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5.08 19:05
수정 : 2014.05.09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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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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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보다 돈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뒤집어진 가치질서를 바로잡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면 그 전도된 질서는 바로잡아야 한다. 사회 전체가 결의를 세워야 하고 시민들이 나서야 하고 시장지상주의적 기업 경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 운영 방식이 고안되어야 한다. 교육도 달라져야 한다.
1999년 6월의 세칭 ‘씨랜드 참사’ 때 유치원생 아이를 잃어버린 한 젊은 어머니가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났던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아이를 잃고 후속 수사과정을 지켜보던 그 어머니는 더 이상 이런 나라에 살 수 없다며 이민을 결심한 것이다. 운동선수였던 그 어머니는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들을 모두 반납하고 떠나면서 “한국 사회에 반성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1999년 여름에 있었던 슬픈 이야기다. 그 여름, 상실의 트라우마를 견디다 못해 한국을 떠난 사람은 그 젊은 엄마만이 아니다. 1995년 6월의 삼풍백화점 붕괴 때 딸을 잃은 한 아버지는 사고 발생 4년 뒤인 99년 여름 딸의 무덤에서 자살자의 주검으로 발견된다. 그는 직장도 그만두고 노상 딸의 무덤을 배회하다가 끝내는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운동선수였던 엄마가 이민의 방식으로 이 나라를 떠났다면, 자살한 남자는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 나라를 떠난 것이다.
지난 4월16일의 세월호 참사는 그 자체만도 충분히 참담한 것이지만,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그 참담함의 경험에는 반드시 짚고 가야 할 또 다른 차원이 있다. 1993년의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이후만 따져도 20년 세월 동안 수십건의 크고 작은 안전사고를 겪은 대한민국에서 어째서 유사한 인재형 사고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가? 이 사실은 사고 발생 때마다 반복해서 지적되어온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반복성’이다. 같은 사실을 20년 동안 반복 지적해오면서도 어째서 우리는 20년 동안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는가? 이 반복성은 그러므로 그 자체로 기이하고 놀라운 것이다. 세월호 사건 수습 과정에는 이 놀라운 반복의 능력 그 자체를 문제 삼는 절차가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는다면 사건사고 재발의 근본적 가능성은 차단되지 않는다. 그 놀라운 반복의 능력을 지속시키는 힘의 비결은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그 힘의 소스는 두 가지다. 첫째, 문제의 현상적 원인을 웬만큼 알면서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는 의지와 관행, 마피아적 이해관계의 유착, 검은 공생관계의 유지가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불가능하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는 일과 문제를 푸는 일은 따로 놀기 일쑤다. 예컨대 선박의 경우 화물 과적이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 몰라서 과적현상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뻔히 알면서도 규정의 몇배씩 짐을 싣고, 들키면 돈으로 해결하고, 들키기 전에 돈을 풀어 관리감독의 눈을 피해 간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문제의 원인을 안다고 해결의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문제의 더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어 분석의 수면 위로 드러내고 그로부터 문제 해결의 단서를 찾으려는 사회적 정치적 의지가 사실상 마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마비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강력한 사회적 무의식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무의식은 ‘생각하는 사회’를 불가능하게 하며 사회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지적 정신적 에너지를 침묵시킨다. 말하자면 그것은 ‘생각이 없는 사회’를 유지시키는 강력한 힘의 소스다. 우리가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무참한 사건사고의 반복을 차단하려는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이고자 한다면 무엇이 그런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문제에 깊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이 쓸데없이 난삽해지지 않게 좀 쉬운 각도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법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세월호 침몰이 우리 사회에 제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갱신’의 요청이다. “한국인이여, 당신이 사는 나라를 좀 갱신하십시오”라는 것이 그 요청 메시지의 골자다. 사실 이런 요청은 20년 전 서해훼리호 이후 지금까지 수십번 제기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그 요청은 한번도 존중된 적이 없다. 21세기의 도래를 목전에 두었던, 그리고 씨랜드 참사를 겪었던 1999년 나는 어떤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21세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회가, 나라가, 국민들 모두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한 결심으로 한국의 21세기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사회갱신’의 작업이다. 새해 새봄에 만물이 갱신하듯 사회도 주기적 갱신을 필요로 한다. 사회가 썩고 문드러져 죽음이 득실거리고 악취가 온 우주에까지 풍겨나가 별들조차도 코를 감싸고 얼굴을 숨길 때, 그 사회는 갱신이 필요한 사회다. 지금 우리가 그런 사회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썩은 사회, 죽음이 득실거리는 사회, 악취 풍기는 사회를 한바탕 새로운 사회로 갈아치우려는 갱신의 노력이 없고 갱신의 주기가 너무 길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갱신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없다. 인식이 없으매 갱신의 의지와 프로그램이 있을 리 없다.”
그 글은 이렇게 더 계속된다. (독자여, 그 글의 긴 인용을 용서하시라. 그때 사정과 지금 사정이 너무도 유사하다.) “생각해보라. 갱신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21세기는 무엇인가? 갱신이 없다면, 갱신을 위한 행동 프로그램과 실천이 없다면 우리에게 21세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죽음의 세기, 썩고 냄새 나는 세기의 연장에 불과하다. 두꺼비에게 헌 집 주듯 현대 한국인의 부정적 능력들을 반납하고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그래서 사람을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새집, 새로운 사회 만들기를 다짐하는 사회적 결의가 지금처럼 절실한 때도 없었다. 놀라운 일에 놀랄 줄 알고 아파할 일에 아파하고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능력, 돌아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할 줄 아는 능력의 회복--거기서부터 갱신의 힘은 출발한다. 새로운 세기의 도래를 경축하기에 앞서 우리에게는 따갑고 아픈, 그리고 치열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성찰의 한국인이 맨 먼저 대면하는 것은 인간을 인간에게 하는 능력의 회복이라는 아주 간단해 뵈는 일이 지금 한국에서는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이유도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가치전도, 말하자면 가치질서가 물구나무섰다는 것이 그 이유다. 값진 것에는 똥값을 매기고 똥에는 가장 높은 가치를 매기는 것이 거꾸로 된 가치질서, 곧 가치의 물구나무서기다. 사람들이 나라를 떠나는 것은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사람을 그 나라에서는 지켜낼 수 없고 사람의 존재가 그 나라에서는 똥값으로 처리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성찰의 시간은 이 전도된 상황의 구체적 현실 내용을 하나하나 점검할 것을 요구한다.”
갱신을 위한 아픈 시간이 아니라면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일 것인가? 그 시간까지도 다시 헛되이 떠내려보낼 것인가? 사람보다도 돈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의 뒤집어진 가치질서를 바로잡는 일은 우리 사회는 물론 지금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고 간단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면 그 전도된 질서는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자면 사회 전체가 결의를 세워야 하고 시민들이 나서야 하고 시장지상주의적 기업 경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사회 운영 방식이 고안되어야 한다. 교육도 달라져야 한다. 그 사회 운영 방식의 핵심에는 늘 두 가지 질문이 놓여 있어야 한다. “사회는 어느 때 실패하는가?”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을 유지하는 사회가 생각하는 사회, 성찰하는 사회다. 그런 사회만이 붕괴를 최소화할 능력을 확보한다.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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