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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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다. 바로 이 책임을 환기시키는 것이
인문학의 기본 정신이다. 그것은 우
리가 ‘교양’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
부에 놓인 정신이기도 하다 1993년 8월에 나온 ‘고노 담화’는 기억할 만한 문서다. 미야자와 내각의 관방장관이던 고노 요헤이가 2차대전 당시 종군위안부들의 동원과 배치에 일본군이 관여했음을 인정하고 위안부로 끌려가 ‘무수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에게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고 공식 표명한 것이 고노 담화다. 위안부 문제를 두고 일본이 이처럼 정부 차원의 인정과 사과를 공식화한 것은 이 담화가 사실상 처음이다. 이것이 고노 담화의 역사적 중요성이다. 그러나 종전 68주년이 되는 올해 고노 담화가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국민에게 다 같이 ‘기억할 만한 문서’가 되는 이유는 좀 다른 데 있다. 고노 담화의 말미 부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가고자 한다. 우리는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해 같은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새롭게 표명한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일본이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을 통해 장차 “같은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표명한다”는 언명이다. 역사적 진실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보존하는 것이 역사라는 학문이다. 그 학문 안에서도 진실을 찾아 기록하고 해석하는 일은 주로 ‘역사연구’의 작업이며 거기서 얻어진 진실을 일반 세상에 풀어 “잊지 맙시다”를 호소하는 사회적 공기억으로 확산시키는 일은 주로 ‘역사교육’이 담당하는 작업이다. 이 두 가지 일의 수행만으로도 역사는 의미 있는 연구활동이고 교육활동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고노 담화가 진실 기억 이상의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일본이 장차 “같은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표명한다”고 강하게 언명한 대목이다. 한국 국민이나 일본 국민이 ‘다 같이’ 고노 문서에서 새삼 주목하고 기억해야 할 부분은 바로 그 대목이다. 틀린 역사, 오류의 역사, 왜곡된 역사를 ‘아는’ 것과 그런 역사의 ‘반복을 거부’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앞의 것이 지식의 문제라면 뒤의 것은 실천의 문제다. 지식과 실천을 결합하는 것이 적어도 문화의 이상이고 문명의 목표처럼 여겨졌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달라도 보통 다른 게 아니다. 지금은 지식과 실천이 거의 완전히 따로 노는 시대다. 교육에서조차도 배워서 안다는 것과 그 배운 것을 실행으로 이어붙인다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괴리가 놓여 있다. 잘못인 줄 뻔히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도 기꺼이, 즐겁게 저질러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개인·조직·국가를 지배하는 사회문화적 풍토가 되어 있다. 그 풍토에 적응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지혜’이고 ‘기술’이다. 그래서 순박한 사람들은 “배운 자들이 나쁜 짓 더 한다”고 말한다. 옛날 소크라테스·플라톤 같은 아테네 철학자들은 인간이 ‘몰라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지 ‘알기만’ 하면 잘못 행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그 순진한 철학자들이 21세기를 방문한다면 지(知)와 행(行) 사이에 태평양이 가로놓이고 그들이 생각했던 지혜라는 것도 시장에 내다놓으면 ‘똥값’조차 못 받을 바보의 철학이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30초 안에 기절할지 모른다. 이런 시대에 일본 조야와 국제사회를 향해 잘못된 역사를 ‘기억’하고 동일한 오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천명하고 나선 것이 고노 담화다. 기억이 지식의 일종이라면 반복의 거부는 실천의지다. 역사 지식이 과거에 관한 것이라면 실천의지는 미래로 연결된다. 고노 담화는 과거사에 대한 진실의 기억(지식)을 실천으로 연결시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고 광복 68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우리가 그 담화의 결의 부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고노 결의가 그 후, 특히 지금의 일본 정치판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라는 문제는 별도 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왜 기억해야 하는가? 첫째, 틀린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실천의지야말로 한 나라를 ‘정상국가’일 수 있게 하는 요건이다. 의지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실천도 가능하지 않다. 2차 대전 당시 비행과 오류에 빠져들었던 나라일수록 그 실천의지의 유무는 국가적 정상성의 기준이 된다. 독일이 이 테스트를 통과했다면 지금의 일본은 그 기준 자체를 반국가적 ‘매국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고노 담화도 일본의 과격 우익들에게는 매국 반열이다.) 둘째,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정신과 태도, 자세와 판단력을 길러주는 것이 ‘역사교육’의 핵심이다. 사실(史實)을 단순 암기시키고 연대를 외우게 하고 왕들의 이름을 머리에 빼곡 입력시키는 것은 역사교육의 본질 과제가 아니다. 역사과목에는 암기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러나 암기 그 자체가 교육의 목표는 아니다. 한국 학생들이 역사 과목에 종종 진저리치는 것은 역사를 왜 배우는지 모르고 배우게 하기 때문이다. 나라 역사이건 세계사이건 간에 역사의 실패와 오류 부분을 공부하는 것은 역사의 영광과 성공의 부분을 공부하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왜? 그러지 않을 경우 역사 공부는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하는’ 능력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 점에서 역사교육은 ‘오류 수정’의 정신을 강조하는 과학교육과 닮았다. 한국에서는 역사교육이 곧바로 애국교육인 것처럼 인식되곤 한다. 이런 인식은 역사교육에 대한 일본 과격 우파의 인식과 다를 것이 없다. 애국은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교육이 애국주의에만 빠지면 거기서 길러지는 애국심은 종종 성찰과 판단이 희생된 경쟁적 맹목성의 포로가 되고 맹목적 애국주의는 결코 애국이 아니다. 셋째, 오류의 역사를 성찰하고 그 역사의 반복을 경계하는 것이 바로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다. 이 책임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인문학’이고 인문학의 ‘정신’이다. 역사가 인간의 희망대로 정의와 진리의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되 인간이 자기 희망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는 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우연성의 개입도 비일비재하다. 그 역사에 대해 인간이 무슨 책임을 질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뜻밖에도 간단하다. 잘못된 역사는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고통에 빠뜨리고 삶을 파괴한다. 역사의 오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 오류 때문에 피의 강이 흐르고 눈물의 골짜기가 만들어지고 땅 위에 생지옥이 생겨난다. 역사의 횡포는 거의 대부분 인간에 의한 횡포다. 인간이 저지르는 오류와 횡포를 인간이 손질하지 않는다면 누가?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란 달리 말하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다. 바로 이 책임을 환기시키는 것이 인문학의 기본 정신이다. 그것은 우리가 ‘교양’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부에 놓인 정신이기도 하다.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인간이 도대체 어떤 동물이기에 그토록 잔인한 살육과 파괴행위를 자행할 수 있었는가라는 자기 성찰의 질문과 만난다. 나치 독일은 전대미문의 유대인 절멸작전을 수행했고 군국주의 일본은 난징 대학살, 중국인 생체실험, 여성 희생을 비롯한 다수의 반인간적 잔혹사의 장면들을 연출했다. 일본 관동군 소속으로 그 잔혹사에 참여하고 스스로 그 역사의 행위자가 되었던 사람들은 후일 나이 들어 “그때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악마였다”고 회고한다. 그들을 악마가 되게 한 것은 무엇인가? 명령? 조직정체성? 국가 이데올로기? 유전자? 개인 그 자신? 사회문화? 교육? 세계는 지금도 그 해답을 찾고 있다.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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