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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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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3월21일 회현동 요정 ‘회림’. 육군 참모차장이 여당 원내총무의 목 근처를 잡고 야당 총무 쪽으로 끌고 갔다. 화가 치민 내가 술이 든 글라스를 뒷벽을 향해 던졌다. 그러자 ㅇ 소장은 발차기로 내 얼굴을 차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의가 하나회 소속으로 신군부 쿠데타의 주역들이었다.
육군 수뇌부가 국회 국방위 의원들을 회식에 초청한 자리에서 말썽이 생겨 국회의원이 군장성에게 폭행당한 이른바 국방위 회식사건이 발생한 게 1986년 3월21일. 30년 가까운 세월도 흘렀고, 또한 이제까지 사건 전말에 관해서는 함구해온 당사자인 나의 증언도 남겨둘 만한 때가 되었기에 처음으로 간단히 몇가지 말해 두려 한다. 증인들이 살아있는 동안 검증을 거쳐 사건에 관한 정본(定本)을 마련할 필요가 있어서다. 최근에도 언론에 폭탄주사건 운운하며 언급되었다.
그 사건에 관하여서는 김재홍 박사가 <동아일보> 기자 때 기록을 남겼고, 또한 2권으로 된 <군>이라는 책의 제1장에 수록하였다. 그때 당사자의 한사람인 나는 인터뷰를 회피했는데, 김 박사의 글을 보니 취재를 잘한 듯 대체로 맞는 이야기 같았다. 단 한가지, 유리잔 파편으로 군장성의 얼굴에 피가 났다는 부분 말고는. 뒤를 향해 던진 글라스가 어찌 파편을 반대방향인 앞쪽으로 튀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예의에 안 맞게, 의원들 뒤가 노래를 하던 넓은 공간이었다. 청와대의 조사에 둘러댄 이야기일 것이다.
회현동 ‘회림’에서의 술자리에 여당 원내총무인 이세기 의원이 2시간쯤 늦게 왔다. 미안했던지 노래를 하겠다고 자청해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때 정동호 참모차장이 그의 목 근처를 잡고 소파에 술에 취해 드러누워 있는 김동영 야당 총무 쪽으로 끌고 갔다. “이세기” 했는지 모르지만 “이쌔끼”로 들렸다. 이 총무는 넥타이가 당겼던지 “아퍼, 이거 놓아” 하며 얼마간 끌려갔는데 마침 마이크를 잡고 있어서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김동영 총무는 야당의 실세로 입이 걸쭉했는데, 회식 장소에 와서 여당 총무가 안 온 것을 보자 “실세는 안 오고 똥별만…” 운운했다는 전문이다. 나도 늦게 가서 그 “똥별” 운운은 직접 못 들었다.
여하간 그런 심한 말을 듣고 화가 났던 참에 이 총무가 늦게 오니까 그를 김 총무에게 “왔다”고 말하려 끌고 가려 한 것이다. 김 총무는 술에 취해 녹아떨어져 있고.
나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군의 수뇌부 8명이 있는 앞에서 여당의 원내총무가 참모차장에게 목덜미를 잡혀 비명을 내며 끌려가다니….
참 공교로웠다. 육사 11기인 권익현 의원도 국방위원인데 그가 불참했다. 육군 쪽이 모두 후배 기이니 그가 왔더라면 분위기는 난폭해지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또 국방위원장이 공군 소장 출신인 천영성 의원이다. 군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각 군 간의 관계를 짐작할 것이다.
나의 선거구가 서울 강서구이고, 거기에 공수 제1여단이 주둔하고 있기에, 나는 박희도 참모총장과 그가 여단장 시절에 인사를 나눈 바 있다. 그래서 그것도 구면이라고 그가 반가웠던 터라 그의 옆으로 가서 어떻게든 분위기를 원만히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또한 천 위원장에게도 분위기를 바꾸라는 건의를 했다.
그러나 아무 조치도 없이 어색하고 냉랭한 자리가 계속된다. 그래서 화가 치민 나는 “국회의원들을 초대해 놓고 이렇게 대하기가 있느냐”는 요지의 고함을 치며 술이 든 글라스를 뒷벽을 향하여 던졌다. 물잔까지 2개쯤이었을 것이다. 항의의 표시다.
그러자 내 앞 술상 건너편에 있던 ㅇ 소장이 일어서더니 발차기로 내 얼굴을 차서 피가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다. 소독 수건이 두 장쯤 필요했다. 나는 그 피 묻은 수건을 들고 “국회의원을 이렇게 때리라고 위에서 시키더냐, 청와대에 가서 물어보자”고 소리를 쳤다. 그들은 거의가 하나회 소속으로 신군부 쿠데타의 주역들이었다.
그러자 여러 사람이 일어서서 나를 진정시키고…. 군 쪽에서는 2층에서 1층으로 옮겨 축소된 인원으로 술자리를 다시 마련하며 “술자리의 일이니 술자리에서 풀자”는 말을 하였다. 나도 술자리의 일이니 그것으로 끝내려 하였다. 그러는 것은 우리나라 술자리의 여하튼 전통이기도 하다.
집으로 이기백 국방장관이 전화를 걸어와 사과의 뜻을 말하였다. 그는 사단장 시절에 육사 11기인 나의 중학동기생 장군이 주선한 술자리에서 나와 만났던 사이다. 정체불명의 험한 협박전화도 몇번 왔다.
다음날이 김용철 대법원장 지명자의 국회 인준 표결이다. 선배이고 알고 지내던 분이라 표를 보태주려고 부르튼 입을 무릅쓰고 등원하였다. 나는 전날 밤의 일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동영 총무가 등원을 하지 않아 문제가 커졌다. 본인은 술자리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목욕탕에서 넘어져 다쳤다는 것인데, 주변에서는 군 쪽에 의해 집단구타를 당해 그리되었을 것이라고 소문이 났다. 그가 작고하여 이제는 물을 수도 없다.
여하간 야당이 흥분하여 들고일어났다. 국방위가 소집되어 국방부 쪽을 참석시킨 가운데 성토장이 되었다. 그것은 속기록에 남아 있다. 의원들은 나보고 진상을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술자리의 약속을 지켜 모두 끝난 일이라고 함구로 일관하였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곳으로부터 중상모략을 당했다. 거대 보수신문의 어느 언론인이 별로 칼럼을 쓴 경력이 없는데도 기명칼럼을 써서 엉뚱한 풀이를 한 것이다. 고려 때 문신이 무신의 수염을 불로 그슬리는 등 횡포를 저질러 ‘무신의 난’이 일어났는데 국방위 사건도 그런 것이라고 비유했다. 참, 아첨의 역사에 남을 만한 칼럼이다.
‘회림’ 요정의 기생들이 조사받느라고 고생했다는 이야기다. 큰 사건이니 얼마나 많은 곳에서 조사를 했겠는가. 청와대, 보안사, 정보부, 검찰, 경찰…. 손쉽게 조사할 대상이 목격자가 된 기생들이다.
나는 그 사건의 종합보고를 받고 판정을 내린 전두환 대통령이 그래도 공정했다고 보고 이제까지 그렇게 말해왔다. 집권 과정의 잔인함과 통치 과정의 자세는 달랐던 것 같다. 시대상황의 변화도 있다. 정동호 참모차장을 즉각 예편시켰다. ㅇ 소장도 먼 지방으로 전보했다. 물론 시일을 두고 나중에 후속조치가 있었다. 정동호씨는 국회의원 공천을 주고, ㅇ 소장도 나중에 중장으로 예편 후 높은 관직을 맡겼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다만 대통령이 되기 전의 노태우 의원은 나와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작은 목소리로 “너 한번 맞아볼래” 하였다. 짐작건대 자기가 아끼던 후배가 그 사건으로 인하여 출세의 길이 막힌 데 대한 노여움을 나에게 표한 것인 듯도 하다. 작은 일화이지만 전두환씨의 경우와 함께, 대통령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료로 말해 두는 것이다.
노태우씨와 경북고 동기이기도 하여 실세가 된 김윤환 원내총무는 <조선일보> 때 친한 동료이기도 하였는데, 얼마 후 나에게 위원회를 옮기는 게 어떻겠느냐고 친구로서 상의를 한다. 그래서 국방위를 떠났다. 나는 되도록 많은 위원회를 경험하여 국정의 이모저모를 알자는 축이다.(generalist, 총괄적 인물) 한 위원회만 계속하여 전문성을 쌓는 의원도 있다.(specialist, 전문적 인물)
한참 시일이 지난 다음이다. 나하고 가까웠던 민기식 대장(예편 후 국회에 진출하여 국방위원장 역임)이 전직 육군 참모총장들의 시찰 케이스로 전방을 갔을 때다. 거기서 국방위 회식사건과 관련된 한 장성이 민 대장에게 “각하, 국회의원하고 장군하고 어느 쪽이 더 높습니까” 하고 묻더란다. 뭐라고 답변해야 할까. 역시 머리가 잘 도는 민 장군은 “이 사람아, 그것은 사과하고 배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좋은 과일인가 하고 묻는 것과 같은 거야. 장군은 장군 격이 있고 국회의원은 국회의원 격이 있는 것이지.”
사건이 있은 후 얼마 안 되어 인하대의 윤하선 교수는 정년 기념으로 낸 책에서 이렇게 썼다. 몹시 흥분했던 것 같다.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군벌의 권력핵이 기타 권력핵보다 우세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일화였다 하겠다. 이 사건 처리 여하에 따라서 군벌의 힘의 귀추가 결정될 것이다.”
일본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유명한 작품 <라쇼몽>(羅生門)은 한 사건을 두고도 여러 가지 시각이 있다는 묘사이다. 혹 국방위 회식사건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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