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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6.09 20:54 수정 : 2016.06.09 20:54

4·19 공간의 남북협상론이나 중립화론은 지금 재생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때의 일부 시각은 지금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점진적인 평화적 접근을 위해서 끊임없이 대화를 하여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무력통일, 흡수통일, 북한궤멸… 모두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대규모 저항이 마산에서 일어났다. <한국일보> 1면 편집을 맡고 있던 내 옆으로 오종식 주필이 다가와서는 “그거 의거라고 제목을 달아야 하지 않아” 한다. 그때의 사회 분위기는 그랬다. 자유당 정권에 대한 분노가 팽배해 있었다. 사장은 옆에 있다가 “회사 망하는 걸 보려고 그러느냐”고 했다. 결국 ‘마산에 소요’로 낙착된 것으로 기억한다.

4·19 당일 서울 중학동의 한국일보사 옥상에서는 계속되는 학생 데모대의 행렬이 보였고 이어 총성이 요란하게 들렸다. 안타까워 발을 굴렀다. 나이 많은 간부가 와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고 내려오라 했다. 야근 때 보니 심야에 불우 청소년으로 이루어진 데모대가 계속 구호를 외치며 신문사 앞거리를 왔다 갔다 행진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혁명 때 있는 광경이라고 책에서 읽었다.

<민국일보>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되는 신문사로 옮겼다. 정치부에서 일하고 싶어서다. 국회 출입과 혁신정당 담당이었다. 사회대중당을 중심으로 총선을 치른 혁신계는 그 후 통일사회당, 혁신당, 사회대중당 고수파, 사회당으로 4분되었다. 그러나 정당보다 중요했던 곳은 이들 모든 정당과 각종 사회단체가 참여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였다. 남북협상 추진의 주동세력으로 많은 명망가들을 간판으로 하고 있고 천도교 일부, 피학살유족회, 민민청 등 청년조직을 포용한 만만치 않은 조직이었다. 학생 사회에서는 판문점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한다고 열을 내고 있었다.

그때의 남북협상론에 대한 평가는 좀 까다롭다. 북의 경제발전 정도가 남쪽보다 훨씬 앞선 때이다. 민자통에서의 치열한 논쟁을 들은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통일사회당의 고정훈 선전국장은 “당신들 남북협상을 한다고 하는데, 그래 서울에 김일성 입경환영준비위원회를 만들 작정이오” 하고 신랄하게 반대했다. 그 후 통일사회당은 민자통에서 탈퇴하여 중립화통일연맹(중통련)을 구성했다.

남북협상론파는 아무튼 움직임을 보인 데 비해 중립화론파는 별로 적극성이 없었던 것 같다. 민자통은 그 후 서울시청 앞에서 이른바 2대 악법 반대 군중대회를 대규모로 조직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장면 총리의 사저가 있는 혜화동까지 횃불데모도 하였다. 불길했다. 때를 노리던 군부에 명분을 준 셈이다.

4·19 후 새로 생겨난 신문으로 <민족일보>가 있다. 대담한 민족노선으로 단시일 안에 성가를 올렸다. 그 신문의 30대 초 젊은 조용수 사장이 나를 고급 음식점으로 초대하더니 민족일보의 정치부 차장이 되어 국회와 정당을 맡아 달라고 부탁한다. 정치부 경력은 1년도 안 된 나에게 말이다. 나는 회사를 자주 옮기는 게 꺼려진다면서 사양했다. 만약에 옮겼더라면 민족일보의 그 후 수난에 비추어볼 때 몇 년쯤….

5·16이 나서 딴 세상이 되었다. 혁신당의 정책위의장으로 있는 권대복군이 찾아왔다. 그는 학생 때부터의 친구인데 진보당의 여명회장도 했다. 독립운동의 노선배이고 혁신계에서 존경을 받는 신숙씨 등이 5·16을 지지하고 나섰는데 5·16세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무조건 잠적하라고 충고했다. 그런데 그는 관망하다가 구속되어 7년쯤 옥고를 치렀다.

화는 나에게도 닥쳤다. 5월18일 출근하는데 회사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사원이 조동건 편집국장의 귀띔이라면서 기관원이 와 있으니 잠적하라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학 때의 진보적 동아리 친구들이 거의 모두 일단 연행되었다. 학생 때 서울대 문리대 정치과의 신진회와 서울대 법대의 신조회는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동아리라고 자칭하였다. 그리고 고려대 경제과의 협진회와 유대하였다. 졸업 후는 신조회로 단일화하여 동인지를 몇 번 내기도 하였다.

나는 사병으로 입대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부대에 복무하고 있는데 506방첩대에서 잡으러 왔다. 지금의 조선호텔 길 건너편에 있던 방첩대에 연행되어 가니 두툼한 스크랩을 내놓는다. 민국일보에서 내가 쓴 기사란다. 살펴보니 내가 쓴 것은 그중 4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수사관은 납득하고 내가 쓴 것만 고르란다. 아마 내가 잠적한 뒤 회사 사람들이 불리한 것은 몽땅 나에게 떠넘긴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쓴 기사만 갖고 조사를 받았는데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자 신조회 동아리의 동인지가 나왔다. 나는 거기에 중립화통일에 관한 짧은 글을 기고한 것이다. 당시 미국의 맨스필드 상원의원이 오스트리아식 중립화통일을 제기하여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도 “한반도의 핀란드화?”란 제목의 칼럼을 내는 등 중립화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그래서 나도 아마추어 통일론을 시도해본 것이다.

방첩대 수사가 4~5일 계속되는 동안 나는 수감된 게 아니라 출퇴근 조사를 받았다. 조사관은 “탈영죄가 더 클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의 호의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번은 조사를 받고 있는데 과장인 듯한 대위가 들어와 무어냐고 묻는다. 조사관은 “중립화입니다”했다. 대위는 별것이 아니라는 듯 나가버린다. 내 느낌에 당시 중립화는 남북협상론보다 덜 당했던 것 같다. 5·16세력이 어떤 잣대였나 누가 한번 조사해볼 만하다.

방첩대에서의 조사는 무사히 끝났다.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문제 삼지 않기로 된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도 군인 신분이란 덕을 본 것 같다. 또 5·16 후 몇 개월이 지났으니 기세도 약간은 누그러졌을 것이다. 군대의 벌은 형벌이라기보다는 일단 기를 꺾는 기합 같은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4·19, 5·16은 어떻든 연속하여 폭발한 화산의 분출과도 같다. 거기에는 민주주의, 경제발전, 남북통일 등에의 국민의 간절한 염원이 응결되어 있다. 자유당 정권의 통일론은 북진통일이었다. 조봉암씨의 진보당은 거기에 용감하게 대항하여 평화통일론을 내세워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다. 4·19 후 통일에의 염원이 분출하여 물꼬를 이룬 것이 혹은 남북협상론이고 혹은 중립화론이다.

50여년이 지난 지금은 남쪽에 의한 북의 흡수통일론이 압도적이다. 그것이 북한 궤멸론으로도 나타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의 햇볕정책은 지금 매우 수세에 몰리고 있다. 통계 숫자를 나열할 필요도 없이 북 체제의 완전한 실패는 너무나 분명하다. 다만 문제는 북을 일시에 파멸로 몰아넣는 것과, 서서히 스스로 변하게 유도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민족적인 입장에서 지혜로운 것이냐는 방법론상의 문제일 것이다. 그것이 솔로몬의 지혜란 옛이야기에 있어서와 같이 지극히 중요하다.

4·19 공간의 남북협상론이나 중립화론은 지금 재생시킬 수 없다. 시대가 변해도 엄청 변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일부 시각은 지금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남북협상론은 남북대화론으로 바뀐 것이다. 점진적인 평화적 접근을 위해서 끊임없이 대화를 하여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무력통일, 흡수통일, 북한궤멸… 모두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남재희 언론인
중립화론은 그 자체로는 나이브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주변 열강의 대치상태 속에서 끝내 대립만을 조장하는 역할을 할 수만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중간조정자” 운운, 말로 해서는 안 되고 묵묵히 꾸준하게 도모해나갈 방향을 발설하는 성급함을 보였다. 그러나 아주 장기적으로는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그러한 방향의 역할을 알게 모르게 꾸준하게 추구해나가야 하리라고 본다. 그 무렵 나는 통일고문과의 청와대 오찬 때 노 대통령에게 “명(明) 청(淸) 교체기에 광해군이 추구한 외교가 현명했다는 학자들의 연구가 있다”고 언급한 바도 있다.

얼마 전 한국에 들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북과 다시 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은 그런 당연한 이야기가 생소하게 들리는 경직된 상황이다.

4·19와 5·16의 시기는 지각이 움직인 듯한 격변의 시기로 회상된다.

남재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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