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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0.03 19:14 수정 : 2013.10.03 20:58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대학장

욕망의 크기는 한정할 수 없는 것이
라 소유 혹은 소비의 양으로 무한 욕
망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
다. 가치를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위
험하다. 가치는 돈에 자기표현을 위
탁할 수 없고 효용이나 사적 선호의
문제로 처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학 신입생들을 상대로 “귀하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 다섯 가지를 적어보라”라는 내용의, 일종의 가치 조사 비슷한 것을 실시해보는 때가 있다. 이런 조사는 단순한 심심풀이나 호기심 충족 행사가 아니다. 열아홉 살 신입생들의 머릿속에 어떤 가치 목록이 들어 있는지를 알아보는 일은 학생들이 무슨 기대를 걸고 대학에 들어왔는지, 장차 인생에서 무엇을 성취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어하는지에 관한 요긴한 참고 자료가 된다. 학생들이 4학년이 되었을 때에도 유사한 후속 조사가 실시될 수 있다. 신입생 때의 가치 목록과 대학 생활 4년 후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의 가치 목록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자는 것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대학의 경우, 신입생 때의 가치 조사에서 단연 목록 1위에 오르는 것은 ‘돈’이다. 돈에 1등 자리를 내준 다음에는 행복, 성공, 가족, 사랑, 건강 같은 항목들이 조금씩의 순위 차이를 보이며 2위에서 5위까지를 차지하는 것이 ‘대세’다. 물론 예외가 없지 않다. ‘정의’를 올리는 학생도 있고 ‘눈물’을 주요 가치로 등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런 예외들은 예외라는 것이 그러하듯 그 수가 극히 드물고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의 유의미한 ‘세’를 형성하지는 못한다. 대학 1년생들의 (단 1개 대학의 샘플에 불과하지만) 가치 목록에서 돈이 1등을 차지하는 것에 대한 무슨 해석을 시도해보자는 것이 지금 이 칼럼의 목적은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돈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가치 판단은 지금 우리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도,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2009년 로이터-입소스 공동 여론조사를 보면 “당신은 돈이 인생 최고의 성공 증표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설문에 한국인의 69%가 그렇다고 응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사 대상 9개국 가운데 1등이다. 중국이 우리와 동률 1위이고 인도가 3위(67%), 일본이 4위(63%)다.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캐나다 같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돈에 부여한 중요도는 33%에서 27% 사이다. (아시아 사람들이 서구인들보다 두 배 이상으로 돈을 성공의 최대 증표라 여기고 있다는 조사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그러니까 한국의 대학 신입생들이 돈을 최고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것은 로이터-입소스의 전체 여론조사 결과와 상치되지 않고, 한국인 대다수의 상식적 판단(“지금 한국에서는 돈이 최고야”)과도 배치되지 않는다. 그래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둘째, 젊은 세대가 돈을 가치 목록 1위에 올리고 있다는 것은 교육에 큰 부담을 안기는 사회적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아시아 사람들이 돈에 큰 중요성을 주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학적 문화적 연구거리다. 그러나 그 문제는 여기서 다룰 것이 아니다.) 여기서 나의 관심은 “사회가 그러니까 아이들도 그렇지”라는 식의 사회풍조론을 꺼내자는 것이 아니고 성장세대의 소위 ‘가치 전도’ 현상을 개탄하자는 것도 아니다. 지금 대학 교육 현장에서, 특히 교양교육의 경우, 교수들을 딜레마에 빠뜨리는 최대의 어려움 하나는 ‘돈 이야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게오르크 지멜처럼,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수단은 그 자체로는 가치가 아니다”라거나 “수단적 가치를 목적 가치로 바꾸는 것이 바로 가치 전도라는 거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강의실에서 교수들이 돈 이야기를 다룰 때 흔히 선택하는 고전적 방식의 하나다. 학생들의 반격이 들어온다. “그래도 교수님, 벼락이라도 좋으니 전 돈벼락 좀 맞아보고 싶습니다.” 교수가 지멜의 통찰에 기대어 응답한다. “‘무엇을 하기 위한’ 수단이 돈이다. 그 ‘무엇’이 목적이라면 돈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강을 건너자면 다리라는 수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다리 위에서 살 수는 없잖은가?” 학생이 또 응수한다. “아뇨, 교수님. 전 그 다리에서 살고 싶어요.”

돈 문제에 관한 한 학생들에게 가치 교육을 말할 방법의 절대적 궁핍, 이것이 내가 ‘교육의 부담’이라 말한 것의 의미다. 말하자면 ‘백약이 무효’다. 석존의, 혹은 법정 스님의 고귀한 ‘무소유’론도 돈, 소유, 소비가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하는 다수 젊은이들에게는 먼 산 뜬구름 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토머스 모어가 16세기에 그려낸 ‘유토피아’는 사람들이 ‘황금을 절대적으로 무시’하면서 사는, 그래서 탐욕, 시기, 질투, 경쟁, 불의의 감염에서 벗어난 ‘이상향’인 나라다. 우리 학생들은 말할 것이다. “그게 무슨 유토피압니까? 당신들이나 그런 데서 사십시오.” 백약이 무효일 때 들이닥치는 것이 ‘절망’이다. 그런데 교육 담당자에게 절망은 독약과도 같다. 절망할 수 없고 절망해서는 안 되는 것이 교육이고 교육자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돈에 관한 이야기를 ‘날씬하게’ 처리할 방법은 없을까? 가치와 현실을 이어 붙이고 학생들의 현실적 관심을 가치 교육의 조망 속으로 끌어들일 어떤 중재안 같은 것이 없을까?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30년에 21세기 사람들을 위해 내놓은 ‘악마와의 계약’론은 그런 ‘안’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최근 저서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에는 케인스의 그 아이디어가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돈은 인간 타락의 경멸할 만한 기원이다. 그러나 사회가 사람들에게 살 만한 조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생산도 늘어나야 한다. 그래서 근대 이후 사회는 돈이라는 악마와 파우스트적 계약을 체결한다. 악마여, 인간이 충분히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때까지만 인간에게 봉사하라. 그런 다음 사라져라. 그래서 케인스 아이디어에서 이 계약은 영구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필요의 수준을 충족시킬 만한 사회 발전 수준에 이르면 그때 가서 악마를 ‘해고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아이디어다.

물론 이 재담 같은 아이디어는 이미 실패작이 되어 있다. 왜 실패했는가? 스키델스키는 케인스가 인간의 ‘탐욕’이라는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케인스는 ‘필요’(needs)와 ‘욕구’(wants)를 구분하지 않았고 필요를 충족시키기만 하면 악마의 봉사가 더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필요에는 충족의 선이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배고픈 사람에게 자장면 한두 그릇이면 되지 10그릇씩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 가족에 자동차 10대, 냉장고 5대씩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욕구(스키델스키의 용어, 더 흔하게는 욕망)에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선이 없다.

이런 지적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행복은 ‘욕망 분의 소유’라는 20세기 공식(소유의 양을 늘려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행복이라는)이 왜 틀린 것인가 우리는 알고 있다. 욕망의 크기는 알 수 없고 한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소유 혹은 소비의 양으로 무한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돈은 자장면, 자동차, 냉장고와는 다르다. 그것은 아무리 가져도 충분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마성을 갖고 있다. 파우스트의 악마를 해고하기는커녕 그 악마의 덫에 더 단단히 걸린 것이 지금의 우리이고 인간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이 중요한가? 돈의 문제와 가치의 문제를 연결해보려 했던 케인스의 시도 자체가 중요하고 소중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런 시도를 향한 사회적 노력과 사유가 필요하다. 교육의 부담은 사회의 부담이며 그 부담을 처리하기 위한 교육과 사회의 ‘협업’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가치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위험하다. 가치는 돈에 자기표현을 위탁할 수 없고 효용이나 사적 선호의 문제로 처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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