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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 농부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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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았다. 무섭게 닮았다. ‘국군의 날’, ‘인민군 창립 기념일’ 행사. 파시스트 이탈리아 무솔리니 군사 행렬, 나치 ‘히틀러 유겐트’의 손발 놀림. 저게 어디 사람 손놀림인가, 발놀림인가, 얼굴 모습인가. 굳고 일그러진 표정, 꺾이고 뒤틀린 허수아비 춤 같은 동작, 저승으로 끌려가는 길이 보인다.
사람을 가장 많이, 가장 빨리, 가장 쉽게 죽일 수 있는 ‘최첨단 무기’를 실은 차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하늘에서는 ‘전투기’들이 치솟았다 곤두박질치고, ‘공수부대원’들이 ‘국회의사당’ 쪽으로 뛰어내리고, … 대포알에 박살나는 시스티나 성당, 건물 몇 채 남지 않고 허허벌판이 된 평양, 굴비 두름 널브러지듯이 젊은이들이 한데 엮여 죽어간 1980 ‘빛고을’ … 보인다. 그 죽음의 행렬이. 이미 죽어갔고, 지금도 죽고 있고, 앞으로도 죽어갈 그 많은 젊은이들, 그리고 곧 뒤이어 앗아갈 아이들의 목숨.
저 ‘행사’는 ‘적’에게 본때를 보이려고 벌이는 게 아니다. 성난 고릴라처럼 ‘맞설 테면 맞서 봐’ 하고 가슴을 두 손으로 번갈아 치는 대신에 ‘세계만방’에 ‘전투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저 짓을 하는 게 아니다. 무솔리니가, 히틀러가, 파시스트들이, 나치가 그랬듯이 전쟁으로 눈길을 돌리게 해서 저희들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을 가리려는 ‘독재자’, ‘전쟁광’들의 ‘대국민 공포 조성용’이다. 어렸을 때 나는 저런 ‘행사’를 자주 보았다.
이런 ‘군사력 시위’는 따지고 보면 모두 제 나라 젊은이들을 무더기로 죽이고, 그 주검을 산더미처럼 쌓아올리는 ‘죽음의 잔치’다. 그 잔치 뒤에는 말라붙은 어머니의 젖가슴과 앙상한 갈비뼈에 아랫배가 뽈록 부풀어오른 아이들로 상징되는 더 길고 고통스러운 ‘굶주린 나날’들이 기다린다.
‘전쟁’과 ‘기아’를 따로 떼어놓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다. 전쟁과 굶주림은 동전 앞뒤를 이룬다. 굶주림에 지친 젊은이들은 돈에 팔려 전쟁터로 끌려간다. (미국 남북전쟁 때 ‘떼돈’을 번 사람들, 여러분 귀에도 이름이 익을 록펠러, 포드, 카네기, 모건… 이 사람들 모두 돈으로 다른 사람들 사서 자기들 대신에 전쟁터에 보내고, 고철이 된 총을 새 총으로 둔갑시키는 따위의 야바위놀음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올렸다.)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떼죽음을 당하면 농촌에 일손이 빈다. 밀과 보리가 자라던 밭에는 ‘망초’ 떼가 만발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개망초’다. 밭을 묵히면 맨 먼저 그 밭을 ‘점령’하는 것이 ‘망초’(개망초)다. 그야말로 ‘망할 놈의 풀’이다. 젊은이들이 쟁기질로 밭을 갈아야 할 철에 서투른 칼질, 창질로 싸움터에서 죄다 목숨을 잃었으니 어디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겠는가. 풀뿌리, 나무껍질도 ‘감지덕지’다. 100% ‘셀룰로이드’인 주먹만한 똥은 몸 밖으로 내보내야 ‘똥독’(황달)에 걸리지 않겠는데, 그 굳은 똥을 밀어내려면 똥구멍이 찢어져야 한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은유’가 아니라 ‘직유’인 것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나는 똥을 눌 때마다 두 가랑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로 이 말이 옳은 말임을 ‘확인’했다.
‘전쟁’으로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가난한 집 자식들은 긴 굶주림을 견디는 대신에 전쟁터에 나가 곧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전쟁으로 굶주림을 이겨낼 수는 없다. 다만 ‘전쟁 특수’라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여서 전쟁은 직접 손에 총을 들지 않아도 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떼돈’을 벌 수 있게 해준다. 오늘날 ‘아메리카 합중국’에서는 전쟁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이 밀입국한 젊은이들, 일자리가 없는 ‘88세대’, ‘히스패닉’, ‘멕시칸’, ‘중남미산’ ‘고딩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어찌 이 철없는 젊은것들만 이 ‘미신’에 빠져 있으랴. ‘펜타곤’과 ‘월스트리트’를 점령하고 있는 ‘군산복합체’ 사람들, 그리고 이들이 온실 속에서 길러내고 있는 ‘의원’, ‘지사’, ‘총기 산업’ 지지자들 … 사이에서는 이 ‘믿음’이 ‘미신’을 벗어나서 ‘광신’의 대상이 되었다.
‘전쟁 산업만이 우리를 먹여 살린다’, ‘적어도 세계 어느 곳에선가 20군데 이상 ‘국지전’이 일어나야 우리에게 살길이 열린다’, ‘사우디 왕정을 비난하지 마라. 우리 무기를 가장 많이 사들이는 나라다’, ‘당장 시리아에 쳐들어가야 한다’ …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닌가?
‘전쟁광’들은 서로 닮은 구석이 있다. 첫째, ‘나’는 안 죽고 ‘남’만 죽인다. (이 ‘남’이 이쪽 편이든 저쪽 편이든 아랑곳없다.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은 ‘남’은 저쪽 ‘남’만은 아니다.) 둘째, ‘돈’이 안 되는 싸움판에는 끼어들지 않는다. ‘용병’이라는 말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한때 우리도 ‘베트남전쟁’에 용병 노릇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이마에는 ‘베트남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라고 쓰인 띠를 둘렀다.) 셋째, 깔보이는 나라에만 쳐들어간다. (아프가니스탄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 나라를 지키고 있는 ‘탈레반’이 고작 5만명이고,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국민소득’ 100달러 미만이고….) 넷째, 꼭 그럴싸한 핑계를 댄다. (“후세인이 이라크에 ‘대량살상 화학무기’를 ‘은닉’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오사마 빈라덴’이 숨어 있다.”) 다섯째, 혼자 나서기 쪽팔리면 패거리를 모은다. (5만밖에 안 되는 ‘탈레반’을 무찌르려고 부시는 66개 나라의 군대를 줄 세우는 낯 간지러운 ‘쇼’를 했다. 그래도 아직 그 ‘전쟁’(?)을 ‘승리’로 ‘종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여섯째, 나라 안에서 구린 짓을 하고, 그게 말썽을 일으키겠다 싶으면 ‘전쟁놀음’으로 눈길을 돌리게 한다. … 끝없이 늘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이쯤에서 그치자.
이 세상에 ‘전쟁’을 바랄 사람들이 어디 있으랴??? 있다. ‘전쟁광’들이 있다. 전체 ‘인민’들에게는 ‘목숨’과 ‘굶주림’으로 때워야 하는 ‘싸움판’이 이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잃을 것은 하나도 없고 얻을 것만 있는’ ‘꽃놀이패’이고, ‘남’의 목숨을 판돈으로 걸고 벌이는 ‘놀음판’이고, 그 싸움에서 져도 ‘국립묘지’에 꽃 한 송이 들고 가서 잠깐 고개 숙이는 것으로 때울 수 있는 ‘시엔엔 뉴스’ 거리일 뿐이다.
‘전쟁광’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 안에 사랑이 담겨야 할 말을 ‘무기’로 쓰는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지네들이 싸움을 부추기고, 살인교육을 시키고 무기를 대서 ‘내전’(?)을 일으켰다가 자기들이 등 떠민 쪽이 지면 맨 먼저 공항으로 달려가 비행기에 몸을 싣는 자들이 누구인지 눈여겨보라.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월남전’이 ‘베트콩’의 승리로 끝났을 때 비행기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미 대사관’ 직원들만이 아니었다. 옆구리 찔러서 남과 북이 싸우게 만들었던 아메리카 합중국은 그 나라 ‘전쟁광’들이 한몫 단단히 챙길 기회를 주었고 그 전쟁광들의 허수아비 노릇을 했던 ‘남베트남’의 군사독재자와 그 가족들까지 비행기에 태워 ‘자유의 나라’로 실어날랐다. 물론 그 비행기 안에는 그 허수아비들이 가로챈 ‘검은돈’도 실려 있었다.
무엇이, 왜, 어떻게 닮았고, 닮아가는지 알겠는가? 왜 ‘하늘이 열리는 날’(개천절)에는 ‘국경일’인데도 그에 걸맞은 ‘잔치’가 없었고, ‘공휴일’로 다시 지정된 ‘한글날’에는 온 국민이 눈여겨볼 만한 ‘행사’가 없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가는가?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자. 이 ‘피의 잔치’를.
윤구병 농부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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