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1.20 18:58
수정 : 2015.01.20 18:58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우열반을 편성해 어려운 환경 아이들의 자존심을 짓밟으면서 미래의 승자들을 따로 키우는 것은, 외부자 시선으로 볼 때 반교육적 아동학대다. 우리가 이런 잔혹 행위를 당연시하는 이유는? ‘능력·능률’이라는 이름의 체질화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모든 지배이데올로기들처럼 능력주의는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스트레스, 열등감, 자책을 안고 불안 속에서 떨어야 하는 사회는 단기수익을 더 올릴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침몰로 간다. 인간의 진정한 능력은 남들과의 비교가 아닌 남들과의 연대, 그리고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 독창성으로부터 비롯된다.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
이색 사회로 가면 우리는 늘 그 이데올로기적 표현에 놀라곤 한다. 왜 북한에 가면 무조건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동상에 머리 굽혀 인사해야 하는가? 왜 이란에 가면 여성이 머리를 덮어야 하는가? 왜 러시아에서는 소·독전쟁에서의 승리일(5월9일)이 최고의 명절로 인식되며 소·독전쟁에서의 소련 군대에 대한 과도한 비판적 발언은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남들의 이데올로기적 표현들은 우리 의식과 심하게 다를 경우 늘 비합리적으로 보일 뿐이다. 이슬람 사회라고 해서 왜 여자는 머리를 덮어야 하는가?
맞는 질문이다. 사회의 내부결속 및 지배구조 안정화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늘 억압성을 띠고 있으며 외부자 입장에서 꼭 합리적으로 보일 리도 없다. 문제는, 내부자들에게는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당연한 ‘상식’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북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민족이란 대가족을 위해 싸운 김일성이나 민족을 지켜왔다는 그 후계자들에게 존경심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실은 이런 정서는 예배를 드리는 기독교인의 심정이나 조상의 묘 앞에 제사상을 벌이고 제사를 드리는 효자·효녀의 마음가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연 무신론자나 유교문화권 바깥에서 온 사람에게는 기독교 예배나 제사의례가 북한의 국가의례와 그렇게까지 다르게 보일까? 이데올로기도 문화의 전반도 사실 상대적일 뿐이지만, 특정의 삶의 패턴이나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내부자의 눈에는 그런 상대성이 들어올 리 만무하다.
한국인들은 집 안에서 불이 나도 아이보다 먼저 현대판 신주인 지도자의 사진을 건지게끔 하는 북한 이데올로기가 잔혹하다고 평하곤 한다. 꼭 틀린 말도 아니다. 한데 과연 대한민국의 통상적 이데올로기는 덜 잔혹한가?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부터 학교에서 우반, 열반으로 편성해 대개는 어려운 집안 환경에 문화자본이 부족한 아이들의 자존심을 어릴 때부터 짓밟으면서 미래의 승자들을 따로 키우는 것은, 외부자의 시선으로 볼 때 무엇에 해당하는가? 맞다. 교육 파행이며 반교육적인 심적 아동학대다. 그렇다면 북한인들이 지도자 사진을 극진히 모시는 것을 당연시하듯 우리가 이런 잔혹 행위를 당연시하는 이유는? ‘능력·능률’이라는 이름의 우리들의 체질화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능력·능률’ 이데올로기를 관통하는 심성적 코드는 크게 봐서는 세가지다. 첫째, 부단한 타자들과의 비교를 통한 자율적 자아 발전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능력·능률’ 근본주의 사회에 순응하면 할수록 진정한 의미의 능력인 창조력은 죽어간다. 둘째, 무한경쟁인 만큼 무한공포를 느끼면서 산다는 것이다. ‘무능력자’로 지목돼 낙오될까 봐서 유아기부터 눈칫밥 먹으면서 내심 부들부들 떠는 것은 능력주의 사회의 일상이다. 셋째, 외부 권력자가 하급자에게 심어준 열등감의 내면화, 즉 권력이 지정한 ‘나’의 위치에 대한 수치심이 섞인 순응이다. 투쟁하는 비정규직들의 소식은 매체에서 자주 나오지만 사실 대다수의 비정규직들이 투쟁 대신에 비정규직으로 전락된 자신의 ‘무능’을 자탄하면서 지내야 하는 것은 맹목적 능력주의 사회의 현주소다.
첫째, 대타적 비교를 통한 우열 정하기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개개인이 매일 행하는 자신만의 의례다. 전통사회에서 첫 대면에 세습적 신분과 나이 등을 확인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상대방에 대한 태도를 정했지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세습적 신분 대신에 상대방의 ‘능력’부터 궁금해한다. 어린이부터 서로 부모의 아파트 평수로 표현되는 ‘경제 능력’부터 확인하고 친구로 사귈 것인지 결정하는 게 오늘날 우리 실정이다. 대학생들은 서로의 스펙을 비교하기도 하고, 예컨대 편입생이라든지 지방캠퍼스 학생 등 ‘능력이 모자란다’고 판단되는 상대를 노골적으로 따돌린다. 반대로 화려한 스펙의 소유자 앞에서는 그를 ‘벤치마킹’하여 따르고 싶은 열망을 키운다. 고학력 직장인들은 한국 사회의 주된 문화자본인 ‘영어 실력’이 비교 대상자들에 견줘 떨어지지는 않는지 늘 초조해한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늘 대타적 비교와 내면적 우열 가리기로 보내는 하루하루가 결국 “인력자원 자질 향상”에 기여한다고, 이 현상을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호평한다. 사람이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태어나고 살고 죽어야 한다는 것부터, 잉여가치의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라는 제도의 고유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나’는 ‘나’의 자아를 늘 남들에게 맞추고, 남이 하는 것을 남 이상으로 잘함으로써 남들의 칭찬을 들으려고 발버둥치고, ‘나만의 길’을 생각할 여유라고 갖지 못하는 사회에서 문학이나 예술은 어떤 처지에 있을까? 오늘날 한국 사회라면 김수영이나 김남주와 같은 반(反)주류의 괴짜 시인들이 과연 숨이라도 쉴 수 있을까? 인간이란 상대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태어난다면, 나는 차라리 인간으로 아예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둘째, 부단한 비교에 부단한 낙오의 공포가 따른다. 문제는 항시적인 공포감이라는 게 개인의 정신건강에 치명적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불안과 공포만큼의 보편적 심성도 없지만, 이 부문에서는 대한민국 역시 독보적 세계 1위다. 국내의 직장인 직무 스트레스 피해 비율은 87%로, ‘경제 동물’ 운운하는 일본(72%)에 견줘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불안이 늘어나는 만큼 신자유주의 대한민국에서 계속 증폭되는 게 우울증 유병률이다. 지난 10년 동안 60%나 늘어 이제는 여성 인구의 9% 이상이 평생 동안 한번이라도 우울증에 걸리는 것으로 돼 있다. 우울증에 가장 노출돼 있는 세대는 취직 불안이 심각한 20대와 노후 불안에 편히 잠자기 어려운 50대다. 또 문제는 우울증에 걸리더라도 대다수의 환자들이 병원에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신과에 가면 ‘미친 사람’, 즉 ‘무능력자’로 취급받아 낙오될까 봐서, 혼자 투병해야 하는 사회는 과연 건강한가?
셋째, 대타적 비교에서 늘 자신에게 ‘나쁜 점수’를 준 사람은 결국 ‘모든 게 내 무능력 탓이오’로 일관하며 자신에 대한 배제와 억압, 착취에 맞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개개인의 저항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주된 기능이기도 한다. 즉, ‘무한경쟁 시대를 떠들면서 개인 경쟁력 갖추라’고 설교하는 어용 ‘지식인’들은, 바로 이와 같은 효과를 노린다는 말이다. 문제는 항의해야 할 때에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는 사람의 궁극적 탈출구가 바로 자살이라는 점이다. ‘무능력자 도태’를 외치는 이데올로기의 궁극은, 바로 ‘무능력자’로 지목된 개개인 각자가 알아서 본인의 생명을 거둔다는 것이다. 저성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남유럽 수준의 경제 파탄에 아직 이르지 않은 한국의 자살률이 이미 세계 최악의 경제 참사를 기록하고 있는 그리스의 자살률보다 10배나 높은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스인은 거의 굶는 처지가 돼도 이 참상이 잘못된 경제·사회 구조로 인한 것이라고 알고, 언제든지 남들과 함께 투쟁대오에 참여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내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한탄으로 세월을 보내야 하는 곳에서는 자살만이 저항 아닌 저항의 마지막 형태가 된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
모든 지배이데올로기들처럼 능력주의는 사실상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스트레스, 열등감, 자책을 안고 불안 속에서 떨어야 하는 사회는 단기수익을 더 올릴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침몰로 간다. 인간의 진정한 능력은 남들과의 경쟁적 비교가 아닌 남들과의 연대, 그리고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 독창성으로부터 비롯된다. 획일적 ‘성적순’으로 재단되는 ‘실력’의 저주에서 벗어나 남들과 연대하면서 자기만의 길로 가는 것만이 인간이 살길이다!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