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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1 19:02 수정 : 2013.08.01 19:02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

치열한 경쟁게임에서 팔꿈치로 이웃
을 밀어내며 눈부신 모습으로 승리
한 자에게 ‘괴물’ 또는 ‘괴물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되면서, 각자는 괴물이 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실제로 괴물이 되어간다

“잘 먹고 잘살아라… 그게 왜 욕이야?”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프랑스말로 “bien manger, bien vivre”(비앵 망제, 비앵 비브르)로 옮겨 생각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잘 먹고 잘살아라”는 욕이 아니었다. 그 말에서 남이야 어찌 되든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이기적이고 추한 탐욕의 의미를 읽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미식가라는 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땅에서 자란 아이들은 한국에서 그렇게 그럴듯한 덕담을 주고받는 줄 알았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박정희 정권 시절 사람들의 귀를 따갑게 했던 “잘살아보세!”의 앞에는 “우리도 함께”라는 구절이 있었다. 아이엠에프 환란 이후 사람들은 인사말로 “부자 되세요!”를 주고받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구호는 어쨌거나 ‘우리’를 불러내고 있는데, “부자 되세요!”가 은근히 권유하는 것은 ‘당신만’이라는 개인이다. 국가권력의 동원과 훈계의 대상이었던 우리는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자본의 무시무시한 훈시 앞에 홀로 선 개인들이 된 것이다. 국가의 폭력 앞에서 함께 떨며 자유를 외쳤던 존재들은 정치적 자유를 얻었지만 자본이 부추기는 욕망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물적 조건으로 규정되는 존엄과 비존엄 사이의 경계 앞에서 ‘경제적 공포’의 포로가 된 개인들에게 “잘 먹고 잘살아라”는 “부자 되세요!”와 다른 의미를 품을 여지가 없어졌다. ‘놀부’라는 이름이 들어간 식당이 성업할 때, ‘흥부’라는 말은 자기계발의 경쟁에서 패배한 잉여적 존재의 자기 위안의 언어로도 사용되지 않는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숙련의 뜻을 제외하면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 십상인데, 그 숙련조차 자본은 자동화와 정보화를 갖추면서 더는 바라지 않게 되었다. 다른 한편, 노동하는 인간은 자칫 나쁜 것에 익숙해지면 더 나쁜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고, 좋은 것, 소중한 것에 익숙해지면 새로운 것, 다른 것을 찾아 나서면서 간직하고 있던 좋은 것, 소중한 것을 소홀히 하고 외면하고 마침내 상실하게 된다. 우리가 상실한 것 중 하나로 ‘이웃에 대한 상상력’을 들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웃에 대한 상상력이 충분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부족하지만 그나마 있었던 것마저 상실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급기야 치열한 경쟁게임에서 팔꿈치로 이웃을 밀어내며(강수돌, <팔꿈치 사회>) 눈부신 모습으로 승리한 자에게 ‘괴물’ 또는 ‘괴물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되면서, 각자는 괴물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실제로 괴물이 되어간다. 이를테면, 백혈병으로 쓰러진 가족(삼성가족!) 앞에서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는 삼성은 괴물적 경쟁력을 가진 괴물이라고 부를 만하다. 외국의 한 기자가 지상 최고의 거대한 괴물에게서 공포를 느낀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마르틴 뷜라르 ‘삼성, 공포의 제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 7월호)

그런데, 아니 그럼에도 여기에 아직 사람이 있다. 아니, ‘여기’에 있지 못해 ‘허공’에 있다. 자신의 일이 아닌 이웃에 대한 상상력으로 허공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우리의 권리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또 이렇게 말한다. “만약 현대차 불법파견 문제가 대법원 판례 기준으로 해결된다면 최소한 기아자동차·한국지엠·르노삼성·타타대우·대우버스 등 완성차 업계와 부품사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회적 기준이 생깁니다. 또 자동차산업과 비슷한 생산방식을 가진 전자·철강·중공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현대자동차 자본이 불법파견을 계속 부정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이 아닌 2016년까지 3500명을 신규로 채용하겠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또 재계가 현대차 자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철탑에 오른 두 사람은 신규 채용에 합의하는 것은 전국 40만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권리를 배반하는 일이라고 온몸으로 말한다. 설령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난 10년 동안 겪어야 했던 형사고발·손해배상·가압류·징계의 고통을 다시 당하더라도 배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철탑에 오르고 양재동 본사 앞에 비닐 한 장 깔아놓고 잠을 청하고 농성을 해도 현대차 자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보름 전에는 박정식 아산공장 비정규직 사무장이 죽음을 택했다. 그는 손해배상 가압류를 당해 생계가 막혀 있었다고 한다. 현대차 자본은 작은 흔들림도 없이 선심 베푸는 듯 신규채용을 말할 뿐이다. 이를 두고 “대승적 결단”이라고 추어올리고 희망버스를 오로지 ‘폭력사태’로 규정하는 대부분의 언론의 모습은 대기업이 주는 광고로 “잘 먹고 잘살아야” 하는 속내를 감추기 위해서도 선정적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적대 감정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정치계는 작게 봐도 40만 노동자의 처지가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정치 사안이건만 이를 외면한 채 가짜 정치의 스펙터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법원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근엄한 표정으로 물러서 있는 듯하고, 불법파견을 수사하겠다던 검찰은 7개월째 세월만 보내고 있는 한편, 정부와 경찰은 희망버스를 문제 삼아 “불법시위 가담자들을 엄정 대응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나에게도 울산 중부경찰서로부터 출석요구서가 왔다. 희망버스 계좌가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서일 터인데 고마운 마음으로 받았다.)

9년 동안 각급 노동위원회와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소송에서 이겨 정규직을 획득한 최병승씨와 비정규직지회 사무국장인 천의봉씨, 두 사람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하나임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다만 불편함으로 다가간다. 민주노총의 신승철 신임 위원장은 “이번 희망버스로 느낀 것은 현대차의 탐욕과, 담장 안에 갇혀서 움직이지 않는 노동자의 양심”이라고 말했다. 누구보다도 현대차 울산공장 노동자들은 철탑을 바라보고 철탑 아래로 출퇴근해야 하는 그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불편할 것이다. 이웃에 대한 상상력이 결여된, 더불어 사는 사회가 아닌 “잘 먹고 잘살아라”의 사회, 그래서 대의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곳에서 불편함은 이웃에 대한 상상력과 대의에의 신뢰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공격성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불편함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서도 그런 행태를 보일 수 있는데 그게 오히려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불편함의 반응은 무감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비난보다 더 두려운 게 ‘생각 없음’과 무관심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을 질책하지 말 일이다. 갈 데가 어디 있는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세상을 등진 노동자와 가족 24명을 위한 대한문 앞 분향소를 빼앗긴 채 길바닥에 누워 있다. 사람들 눈에 보이기 위해, 비명이라도 지르기 위해 지난가을 어느 날 철탑에 올랐는데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다시 여름이 왔는데 세상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때, 유령처럼 된 존재는 바람 앞 나뭇잎처럼 떨리고 흔들린다. “내려갈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 우리가 이곳에 있는 존재 이유를 상실한 상황에서 살아 있는 조합원들만 고생하는 것 같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고 싶었습니다.” “두 눈 감고 희망버스만 끝나면 내려갈까….”

두 사람이 철탑에 오른 지 오늘로 291일째, 천의봉씨는 탈진한 듯 지난번 희망버스 탑승자들 앞에서 발언조차 하지 못했다. “잘 먹고 잘살아라”의 사회는 별일 없이 굴러가는 듯하다. 그래도 우리는 또 희망버스에 오를 것이다. 김학철 선생의 마지막 유언이 떠오른다. “편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인간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하라!”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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