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9.26 19:08 수정 : 2013.09.26 19:08

김병익 문학평론가

더위 속에 읽은 다이아몬드의 <문명
의 붕괴>는 제1세계 사람들이 소비
하는 에너지와 거기서 생기는 쓰레
기가 제3세계 사람들의 32배라고 보
고하는데, 그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
며 산업혁명 이후 벌어진 선·후진국
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추석도 지나고 선선한 바람을 쐬게 된 이제, 지난여름의 내 실패담을 웃으며 고백해도 괜찮겠지 싶다. 내가 이름붙인바 ‘에어컨 디톡스’를 결국 포기하고 말았던 사연이다. ‘블랙아웃’을 걱정하는 소시민 주부인 아내가 우리도 이번 여름 에어컨을 켜지 않고 지내보자고 제의했고 나도 우리 전력 사정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장난기만은 아닌 실험 욕심이 돋아 동의했다. 아내가 정부의 지시대로 가전제품의 사용을 줄여야겠다고 작심할 때 나는 한 신문기자가 쓴 미국에서의 ‘디지털 디톡스’ 체험기를 읽었고 그 기사는 이태 전에 읽은 <아날로그로 살아보기>란 독일 기자 크리스토프 코흐의 책을 회상시키며 나도 한번 중독에서 벗어나는 ‘디톡스’를 실행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갖가지 디지털 기기로 취재하고 기사 쓰고 언론기관에 송고하는 프리랜서 기자인 코흐는 두 집을 이사하면서 미처 컴퓨터를 옮기지 못했고 그래서 당분간 이메일을 쓸 수 없게 되자 아예 휴대전화까지 끊고 한 달 동안 디지털 편의에서 벗어나 오프라인 생활로 지내보기로 작정한다. <아날로그로 살아보기>는 그때 겪은 숱한 일들, 가령 전화며 이메일을 받지 않는다는 친구들의 불평과 공중전화를 찾고 우체국에 가고 사전을 뒤져야 하는 등 전에 없이 겪어야 했던 오해와 수고, 불편과 어려움, 그런 가운데 조금씩 이겨내며 디지털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컴퓨터를 못 쓰게 되면서 고통스러워지고 소셜앱을 끊음으로써 고독감까지 씹어야 했던 그는 그래도 조금씩 아날로그 생활 방식에서 편안함을 얻어가고 그런 일상에서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게까지 된다. 그는 예정보다 열흘 더 아날로그의 일상을 연장했다가 다시 디지털 생활권으로 돌아가지만 그 40일 동안의 ‘디지털 안식’을 유쾌하게 회상하고 있었다.

나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만 글쓰기와 메일, 인터넷 보기, 검색, 그리고 통화와 문자메시지 전화번호 등 최소한의 용도로 그치며 게임도, 트위터나 카카오톡도 안(못) 하고 있기에 중독 상태라고 말할 것은 못 된다. 그러는 대신 여름이면 에어컨을 애용해서 거실에 종일 켜두며 덥지 않게 지내왔다. 기술문명에 대응하는 세대적 차이를 지적한 더글러스 애덤스의 말이 코흐의 이 책에 인용되는데 그 지적이 내게 참으로 합당하게 들려온다.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존재한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일상적이다. 30살 이전에 발명된 것은 놀랍도록 흥분되고 창의적이며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다. 30살 이후에 발명된 것은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의 종말을 뜻한다. 그것이 약 10년 이상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과 천천히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20대에 처음 선풍기 바람을 쐬었고 50대에 사무실에 에어컨을 비치했고 60대에는 집에도 마련하면서 그것들을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불편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문명의 혜택’으로 크게 반기고 있었지만, 가장 후진 수준에서 선진 문명 생활에 이르기까지 ‘압축 성장’ 속에서 살아온 내게 디지털 이기들에 대한 느낌은 참으로 실감나는 것이었다. 나는 컴퓨터나 스마트폰 대신 에어컨을 켜지 않음으로써 그 ‘혜택’에 다이어트를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실험은 당연히 힘들었다. 예년보다 올해가 덥기도 했고 열대야는 더 길게 계속되었다. 더구나 여름을 잘 못 견디는 나는 이 더위를 운동이나 노동으로 이겨내는 것도, 여행이나 집 앞 공원의 나무 그늘로 피신하는 것도 아닌 채 집 안 거실에서 그저 참아보려고만 했다. 선풍기를 켜놓고 냉장고의 찬물을 들이켜고 샤워도 자주 하며 땀에 젖은 내의를 아침저녁으로 갈아입는 등 ‘더위 참기’에만 갖가지 노력을 다한 것이다. 그렇게 한더위를 견뎌가던 어느 날, 싸구려 빙과를 한 아름 사 들고 와 혼자 한꺼번에 다섯 개를 먹고 나서, 그 궁상스런 스스로의 몰골이 참으로 누추하게 보여 문득, 에어컨을 켜고 말았다. 광복절 다음날이었다.

끝내 더위를 참지 못했다는 씁쓸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디톡스 실패에서 나름대로 이미 느껴온 것을 확인하거나 새로이 생각하는 내면적 소득으로 자위했다. 우선, 옛날의 문화적 취향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문명의 편의를 포기하고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사실이 그랬다. 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준 뭇국을 그리워하며 요즘의 고급 커피보다는 젊은 시절에 맛 들인 인스턴트커피를 더 좋아하지만 글쓰기는 컴퓨터의 한글을 버리고 종이와 볼펜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체험적으로 실감하고 있었는데, 이번의 에어컨 켜지 않기는 기술 발전이 준 안락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지속과 역행은 반드시 편의적이거나 자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쾌적한 상태에서 교육과 연구로 새로운 것을 발견·발명하는 선진사회와 열악한 상태에서 겨우겨우 최소한으로 따라가야 하는 후진사회 간의 격차, 그러니까 과학기술에서의 ‘남북문제’가 앞으로 더욱 심화되리라는 점도 예상되었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사회는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말한 ‘자기 촉매적’ 효과로 그 성장의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그래서 그렇지 못한 사회와의 격차가 더욱 심해져, 인구 문제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제시한 맬서스의 이론이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고, 그렇다면 세계는 더욱 혼란스럽고 불안하며 위태로워질 것이다. 더위 속에 읽은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는 제1세계 사람들이 소비하는 에너지와 거기서 생기는 쓰레기가 제3세계 사람들의 32배라고 보고하는데, 그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며 산업혁명 이후 벌어진 선·후진국 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19세기의 식민제국주의는 21세기에 기술제국주의로 변모되는 것이다.

이에 이어 잡혀온 생각은 문명의 발전이란 것이 결국 에너지 소모량 증가를, 그래서 엔트로피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고 언젠가는 지구도 에너지를 생산할 자원이 완전 소모되어 달처럼 폐허가 되리라는 암울한 상상이었다. 이런 상상은 조금도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더위를 참아가며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 속에서 이스트 섬이나 마야 문명의 쇠멸 과정을 보며 “언젠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내핍생활을 하거나 아니면 붕괴의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라는 구절을 한참 응시하지 않을 수 없을 때의 종말감은 정말 암담한 것이었다. 앤드루 니키포룩의 <에너지 노예, 그 반란의 시작>은 오히려 에너지의 노예로 전락한 현대문명의 미래를 당차게 몰아붙이고 있는데, 정치가들이 자신들이 만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싸움판을 벌이듯, 과학기술자들도 스스로 개발하여 이룬 성취들로 말미암아 빚어진 문제들을 이번에는 다시 해소해놓겠다고 막대한 연구비를 쓰는 사람들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나는 ‘에어컨 디톡스’에 실패했지만, 그 덕분에 문명이 제공하는 편의에서 우리가 벗어나기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달았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예찬한 자연 속의 삶이 더 행복하고 문명과 기술이 오히려 삶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흔한 생각도 돌이켜보았으며,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인류의 문명도 언젠가는 붕괴될 것인데 이른바 3D복사기로 또 하나의 지구를 만들 수 없을까 하는 황당한 공상도 해보는 등, 비록 상투적인 반성 속에서 그동안 잊어왔던 ‘지구적 고민’에 젖어볼 수 있었다. 아마도, 나는 내 사사로운 실험에 실패하면서, 나 스스로 그 문제의 의미도 이해 못할 난제를 놓고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냉방기 디톡스를 포기했지만, 습관적으로 으레 에어컨 켜던 버릇이 좀 줄어들었고 더위 먹은 몸에 약하게나마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얼마나 신선한지 새삼 반가운 마음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특별기고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