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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8 19:01 수정 : 2013.08.08 19:01

김병익 문학평론가

트위터로 그때그때 짧은 기지를 전
하는 재미도 좋지만, 한 인간의 긴
생애를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작업이야말로 더욱 바람
직한 일이 아닐까. “자서전들 쓰십
시다”고 외치던 이청준과 그것을 환
기시켜주는 정재민의 동의에 내가
재청하는 이유이다

기자는 자신의 보도나 논평의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나’의 정체를 되도록 숨기고 자신의 속내를 감춘다. 그런 기자들의 모임인 기자협회가 발행하는 신문에서 ‘자서전들 쓰십시다’란 제목(<기자협회보> 6월26일치)이 내 눈길을 끌 것은 당연했다. 필자 정재민의 직함은 기자가 아니었지만 그 세계와 생리를 짐작할 만한 정보미디어경영대학원 교수였다. 그는 미국 독서계에서 전기·자서전류가 차지하고 있는 큰 비중을 소개하면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한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칼 번스틴과 밥 우드워드의 회고록 <대통령의 사람들>이 대학의 저널리즘 교재로 사용되는 예를 설명하며 우리의 기자들에게도 “영혼을 담아 진실을 기록하는 자서전들 쓰십시다”라고 제안한다.

이 기고를 읽을 즈음 몇몇 언론기관의 사주나 경영진과 기자들 간에,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대결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나는 당연히 나 자신이 당했던 38년 전의 동아·조선 사태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기고문의 제목 ‘자서전들 쓰십시다’의 이청준 소설도 함께 떠올렸다. 나는 그가 편집자로 일하던 문예지 칼럼을 맡아 우리에게 ‘자서전은 가능한가’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식민지 시대의 친일, 한국전쟁 때의 부역, 자유당 시절의 어용으로 강제된 역사의 점철 속에서 과연 당당하게 자신의 생애를 올곧게 살았거나, 그러지 못하고 입신출세한 과거의 잘못을 정직하게 속죄하며 드러낼 분들이 얼마나 있을까 회의하며, 그런 처지의 우리에게 자서전 쓰기란 과연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유신 시절의 참담한 탄식이었다. 말의 무질서한 유통과 소문이 횡행하는 세태에 저항감을 느끼면서 자서전 대필업자를 통해 허세를 키우는 코미디언의 자서전 써주기를 취소하고 자기 신념을 너무나 당당하게 자부하는 농부의 회고록 집필도 포기하는 이야기를 이청준이 <자서전들 쓰십시다>란 자못 희화적인 제목으로 발표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그러고서 근 40년이 지난 근래 나는 네 권의 우리 저자들의 자서전류 책들을 잇달아 읽었다. 시인 고은의 <바람의 사상>, 영문학자 여석기의 <나의 삶, 나의 학문, 나의 연극>, 이용남(전 한성대 총장)이 쓴 도서관운동가 엄대섭의 전기 <이런 사람 있었네>, 그리고 프랑스문학가로 명실상부한 인문주의자인 정명환의 <인상과 편견> 등이었다. ‘자서전-평전’이라고 했지만, 자신의 성장과 대학교육, 해방과 6·25 후의 학문·예술의 개척 과정을 겸손하게 회고한 책(여석기)과 우리 농촌의 독서운동을 적극 전개해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마을문고 운동가 엄대섭의 열정적인 생애의 기록(이용남)은 이 부류에 들겠지만 20대에서 80대에 이르기까지 읽고 보고 들은 글과 말에 대한 성찰과 사색의 기록으로 정리한 단상의 글(정명환)이나, 유신 시절의 고통스런 일상의 다반사들을 기록한 일기(고은)는 말 그대로의 자서전은 아니지만 ‘나’의 사사로울 수 있는 이야기를 정직하게 연대기적으로 고백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스타일의 자서전으로 읽을 수 있을 듯하다.

내가 픽션에서 논픽션으로, 소설에서 전기로 느리게나마 책읽기를 바꾸어 이른바 ‘언어의 모험’에서 ‘모험의 언어’로 옮겨가게 된 것은 상상보다 더욱 극적인 현실의 모습에 감동하며 그 박진한 삶의 실제에서 인간다운 세상살이를 실감하게 되는 나이에 이른 탓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기나 자서전을 자주 읽기 시작했는데도 그 주인공은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우리에게 전기 문학 작품들이 드문 편이기도 했지만, 그 필자들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 이념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지나치게 경도되어 객관성을 잃고 소문으로 두터워진 선입견으로 주인공을 영웅시하는 일이 잦아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처럼 멀리해 왔던 우리의 전기-자서전들을 한꺼번에 잇달아 읽은 것은 개인적으로 교분이 있는 존경하는 선배들의 자전적 기록이고 그분들의 고백으로 기록된 정직한 생애와 성실한 고백을 통해 한 시대의 어지러움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킨 그분들의 개인적 삶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고은이 젊은 시절 숱한 술 마시기와 원고 쓰기의 1970년대 나날을 매일 기록한 일기에서 시대에 대한 절망과 독재 권력의 횡포에 고통스레 싸운 실제 모습은 옆에서 보아온 바 이상으로 절실했고 내가 젊은 시절부터 늘 경의를 품어온 정명환의 날카로운 사유와 진지한 지성은 이번의 단상집에서 더욱 투명하게 볼 수 있었다. 여석기의 영문학과 연극학에 대한 기여는 가감 없는 우리 대학의 역사와 연극사를 회고하는 것이었고 마을문고를 향해 쏟은 엄대섭의 순수한 열정은 생시의 그에게 보낸 감탄과 감사를 다시 느끼게 했다. 나는 이분들의 고백과 기록을 개인적 기록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우리 현대사, 문화예술사의 한 대목으로 이해하면서 무엇보다 시대가 안겨준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분들의 그 회고들을 죄의식이나 자기기만으로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이력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1920년대 초부터 30년대 초에 출생한 이분들은 친일 행위를 할 나이도 아니었고 부역에 나설 자리에도 있지 않았으며 어용의 대열에 끼지 않았다. 나는 우리 역사가 안길 시대의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분들의 행운을 다행으로 여기며 해방 후의 우리 외국 문학 또는 연극 예술의 개척 과정을 알 수 있었고 투명한 현대 지식인의 성찰과 인식을 음미하며 더불어 폐쇄적인 독재 권력에 대결하는 시인의 양심을 발견하고 보이지 않게 문화 활동을 전개하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난 겸손한 정열을 추모할 수 있었다. 하긴 두어 해 전, 언론인이며 사학자였던 <거인 천관우>의 추모집에서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훔쳐보았고 손세일의 <이승만과 김구>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는 한 가지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으며 그제 본 고미숙의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에서 정약용과 다른 문체를 통해 다른 세계 인식을 보여준 박지원을 새로 발견하기도 했다.

그것들은 자서전을 써도 좋을 나이에 이른 나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들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진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허세 버리고 진솔하며 즐겁게 고백한다면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기도 한 숱한 삶들을 더불어 함께하면 우리 삶의 내용과 부피도 그처럼 다채롭고 풍요해질 것이다. 국립예술자료원이 펴고 있는 ‘예술사 구술자료총서’는 예술가들의 생애를 정리하며 ‘뿌리깊은나무’와 ‘눈빛’이 출판한 <민중자서전>은 이름없는 서민들의 곡진한 삶을 기록했고 요즘의 신문 잡지들도 명사들의 회고록을 연재하고 있다. 그럼 이제, 남의 얘기만 써야 했던 기자들도 취재와 기사 작성의 작업 뒤로 가려진 숨은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 “겪은 설움 다 쓰면 책 몇 권이 될” 이 땅의 숱한 할머니들처럼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의 희로애락들을 들어보면 ‘감동의 온도’도 높아지고 삶의 폭도 늘어나, 우리 삶과 내면의 경험 모두에 그만큼 크고 아름다운 자산이 될 것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웹진이나 개인 사이트로 자기 글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도 있고 활자시대의 문턱 높은 출판사를 거치지 않는 1인 출판도 가능해졌다. 독자들도 필자가 유명인이라 해서 현혹되지 않고 감수성만 잘 건드려주면 무명인의 고백에도 크게 공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시대는 왜곡을 강요하는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타인의 삶이 정직하고 즐거운 것이면 함께 누릴 여유도 갖추었다. 그러니, 트위터로 그때그때 짧은 기지를 전하는 재미도 좋지만, 한 인간의 긴 생애를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작업이야말로 더욱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자서전들 쓰십시다”고 외치던 이청준과 그것을 환기시켜주는 정재민의 동의에 내가 재청하는 이유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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