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12.27 19:00 수정 : 2016.12.27 19:23

백낙청 교수 특별 기고

새해에도 가만히 있지 맙시다.

박근혜 퇴진이 끝나지 않아서만이 아닙니다. 촛불혁명은 대통령의 퇴출을 넘어 불평등과 불공정이 청산되고 정의가 바로 서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퇴진의 전망이 굳어질수록 ‘이젠 우리가 알아서 해줄 테니 가만있으라’는 소리가 다시 들려옵니다. ‘좋은 헌법 만들어줄 테니 그것으로 새세상 만들기의 출발점을 삼으면 된다’라거나, ‘정당들이 알아서 후보를 공천할 테니 국민은 정신 차려서 좋은 사람을 뽑으라’는 식이지요.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조용히’ 기다려보자는 목소리는 거의 수그러들었습니다. 국회 표결 바로 이튿날인 12월10일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100만이 넘는 인파가 ‘즉각 퇴진’을 다시 한번 외쳤고, 더 추워진 17일과 24일의 제8차, 9차 집회에서도 국민의 명령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조기 개헌’과 ‘즉각 퇴진’은 물리적으로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개헌부터 하자는 주장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물론 새세상을 만들려면 새세상에 걸맞은 헌법도 마련해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개헌을 언제 어떤 식으로 할지를 미리 밝히고 민심의 검증을 받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1) 대선 이전의 조기 개헌, 2) 개헌 논의 시작 후 새 정권에서의 개헌, 3) 지금은 개헌 논의 자체에 반대라는 세가지 입장이 ‘개헌 대 반개헌’이라는 양분법으로 처리되어 혼란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조기개헌론자일수록 자신의 구체적인 개헌 구상을 빨리 내놓아야 마땅한데 대부분 원론적인 입장표명에 머무는 것도 혼란 요인입니다. ‘개헌세력’의 몸집을 부풀리려는 정치적 타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지금 당장에 해보고 안 되면 2018년 6월까지 한다’는 국민의당 당론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도 조기개헌론자와 개헌 신중론자를 한 지붕 안에 모아보려는 정략이 개입한 것 아닐까요? 그렇다고 제1야당의 선두주자가 애초에 주장했듯이 개헌 논의조차 말자는 것이 반드시 지공무사한 처사였는지도 의문입니다. 결선투표제 도입마저 반대하던 모습이었기에, ‘3자 필승론’ 내지 ‘4자 필승론’의 불길한 그림자를 느끼는 사람도 있었고, 어차피 결선투표는 없을 테니 조속한 단일화에 동의하라는 압박 전략이라는 의혹을 사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다음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0일 오후 열린 `박근혜 정권 끝장 내는날‘ 7차 촛불집회 본집회에 앞서 시민들이 사전집회를 열고 있다.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촛불은 호헌운동이자 ‘이면헌법’ 폐기의 시작

2016년 촛불혁명의 두드러진 한 특징은 민주공화국 헌법을 주권자 국민들이 지켜낸 헌법수호운동이라는 점입니다. 현행 헌법을 끝까지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의 호헌은 아니지만 헌법 제1조 등 민주공화국의 골격을 규정한 조항들을 짓밟고 망가뜨린 대통령과 그 친위세력을 탄핵하고 응징함으로써 헌법을 지켜내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실현할 개헌과는 별도로, 헌법이 안 지켜지던 나라를 헌법이 지켜지는 나라로 바꾸는 한층 본질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헌법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 꼭 박근혜 일당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당시에도 그랬지만 특히 한국전쟁 이후 정전협정체제 아래 분단이 고착되면서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와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하여 국민주권과 갖가지 기본권 조항의 효력이 정지될 수 있다는 ‘관행’이 일종의 ‘이면헌법’으로 존재해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뿌리이며 1961년 이래의 군사독재를 허물어뜨린 87년 체제도 제거하지 못한 한국 사회의 질곡입니다. 그것이 87년 체제하의 민주화 과정에도 태생적 한계로 남아서 결국 낡은 부패세력의 대대적 반격을 허용했습니다. 그리고 수구세력이 일체의 비판을 ‘종북’으로 몰아치며 ‘편안히’ 국정운영을 해오던 끝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곪아터진 것입니다.

이면헌법은 성문화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회의 개헌작업 대상도 아닙니다. 그 폐기는 이면헌법에 기대어 국정을 농단하며 사회를 황폐화하던 자들을 촛불혁명 같은 범국민적 울력으로 축출하고, “글자로 있던 헌법 제1조를 이젠 온 국민이 노래 부르며, 온몸으로 써내려가고 있는 시대”(한인섭 <‘주권자혁명’ 시대로 행진하기>, 한겨레 2016.12.17)에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완전한 폐기에 이르려면 더 많은 공부와 작업이 필요하겠지만요. 아무튼 실제 개헌작업도 주권자의 그러한 혁명적 성취를 존중하고 계승하는 자세로 진행될 때만 국민의 지지를 받을 것입니다.

대선후보 선정도 시민토론에 부쳐야

개헌 말고도 국회가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특히 새누리당 잔류파가 100석 미만의 제2당으로 전락함으로써 국회의 개혁입법 작업이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대통령 결선투표제를 압도적 다수로 통과시켜봄직하고, 국회의원 선거의 승자독식제도를 없애거나 대폭 완화하는 선거법 개정의 가능성도 높아졌습니다. 그밖에 검찰개혁, 재벌개혁, 지방자치 강화 등 시급한 의제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장의 촛불은 이미 탄핵 촉구와 저들 의제의 병행추진을 목표로 설정했고 새해 1월을 ‘국민 대토론의 달’로 선포했습니다. 그동안에도 촛불시민은 대규모 집회에만 열심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개인 또는 소집단으로 다양한 정치참여를 해왔으며, 실시간 제보로 국정조사 청문회의 흐름을 바꿔놓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열정과 창의성이 ‘대토론의 달’에도 다양하게 발휘될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시민사회나 다수 지식인들이 아직 정면으로 대하기를 꺼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곧, ‘무엇’을 할 것인가를 넘어 다음 대통령을 ‘누구’로 만들어 그런 과제를 감당할 정부를 이끌게 하느냐는 문제지요. 이 문제가 떠오르는 순간 온갖 힐난과 오해와 혼탁이 몰려올 수 있습니다. 잿밥에만 관심을 돌린다는 비난에서부터 당신은 결국 아무개 편에 선 것 아니냐는 공격에 이르기까지, 전하고는 종류가 다른 난처함을 겪게 마련이지요.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지지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정치권이 자기네 후보를 결정하는 방식 자체가 촛불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시민들의 거대한 노력과 희생으로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치판 전체를 흔들어놓았는데 유독 정당들만은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틀 그대로 당내 경선을 치르고 그렇게 탄생한 서너명의 유력후보 중 하나를 옛날식 그대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제일 덜 싫은 후보라도 찍으라고 들이미는 것은 심지어 상도의에도 어긋나는 일 아니겠습니까.

물론 현실적으로 시민들이 어떻게 개입할지는 난해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 방식이 최선이라고 미리 정해놓는 대신, 이제까지의 촛불혁명이 그러했듯이 다양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실험을 해간다면 시민들 스스로도 종래의 고정관념을 털어내는 자기교육의 과정이 되며 집단지성이 다시금 빛날 것입니다. 촛불집회나 ‘만민공동회’에 주요 후보들을 초빙해서 이야기를 들어볼 수도 있고 규모를 조금 줄여서 한층 차분한 토론과 평가를 해보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나 에스엔에스(SNS) 등을 통한 후속 토론과 검증이 당연히 따르겠지요.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지금 시작하면 민의가 한결 충실하게 투영되는 방안들이 나올 것이며, 직접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를 동시에 강화하고 대의민주주의도 개선하는 선례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법적인 마무리는 각자 헌법기관인 정당들이 법률과 당헌당규에 따라 후보를 공천하는 과정이겠지만, 그 종착점에 도달하기 전에 실제로 어떤 경로를 거쳤는가에 따라 후보자와 정당 모두 국민의 응당한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더 잘 배우고 잘 놀며 잘 싸우는 국민으로

2016년 가을과 겨울 우리 국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라는 세월호 참사 당시의 서약을 이행하며 위대한 시민혁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분노와 슬픔을 간직하면서도 새로운 상황에 맞게 서로 배우고 가르치며 새로운 싸움을 싸웠고 또 즐겁게 놀았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더욱 잘 배우고 잘 가르치며 잘 놀고 일상의 불의와도 더 잘 싸우는 시민으로 진급하십시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특별기고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