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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6.02 18:52 수정 : 2016.06.02 22:04

왼쪽부터 국보78호, 주구사(中宮寺·중궁사) 목조반가사유상

주구사 반가사유상이 모국이나 다름없는 한반도에 와서 그의 조상인 우리 국보78호와 마주하고 있는 것을 보자니 한일 고대문화의 교류가 재현된 것만 같은 감회가 일어난다. 1400년 만의 만남인 것이다. 상업적인 ‘블록버스터 전시회’와 질을 달리하는, 오직 국립중앙박물관만이 할 수 있는 특별전이다.

박물관의 특별전은 대개 3년 전에 결정된다. 너무 빠른 것 같지만 실제 기획 자체는 오히려 이보다 훨씬 전에 이루어진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 특별전의 시작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복궁 시대를 마감하고 용산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소장 유물 약 10만 점의 이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무진동 5톤 트럭 약 500대 분량으로 8개월간 무장한 호송원이 탑승하고 앞뒤에서 경찰이 경호하는 대이동이었다.

이 기간 중인 7월부터 10월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은 구관(현 국립고궁박물관)에 국보 78호와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두 점만을 3개월간 전시하였다. 전시실 넓은 홀을 어두운 분위기로 만들고 높은 천장에서 두 불상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아주 대담한 전시였다. 그러나 그 고요의 공간에 감도는 두 반가사유상의 거룩한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해 10월 서울에선 국제박물관협의회(ICOM)가 3년마다 개최하는 총회가 열렸다. 그때 열린 심포지엄에서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인 이영훈 관장은 이 전시회를 소개하면서 ‘한국의 국보 83호와 일본 국보 1호인 고류사(廣隆寺·광륭사)의 목조반가사유상이 만나는 전시회’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양국 간의 긴밀한 문화교류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전시회가 될 것이라고 제안한 바 있다.

지금 열리고 있는 ‘한일 국보 반가사유상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몇 차례 시도가 있었고 3년 전부터는 ‘2015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으로 두 반가사유상의 만남을 추진하기로 양국 국립박물관이 합의하였다. 그러나 정작 고류사 쪽에서 출품을 승낙하지 않았다. 이 불상이 사찰 밖으로 나간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똑같은 반가사유상으로 또 다른 관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 국보 78호(사진 왼쪽)와 짝을 이루는 주구사(中宮寺·중궁사) 목조반가사유상(사진 오른쪽)의 만남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상의 네 반가사유상은 모두 600년 전후해서 한·일 양국에서 제작된 것이지만 앞의 한 쌍과 뒤의 한 쌍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국보 83호와 고류사의 반가사유상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이미지에 가깝다면, 국보 78호와 주구사의 상은 현세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천상의 미륵이 현세에 나타난 것만 같은 모습으로 각기 한국인, 일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불상은 이를 경계로 하여 일본 양식으로 넘어가게 된다. 주구사 불상 역시 해외 전시에 출품된 예가 없었지만 모리 요시로 전 총리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의 간청을 사찰 쪽에서 받아들여 성사된 것이었다.

주구사는 호류사(法隆寺·법륭사) 바로 곁에 있는 사찰로 쇼토쿠 태자가 발원한 7대 사찰 중 유일한 비구니 사찰이다. 이 절에는 622년 쇼토쿠 태자가 죽자 그의 아내가 극락세계에 있을 남편을 상상하며 제작한 ‘천수국 만다라 자수 휘장’(天壽國 曼茶羅 繡帳)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자수의 뒷면에는 고구려의 화가 가서일이 밑그림을 그렸다는 명문이 들어 있어 고대 한·일 간의 문화적 교류를 증언해주고 있다.

주구사의 반가사유상은 높이 168㎝의 등신대 흑칠목조상으로 평화로운 미소에 윤기나는 검은 피부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100년 전 일본 근대 철학자이자 문필가인 와쓰지 데쓰로는 <고사순례>에서 이 불상을 한없이 예찬하였다.

“저 피부의 검은 광택은 실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이 불상이 나무이면서 청동으로 제작한 것처럼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저 맑은 광택 때문이리라. 이 광택이 미묘한 살집과 몸체의 요철을 아주 예민하게 살려주고 있다. 이로 인해 얼굴의 표정이 섬세하고 부드럽게 나타난다. 지그시 감은 저 눈에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사랑의 눈물이 실제로 빛나는 듯 보인다.”

그러면서 와쓰지는 이 목조반가사유상에 이르러 일본의 불상 조각은 비로소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 양식을 벗어나 7세기 후반 하쿠호(白鳳) 시대의 ‘정묘한 사실성’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아직 한반도 불상의 영향이 역력히 남아 있는 7세기 전반 아스카(飛鳥) 시대의 불상이다.

와쓰지는 시종일관 일본이 불교문화를 독창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래서 도래 양식의 전형인 호류사의 백제관음에서도 일본화되어가는 징후를 잡아내려고 했고, 어니스트 페놀로사가 호류사의 몽전(夢殿) 관음을 ‘조선풍’이라고 한 것에 대해 그는 ‘틀렸다’고 했다. 일본의 혼을 찾아가는 그의 시각에선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인 내 입장에서 보면 와쓰지가 ‘틀렸다’. 호류사와 주구사를 떠나 ‘하쿠호 시대의 귀공자’라 불리는 ‘불두’(佛頭)로 넘어가면 사실감에 충만한 일본 불상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주구사의 반가사유상은 마지막 도래양식이다. 이 반가사유상 이후 일본 불상이 변해가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와쓰지의 견해가 ‘맞다’. 그러나 이 불상의 조형적 연원을 생각하면 내 견해가 맞을 것이다. 일본인의 눈에는 그 이후가 내다보였고 한국인인 내 눈에는 그 뿌리가 먼저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속의 한국 문화를 찾아가는 나의 호류사 답사는 언제나 주구사의 목조반가사유상까지 이어지곤 했다.

그런데 유물의 장소성이라는 것이 묘하여 일본에 가서 볼 때는 그 양식의 연원이 먼저 떠올랐지만 이렇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나게 되니 불상 자체의 진실로 아름답고 거룩한 이미지가 다가오며 와쓰지의 이어지는 찬사에 공감을 표하게 된다.

“우리들은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다. 마음속 깊이 차분하고 고요히 묻어두었던 눈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이다. 여기에는 자애와 비애의 잔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다. 진실로 지순한 아름다움으로, 또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한 아름다움이다.”

그런 주구사 반가사유상이 모국이나 다름없는 한반도에 와서 그의 조상인 우리 국보 78호와 마주하고 있는 것을 보자니 한·일 고대문화의 교류가 재현된 것만 같은 감회가 일어난다. 1400년 만의 만남인 것이다.

이번 특별전도 12년 전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공간에 두 불상만을 전시하였다. 높이가 거의 배나 차이 나기 때문에 국보 78호가 왜소해 보이지 않도록 10미터 거리에서 마주보도록 배치되었다. 그리고 평소엔 절대로 볼 수 없는 불상의 뒷모습까지 볼 수 있다. 목조 불상의 보존을 위해 조도를 한껏 낮추어 전시장엔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이로 인해 이 고요의 공간에 감도는 신성한 신비감 속에 나는 오래도록 거기를 떠나지 못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요즘 우리 미술계에는 서양미술 컬렉션을 유치한 상업적인 ‘블록버스터 전시회’가 판을 치고 있는데 이와는 질을 달리하는, 오직 국립중앙박물관만이 할 수 있는 특별전이다. 이 전시는 양국 국립박물관에서 3주간씩 전시하기로 약속되어 이달 12일까지 열린 뒤 일본으로 건너가 6월21일부터 7월10일까지 도쿄국립박물관에서 ‘미소의 부처-두 반가사유상’이라는 제목으로 개최된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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