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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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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한다’는 맹세는 예기치 않
은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약속이다.
이런 점에서, 박근혜 정권은 사랑
부재, 정치 부재 시대의 표상이다.
얼마 전 ‘새로운 공산주의 이념’을 주제로 한 콘퍼런스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책 <사랑예찬>의 첫 장에는 우리 시대 사랑에 관한 한 풍속도가 소개되고 있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위험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 이것은 한때 파리 시내를 뒤덮은 만남 알선 사이트 미티크(Meetic)의 광고 문구들이다. 물론 ‘안전한 사랑’을 소유하는 방법을 코치하는 전문회사 이야기는 새롭지도 신기하지도 않다. 어느 때부턴가,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랑을 추구해서는 안 되며, 위태롭고 불안한 삶에 대한 보험으로 사랑(결혼)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시대의 처세술로 체득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얻었다고 믿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문득 고개를 들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주머니 속의 담배꽁초처럼 내던져버려 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말이다.
사랑은 우연의 형식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사건이며, ‘성차’(性差)에 대한 진리를 생산하는, 곧 유아론적 주체에서 벗어나 ‘둘’이라는 최초의 다수를 만들어내는 절차라는 바디우식 사랑론을 여기서 길게 소개할 생각은 없다. 달라진 시대의 반영일까, 아니면 내 나이의 변화 탓일까, 바디우의 <사랑예찬>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비해 좀 지루하게 읽혔다. 바디우는 위험 없는 사랑이라는 환상은 ‘전사자 제로 전쟁’이라는 미군의 프로파간다처럼 ‘사랑의 시체’를 숨기고 있으며 진정한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진정한 사랑은 ‘셋’을 모르기 때문에 셈하여지지 않는 둘이 만들어내는 사건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셈법으로서의 ‘사랑-보험’은 무엇을 만들어내는가에 대해서까진 차마 말하지 않는다.
사랑이 가슴 설레는 사건이기를 멈추었을 때, 셈법 속의 둘은 다른 대상인 ‘셋’을 욕망한다. 이 셋에 대한 욕망을 쉽게 ‘불륜’(不倫)이라 부르는 것은 퍽 고루하다. 그것은 사랑-보험으로서의 결혼 밖의 사랑(의 가능성)을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난’ 것으로 단숨에 배제해버린다. 문제는 그러한 간단한 치부가 지금 이 시대의 사랑이 처한 근원적 위기를 감추는 장막에 불과한 것이라는 데 있을 터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불륜의 시대>는 그러한 거추장스런 윤리적 장막조차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 이 시대의 사랑(혹은 불륜)의 풍속도이다. 영화는 불륜이 형식만 남은 결혼의 단순 보완재를 넘어 처음부터 위험을 제거한 사랑을 선택한 현대인의 필연적 운명의 형식이 되었음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잘나가는 문학출판사 사장은 자신의 섹스 상대인 작가에게 성애 도중 아내의 생일 선물로 무엇이 좋을지 묻는다. 사랑은 선언도 맹세도 약속도 강요도 그 어느 것도 아님을 암시하듯 영화 속의 인물 누구도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불륜은 사랑의 배신이 아니라, 사랑이 부재한 현실을 지배하는 공기일 뿐이다. 그래서 아내와의 형식적인 성애도, 정부(情婦)와의 격렬한 성애도 하나같이 건조하기만 하다.
이러한 사랑의 부재를 메우거나 공허가 게워내는 것은 맥락을 잃은 말들이다. 좌익서적이든 삼류 멜로든 잘 팔리던 옛날이 좋았다며 쓰레기 문화만 남은 현실을 개탄하던 출판사 사장은, 하지만 자신이 방금 욕하던, 책 안 보는 맹탕들과 쉬운 걸 어렵게 써서 ‘출판사 말아먹는’ 필자들을 가리켜 “귀엽다”고 말한다. 바로 이 대목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불륜이 말과 지시 대상(사물이나 사태), 인간의 행위를 이어주는 연관과 맥락이 상실된 시대의 은유로 읽히는 것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규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륜은 어떤 죄의식도 동반하지 않는다. 사랑이 부재한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결혼이라는 형식과 사랑이 떠난 공허한 성애와 화폐순환과 상품의 교환양식을 닮은 이해관계이다. 출판사 사장과 작가 사이의 불안한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그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드는 ‘인세’ 이야기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랑을 믿지 않으므로, 사랑에 대해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사랑을 두고 선언하거나 맹세하지 않는다.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 위험이 제거된 안전장치에 해당하는 교환양식이라는 것은 그것이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수명이 100살로 연장된 시대이므로 결혼도 20년마다 갱신해야 한다는 영화 속 작가의 말이 내 귀에는 4, 5년마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바꾸면 우리의 민주주의가 별 탈 없이 유지될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가 사랑을 믿었던 때가 있었듯이, 민주주의를 믿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사랑이라는 말이 누구의 마음도 흔들지 못하고 인간 존재들에게 어떤 생명력도 불어넣지 못하는 무료한 것으로 전락했듯이, 민주주의 역시 어떤 위험한 모험도 아니며 투표장에서의 선거행위로 축소되고 말았다. 격렬하고 난폭한 섹스에 매달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믿을수록 결합이 아닌 분리를 경험하게 되듯이, 민주주의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대의제라는 제도와 일치시킬수록 그것은 사회적 실재를 설명하지도, 주어진 현실을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형해화된 껍데기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사랑에 대해 더는 새로운 말을 할 수 없을 듯 보이는 것처럼,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새로운 언어도 필요치 않다고 간주되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박근혜 정권을 ‘반동의 시대’로 비판하기 전에, 나는 우리가 민주주의라 부르는 것이 광범위한 합의에 이르렀다는 시대에 민주주의의 공동화(空洞化)라는 역설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먼저 숙고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헌정이나 통치체제의 한 형태로 이해하고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유일하게 좋은 제도로 합의했다는 데서 생겨난 역설이다. 이 합의가 민주주의를 고사시키고 우리가 현실을 변화시키는 가능성으로서의 정치를 소멸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위험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추구와 그 결론으로서의 안전한 결혼이 사랑을 텅 빈 집에 갇히게 하고 불륜을 창궐케 한 것이라는 주장만큼이나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대의제 아래에서 대표하는 것은 대표되는 것보다 언제나 과잉된다. 그리고 항상 이 사실은 숨겨진다. 이 과잉은 결코 통치될 수 있거나 합의에 의해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인민의 지배’라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 본래의 의미는, 통치할 자격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갖는 권력으로 민주주의를 새롭게 조직하는 것이 가능할 때, 단지 상징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실재와 관련을 갖게 되는 어떤 미지의(미완성의) 삶의 양식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가’ 하는 정치인의 항변을 들을 때마다 실소가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정치라는 공간에서 그 둘 사이의 경계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 때문이었다. 조르조 아감벤에 따르면, 우리의 민주주의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은 ‘맹세’이다. 말한다는 것은 곧 맹세를 내포한다. 이는 이 둘 사이에 끊임없는 어긋남, 메울 수 없는 틈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말하는 동물인 인간은 언어에 자신의 본성을 걸고 말과 사물과 행위를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하나로 묶어야만 하는 절박한 요구를 지닌다. 그리고 ‘너를 사랑한다’는 맹세는 메울 수 없는 공백을 호출하며, 예기치 않은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약속이다. 이런 점에서 박근혜 정권은 사랑 부재, 정치 부재 시대의 표상이다.
<불륜의 시대>에는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이 있다. 출판사 사장의 아내는 서울에서 추방당한 이슬람 원리주의자 청년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로 향한다. 거기서 청년은 테러를 거행하고, 그녀는 이슬람 교리를 위반한 사랑을 꿈꾼 대가로 죽임을 당한다. 불륜의 시대,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민주주의가 다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를 묻게 되는 요즘이다.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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