다. 그런 때문에 더 두려워지는 것은 ‘빅 브러더’의 속성이 전시대적 ‘절대 폭력’ 시스템으로부터 ‘1%의 경제적 상위층’ 구조로 숨어 버렸다는 점이다. 이들은 무지막지한 고문과 감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글로벌화’ ‘파생 금융’ ‘균형 재정’ ‘조세 완화’ 같은 부드러운, 그래서 쉬 알아챌 수 없는 소프트 네이밍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더한 가난으로 밀치며 자신들의 부를 더욱 크게 늘린다. <불평등의 대가>에 해제를 쓴 선대인에 의하면 2011년 국내 상위 1%의 평균 소득은 중위소득의 15.1배지만 과세 면제자를 포함하면 22.6배다. 스티글리츠는 2007년 미국의 상위 0.1%가 하위 90% 가구의 평균 소득보다 220배 많고 상위 1%가 국부의 5분의 1 이상을 소유한다고 폭로한다. 인구의 1%가 국가 경제를 독과점할 뿐 아니라 ‘부익부 빈익빈’의 더욱 참담한 세계로 ‘빅 브러더’의 숨은 만행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웰의 악몽’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소설 속의 ‘빅 브러더’가 스탈린 전체주의 권력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오늘의 ‘빅 브러더’는 개방된 민주 국가 체제의 사찰 기관이라는 점이다. <1984년>의 윈스턴 스미스가 고문과 세뇌로 독재체제를 승인하고 빅 브러더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달리, 자발적 내부고발자인 스노든은 미국을 탈출하여 제3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덕분이리라. 그러나 그 차이란 오십보백보일 뿐이다. 우리는 끝내 ‘빅 브러더’의 손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세계를 정치권력에서만이 아니라 심화된 불평등 경제에서도 2013년의 오늘, 피할 수 없이 만나고 있는 것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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