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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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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진보 쪽 정치인들 가운데 일부
는 무게감이 덜한 것 같다. 쿤데라 소
설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
벼움>과도 같은 몸짓이며 입놀림이다
저명한 진보학자인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얼마 전 진보진영의 분열상을 보고 ‘원점’으로 돌아갔다고 한탄을 했다. 10여년 전 민주노동당으로 기세 좋게 출발하던 것이 분열과 실수를 거듭하면서 이제 국민들의 눈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 그런데 계속 무슨 ‘반성’이니 ‘제휴’니 하기도 하고, 당명을 이리저리 고친다고도 하며, ‘진보적 민주주의’란 주장 등을 제기하기도 한다. 반응은 역시 시큰둥하다.
요즘은 진보정당 운운의 표현을 쓰지만 자유당·공화당 정권 때에는 혁신계(革新界)라 했다. 그래서 농담 삼아 ‘가죽신’이라고도 불렀다.
그때 가장 뚜렷했던 게 죽산(竹山) 조봉암씨의 진보당. 아호처럼 죽순 올라오듯 치고 올라와 두 번의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박사와 겨루고, 두 번째 선거에서는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급서도 있고 하여 엄청난 표를 끌기도 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 대통령이 각의에서 여러 번 거론하는 등 직접 압박하여 죽산을 ‘사법살인’으로 꺾어 버리고 말았다.
그 한 많은 진보당을 두고 두 가지의 상이한 방향의 견해가 있어 그것을 소개하는 것이 오늘날의 진보진영에 참고가 될 듯도 하다.
하나는 죽산 후반기라 할 진보당 때의 간사장을 맡았던 청곡(靑谷) 윤길중씨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산이 농림부 장관 때부터 정치참모를 했던 죽산 전반기의 창정(蒼丁) 이영근씨의 것이다. 창정은 진보당 사건이 일어났을 때, 죽산의 신당 창당 작업을 하다가 권력이 뒤집어씌운 형을 살던 중 병보석으로 병원에 있었는데,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어로 된 일간신문 <통일일보>를 발행하는 등 통일운동에 노력했다.
청곡은 나중에 국회부의장과 민정당 대표위원도 지내 잘 알려져 있지만, 창정은 일반에게 생소할 것이기에 약간 부연설명을 하자면, 그는 연희전문을 나온 뒤 여운형씨의 건국동맹에 참여하였고, 해방 뒤엔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치안대의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좌우합작에 노력하였다. 여운형 피격 사망 뒤엔 죽산과 연결이 되고, 유엔 감시하의 선거가 북한에서 불가능하다면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치러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노선을 따른다.
창정은 진보당이, 그러니까 청곡 쪽이 이끈 당이, 사회민주주의 운운하고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데 불만이다. 그것은 죽산의 본뜻이 아니라 둘 모두 일본 도쿄제국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이동화씨와 그를 도운 신도성씨가 정강정책을 만들며 굳이 그들이 대학에서 배운 바대로 입력한 것이라 말한다. 청곡도 일본 유학 때(니혼대학) 당시 유명했던 가와이 에이지로 도쿄대 교수의 사회민주주의 경향의 사상을 흡수하였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4·19 전의 학생 사회에서는 서울대의 민병태 정치학 교수의 해럴드 래스키 소개가 그의 페이비어니즘 또는 사회민주주의를 유포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최근에 김학준 교수의 민 교수 전기가 나왔다.) 그 당시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사회주의란 용어가 혼용되었다. 그래서 카레라이스냐, 라이스카레냐는 익살로 웃기도 하였다.
1950년대 한국의 상황에서 유럽에서 유입된 외래사상인 사회민주주의가 합당하기나 한 것이냐는 것이 창정의 이의제기다. 그때는 농민이 8할 정도이고, 공업은 아직 초기 단계여서 노동계층도 얼마 되지 않았다. 따라서 양곡의 자급자족과 함께(창정이 특히 강조했다) 민족경제의 자립을 내세우며 전래의 사상대로 대동사회 실현을 말하였다면 되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물론 북진통일이 아닌 평화통일과 함께.
그런데 학자들 버릇대로 외래사상을 수입하여, 국민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현실과의 밀착도 없이 그리고 정치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사회민주주의 운운을 내걸었다는 비판이다.
둘째는 죽산이, 자유당 정권의 이른바 4사5입 개헌 뒤 반독재 대동단결의 명분으로 조병옥·김준연씨 등과 대립하여 한민당계 본류에서 갈라져 나온 동암(東庵) 서상일씨와 어찌했든 손을 잡았어야 했다는 것이 창정의 조직원리상의 주장이다.
만약에 죽산 직계로 주도세력인 함경도 중심의 이른바 약수동파(윤길중·이명하·김기철씨 등등)가 끝내 반대한다면 그들을 쳐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때의 정당정치는 완전히 지도자 인물 중심이었다. 오랜 뒤 김영삼·김대중·김종필씨 등 3김 시대도 있었는데, 죽산의 시대는 더더욱 지도자 중심의 정당정치였다.
그때 약수동파(죽산이 사직동 다음 약수동에 살아서 거주지에서 딴 이름)는 똘똘 뭉쳐 동암을 배격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한민당 출신이라고 ‘보수반동’ 운운 망신을 주기도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만약에 죽산이 동암과 손을 잡았더라면 한민당 8총무 가운데 한명이며 ‘경북의 프린스’ 호칭을 받던 동암의 존재로 하여 자유당 정권이 감히 죽산을 ‘법살’하지는 못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생각도 있는 것이다. 동암계는 그 후 민주혁신당(민혁당)을 만들고 이동화·고정훈·안정용(안재홍씨 아들)씨 등이 참여한다.
창정은 제2대 국회에 청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을 때 “1일3식 완전보장”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죽산이 지원연설을 했다. 1950년의 빈곤한 상황에서 아마 사회민주주의 운운보다는 그 실제적인 선거구호가 유권자들에 먹혔을 것이다. 비록 낙선은 했지만.(그의 친형인 이만근씨는 청주 외곽인 청원에서 한민당계로 제헌국회에 당선.) 그만큼 그는 현실적이었다. 허황된 이론이 아니고 삶에 밀착한 정치논리였다. 요즘 와서는 의료보장을 말하고, 교육보장까지도 내세우기도 하는데 1950년에 ‘의식주’ 가운데 식(食)을 완전 보장한다는 그럴듯한 공약이었다. 현대에는 ‘의식주’뿐 아니라 ‘의식주+의(醫)·교(敎)·행(行·교통)’이다.
청곡의 자서전을 보면, 5·16 쿠데타 때 반혁명으로 몰려 형무소 생활을 하던 R대령이 감방 동지인 청곡과 오랜 대화 끝에 청곡의 정치노선을 충분히 이해하고 지지하게 되며, 그런데 분단 한국에서 왜 사회민주주의 운운하는 이데올로기를 굳이 내세웠느냐고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실제 정책은 이해할 만한데 그 이데올로기 때문에 국민과 멀어졌고 또한 독재정권 쪽에 탄압의 빌미를 주었다는 것이 R대령의 판단이다.
죽산 진보당을 놓고 드러난 두 가지 상이한 견해는 지금도 얼마간 참고가 될 것 같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서, 말하자면, 하나의 작업가설이다. 불변의 진리가 아니고 이론적 도구라는 이야기다. 그 적용에서는 끊임없이 수정을 거듭하게 된다. 밥 먹듯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시간에서 볼 때 모델과 프레임을 바꾸어 나가고 심한 경우에는 패러다임까지도 바꾸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백성을 위하여 해결하여야 할 문제들과 직접 씨름을 하는 것이다. 실업대책은 어떻게, 저하하는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은 어떻게, 경제발전의 바람직한 방향은, 재벌 개혁은 어떻게, 빈부격차의 심화와 그 점진적인 봉건적 구조화는 어떻게, 다시 연탄가스처럼 스며드는 정보·공작정치에 대한 대응은, 남북한 평화 구축을 위해서는… 등등 구체적 문제에 실제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나중에 그러한 노력들의 흐름을 평가하여 혹은 사회민주주의라고도, 진보적 자유주의라고도, 진보적 민주주의라고도 엉뚱하게는 신·홍길동 사상이라고도 명명하려 할 것이다.
요즘 진보 쪽 정치인들 가운데 일부는 무게감이 덜한 것 같다. 밀란 쿤데라 소설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도 같은 몸짓이며 입놀림이다. 거명하지 않아도 얼굴들이 떠오를 줄 안다. 디지털 시대여서 그런가. 진보정치인들도 역시 묵직한 인품을 갖추어야 한다고 여긴다.
최근에 한 유명 학자의 전기물을 읽다 보니 “도덕성이 높은 좌파와 사려가 깊은 우파가 아쉽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적절한 말이라 생각한다. 도덕성이 높은 좌파-전날에 접촉했던 혁신계 인사들은 비교적 그러한 듯했다.
남재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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