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 농부철학자
|
박 일곱 해에 걸쳐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먹을 것 400가지와 나무를 오
르내리고 나무 위에 집을 마련하고,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는 법을 가르
친다. 이 모두가 ‘현장 교육’이다. 지금
우리는 이른바 ‘제도교육 기관’에서
짐승만도 못한 ‘교육’을 시키고 있다 50년 전에 견주어 지금 우리나라는 200배나 잘살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안팎이었던 나라가 2만달러가 웃도는 시절을 만났으니 그렇지 않은가? 공무원 봉급은 1000배나 올랐고(참고로, 1963년 공무원 평균 임금이 3000~4000원이었는데 2013년 평균 임금은 300만~400만원을 웃돈다) 쌀값도 거의 비슷하게 올랐다. 그러니 ‘국민소득’으로만 따지면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50년 전보다 1000배는 더 잘살고 있고, 농민들도 나라님 덕분에 이 좋은 세상 만났다고 백번 천번 굽실거려야 마땅하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농민들도, 공무원들도, 일반 국민들도, ‘조국 근대화’ 덕분에 ‘태평성대’에서 살고 있는가?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1963년 서울 시내버스 삯은 5원이었는데, 2013년 8월 현재 버스삯이 카드로는 1050원, 현금으로는 1150원이다. 에누리 없이 200배 넘게 뻥튀기된 것이다. 서울 집값은 더 많이 올랐고, 집 없는 사람들은 몇 곱절 더 늘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 마련에 드는 돈, ‘자녀 교육비’ 모두 몇백배에서 몇천배까지 다락같이 뛰어올랐다. 이것저것 제쳐놓고 ‘생필품’ 값만 따지더라도 물가가 줄잡아도 200배의 몇 곱절은 오른 것이다. ‘2만 나누기 200은 100’. 이 숫자가 무얼 뜻하는가? 서민들 처지에서 보면 후하게 치더라도 국민소득은 여전히 100달러 안팎 수준에 머물러 있고, 삶의 질은 더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어찌 그뿐인가. 지난 50년 동안 ‘잘살아 보세’ 운동에 떠밀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맑은 물, 맑은 공기, 기름진 땅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라고는 ‘죽음의 땅’밖에 없다. 이것이 현재 ‘아,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다른 모든 것 뒤로 미루고 ‘교육 현실’만 보자. 사람은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유전정보’에만 기대서는 살 수 없다. 집도, 옷도, 먹을 것도, 일을 배워야만 마련할 수 있다. 어른들은 일을 가르치고, 아이들은 몸 놀려 일하기를 익혀야 한다. 교육의 근본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몸 놀리고 손발 놀려 일하는 힘을 길러 주어야 한다. 그 나머지는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우리 아이들이 이런 교육을 받고 있는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오랑우탄만도 못한 교육을 시키고 있다. 오랑우탄 암컷은 새끼가 태어나면 꼬박 일곱 해에 걸쳐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먹을 것 400가지와 나무를 오르내리고 나무 위에 집을 마련하고,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는 법을 가르친다. 이 모두가 ‘현장 교육’이다. 이렇게 해서 오랑우탄 새끼는 여덟살만 되면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된다. 지금 우리는 이른바 ‘제도교육 기관’에서 짐승만도 못한 ‘교육’을 시키고 있다. 손발 놀리고 몸 놀려야, 서로 어우러져 함께 놀고 일손을 도와야 할 아이들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딱딱한 걸상에 궁둥이 붙이고 앉아 ‘강시’나 ‘좀비’가 되는 교육 아닌 ‘교육’을 받고 있다. 이 세상에 ‘정답’이 하나밖에 없는 삶의 문제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우리 교과서는 ‘정답은 하나’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 부처, 알라를 떠받드는 ‘성경’, ‘불경’, ‘코란’도 저마다 다른 해석의 길을 열어 놓는다. 그러나 ‘시험’이 요구하는 ‘정답’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교과서’를 해석하면, 학생들은 ‘낙오자’가 된다. 교과서를 ‘비판적’으로 읽거나 ‘창의적’으로 해석하는 학생들은 발 딛고 설 자리가 없다. 비판의식을 없애고 창조력을 뿌리뽑는 데에 우리나라 ‘교과서적 교육’을 따라잡을 교육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교과서’가 시키는 대로 오직 하나뿐인 ‘정답’을 찾는 ‘교육’만 받아 온 아이들이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 맞닥뜨리면, 그 아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념적 국가기구’와 ‘폭력적 국가기구’가 한통속이 된 막강한 통치 권력이 ‘정답은 내 안에 있다. 나를 따르라’고 어르고 을러대면 목매인 송아지처럼 그 길로 우르르 따라나서지나 않을까? 무작정 따라나서다 수백만 수천만이 죽고 죽이는 ‘죽음의 길’, ‘죽임의 길’로 들어서지나 않을까? ‘우리가 지지리도 못살았다던 50년 전에는 버스삯이 5원밖에 안 되었다는데 200배나 더 잘살게 되었다는 오늘 왜 우리는 200분의 1인 ‘한 푼’이 아니고 1000원이 넘는 버스비를 내야 하지?’ 하고 묻는 사람이 왜 하나도 없을까? ‘서른 해가 넘게 죽자 사자 몸 놀려 일했는데도 왜 나한테는 몸 눕힐 방 한칸 없지?’ ‘어떤 사람은 한 해에 수천억씩 번다는데 왜 나는 시간 임금을 5000원도 못 받지?’ ‘일하고 싶은데 왜 나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지?’ 하는 문제는 우리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다. 이런 절실한 문제를 다루지 않는 ‘교과서적 지식’이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오늘날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괴물 경제를 지렛대 삼아 미국과 맞짱 뜨자고 나서는 뒷배에는 이른바 ‘문화혁명’이 있었다. 1966년에 ‘문화혁명’을 일으킨 혁명 주체들이 맨 먼저 한 일은 ‘학교’ 문을 닫은 것이다. 학교를 벗어난 젊은이들은 농촌이나 공작소로 ‘하방’되었다. 현재 중국에서 ‘삼권’을 휘두르는 우두머리 자리에 있는 시진핑도 일곱 해 동안 ‘노동 현장’에서 농민과 노동자들과 함께 땀 흘려 일했다. 일하면서 ‘스스로 제 앞가림하는 힘’을 몸에 붙였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몸통’을 이루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 ‘문화혁명 세대’다. 그래서 현재 중국에서 빈부의 격차가 턱없이 벌어지고 부정부패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과 함께 땀 흘려 일한 경험이 있는 기층 ‘인민’들이 아직은 ‘저이들은 우리와 함께 몸 놀리고 땀 흘리면서 일한 사람들이야. 저 사람들은 우리에게 등 돌리지 않을 거야’ 하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이 믿음이 뒷받침되어 중국의 ‘정치 경제’가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해방’을 맞은 뒤로 이 나라 남녘땅에서 이른바 ‘지도급 인사’로 발돋움한 사람들 가운데 그 발판을 마련해 준 사람들, 저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 준 기층 민중들과 생산 현장에서 함께 땀 흘려 일해 본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숨 쉬기 힘든 공기 ‘녹조라테’, ‘토마토케첩’이 된 민물과 바다, 땅속 깊이까지 중금속으로 오염된 대지. 이것이 미래 세대들이 상속받아야 할 유산이다. 게다가 ‘학교는 죽었다.’(School is dead. 이반 일리치의 말이다.)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이오덕의 말이다.) 이것이 우리 아이들이 물려받을 수밖에 없는 ‘저주의 몫’이다.(조르주 바타유의 말이다.) 어찌할 것인가? 이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박노해의 말이다.) 그래,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다. 온 지구를 200년이 채 안 된 사이에 절망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은 힘이 사람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이 별을 되살려 내는 몫도 사람이 맡아야 한다. 그런데 ‘강제’로 시키는 ‘자율학습’으로, ‘정답’이 하나뿐인 ‘시험’으로 머리도 손발도 굳을 대로 굳어 버린 우리 아이들이 ‘사람 노릇’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짐승’만도 못한 어른들이 ‘기계’로 길들여 놓은 이 아이들이 제 손으로 ‘플러그’를 뽑을 수 있겠는가? 무엇이 ‘정답’인가? 이 아이들을 더는 ‘학교’에, ‘교과서’ 속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된다. 산과 들과 바닷가로 몰아내야 한다. 몸 놀리고 손발 놀리면서 살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윤구병 농부철학자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