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27 19:05
수정 : 2014.03.27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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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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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인간이 이해하면 할수록 인간에게 ‘무의미’하다. 그 무의미한 우주에서 인간은 어떻게 의미를 만들 수 있는가? 무의미한 우주에서는 인간도 별수 없이 무의미한가? 과학교육은 과학이 제기하는 무의미성의 도전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우주 빅뱅에 관계된 이야기는 언제나 뉴스다. 빅뱅 가설이 우주의 기원과 생성에 관한 가장 믿을 만한 이론으로 올라서고 난 이후에도 빅뱅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한 천체물리센터가 남극의 전파망원경으로 138억년 전 빅뱅 직후의 원시중력파를 찾아냈다는 소식도 그래서 텔레비전 뉴스감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중력파 발견의 과학적 중요성보다는 “그래서 뭘 알게 되었다는 거냐?”라는 질문을 충족시키는 데 더 관심이 많다. 과학자들은 대중의 이런 궁금증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좀 알아듣기 쉬운 해설들이 튀어나온다. “원시중력파의 흔적을 찾아냈다는 건 말이죠, 우주가 빅뱅 후 수십억 수백억년을 두고 천천히 팽창한 것이 아니라 찰나보다도 더 짧은 찰나에 ‘급팽창’했다는 소립니다.” “빛도 빅뱅과 함께 우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빛은 중력파의 시공간에 갇혀 있다가 빅뱅 이후 38만년이 지나서야 터져나온 겁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과학적 해설들은 사람들의 가슴에 숨겨진 어떤 궁금증, 어떤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답변도 주지 않는다. 궁극적인 질문들이란 우주와 인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무엇이며 우주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우주가 언제 어떻게 터져 나오고 어떻게 팽창했건 간에 그 우주 공간 한 귀퉁이에 작은 점처럼 떠 있는 이 지구 행성에서 10억분의 1의, 10억분의 1의 10억분의 1보다도 더 작은 먼지처럼 존재하는 인간에게 우주는 무엇인가-이것이 보통 사람들을 궁금하게 하는 절실한 질문이다. 거기에는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질문들이 연거푸 따라붙는다. “이 지구가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졌을까요?” 중학교 과학선생님의 이런 질문 앞에 아이들은 일단 배운 대로 “아니요!”라고 큰 소리로 대답한다.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주가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을까?” “아니요!” “지구 생명체들이 어떤 설계에 따라 차례차례 창조되었는가?” “아니요!” “우주가 인간의 운명에 무슨 관심을 갖고 있을까?” “아니요!”
아이들은 ‘아니요’라고 말해야 과학적 대답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니요’를 연발한다. 과학선생님들은 그 아이들의 가슴에 숨겨진 불만을, 똬리 튼 불안을, 다스리기 어려운 궁금증을 알고 있을까? 그런 불안은 기독교 집안의 아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 문제를 떠나 아이들의 가슴은 대체로 편치 않다. 그 편치 않음은 한두 개의 다른 질문들을 던져보면 금세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우주에서 인간은 뭐냐?” 아이들은 잠시 멍해졌다가 장난스런 답변들을 쏟아놓는다. “그야 엿도 아니지요.” “낙동강 오리알이오!” “상갓집 개요!” “구더기 같은 거요.” 아이들의 이런 장난스런 답변은 사실은 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답변하기 어려운 어떤 것, 누군가에게서 답을 듣고 싶으나 아무도 만족할 만한 답을 좀체 전해주지 않는 어떤 것들이 그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아이들은 기피성의 장난조 응답으로 그 답답함을 표현한다. 아이들을 결정적으로 답답하게 하는 것은 이런 질문이다. “이 우주에 인간은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아이들은 대답한다. “모릅니다.” “우연히 존재하죠. 그러니까 이유는 없습니다.”
현대 과학교육이 중등과정이건 고등교육에서건 교육적 관심의 초점에 두어야 할 것은 ‘지식’과 ‘의미’를 어떻게 결합하고 연결시킬 것인가라는 문제다. 과학교육의 일차적 과제는 자연에 대한 정확하고 합리적인 지식을 전수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 지식은 돌멩이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전자매체에 단순 입력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살과 피를 가진 인간, 이 지상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 인간에게 전수된다. 그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다. 그를 복잡한 존재이게 하는 것은 그가 자기 존재에, 자기가 하는 일에, 그리고 자기 삶의 전 과정에 세금 매기듯 세 가지 큰 부담을 안기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과 활동과 존재 방식이 어떤 식으로든 의미, 가치,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요청이 그것이다. 인간의 요청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당연히 ‘인문학적 요청’이 된다. 그 요청을 존중하는 것은 과학교육 고유의 책임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 요청을 무시할 때 과학교육은 실패한다. 과학교육은 의미를 잃고, 의미를 잃은 교육은 실패한 교육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빅뱅우주론에서 과학교수들이 학생들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것은 인간 존재에 아무 관심도 없는 냉랭한 우주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의 말처럼 우주는 인간이 이해하면 할수록 인간에게 ‘무의미’하다. 그 무의미한 우주에서 인간은 어떻게 의미를 만들 수 있는가? 무의미한 우주에서는 인간도 별수 없이 무의미한가?
이것이, 내 생각에, 현대 과학 특히 빅뱅우주론이나 진화생물학 같은 우리 시대의 거대한 과학적 성취들이 현대인에게 제기하는 ‘무의미성의 도전’이다. 과학교육은 과학의 도전을 전달하는 일에만 만족할 수 있는가? 아니다. 과학교육은 과학이 제기하는 무의미성의 도전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일부 진화론자들은 의미, 가치, 목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똥밭에 넘어진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해진다. 의미는 무슨 의미? 아직도 가치의 문제에 매달려 있나? 삶의 목적? 지금이 어느 땐데 목적론을 꺼내는가? 이런 태도를 가진 과학자들에게 과학교육이 맡겨지는 것은 누구에게도 득이 아니다. 빅뱅의 초기 단계에 대한 최근의 과학적 발견 앞에서 시민, 학생, 사회, 교육 담당자들이 관심을 가질 일은 새로운 지식 몇 개를 챙기는 일 말고도 ‘빅뱅에서 인간까지’의 우주 진화와 인간 존재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 관계의 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무의미해 보이는 우주 안에서의 인간 활동의 가치와 목적은 무엇인가, 과학교육과 인문학은 왜 불가분의 관계로 융합되어야 하는가, 융합적 과학교육이 왜 대학교육의 필수 교양과정으로 배치되어야 하는가, 국가 정책담당자들은 왜 반드시 과학을 이해해야 하는가-이런 문제들을 사유하고 토론해보는 일이다.
과학은 가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말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완전히 틀린 소리다. 과학 그 자체가 인간이 발명한 거대한 가치다. 근대과학 이후 과학 하기의 필수 조건으로 올라선 일련의 절차들도 과학이 만든 소중한 가치들이다. 과학 정신도 그런 가치이며 옹졸한 국가주의, 부족적 배타주의, 인종 편견의 거부도 과학이 퍼뜨린 가치다. 민주주의, 합리성, 환대, 경청과 타자 존중도 과학이 올려세운 가치들이다. 칼 세이건의 1980년 걸작 과학 대중화 다큐 <코스모스>가 34년 만에 <코스모스: 시공간 오디세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만들어져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신작 다큐에 진행자로 등장하는 닐 타이슨 교수는 고등학생 시절 세이건 교수를 만나고 인생행로를 결정한 사람이다. 세이건의 횃불을 타이슨이 이어받은 것이다. 세이건이 ‘미래의 과학자에게’라고 서명해서 준 책 한 권, “오늘 밤 눈 때문에 버스가 못 가면 그냥 우리 집으로 와서 자게”라던 세이건의 따스한 한마디-이런 격려와 환대가 타이슨의 삶을 안내한 것이다. 과학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의미와 가치와 목적이 만들어지는 모습이다.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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