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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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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인권은 시대마다 인간의 평등한 가치와 존엄이라는 출발점으로 돌아가 본질적인 논쟁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문학적 사유, 비판정신, 상상력의 도움이 절실하다. 인권에서의 ‘인간’이 법적 인격(person)이 아닌 휴머니즘 전통의 인간(human)으로 표현된 점도 곱씹어봐야 한다.
인권이라는 주제를 놓고 다양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접근이 가능하다. 인권은 철학으로, 역사학으로, 예술적 감성의 문제로, 정치학으로, 경제학으로, 사회학이나 인류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인문학적 접근이 인권을 풍요롭게 하는 것만큼이나 인권이 인문학의 어떤 측면에 빛을 밝혀 줄 수도 있다.
요즘 인권 인문학이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박경서 외)라는 책까지 나왔다. 인권 관련 모임이나 강연회 같은 데서 인문학과 인권을 조합한 주제를 내거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인권을 인문학으로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대학 커리큘럼에 반영되면서 상당수 대학에서 이미 넓은 뜻의 인문학 관련 과목으로서 인권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외국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어, 오스트레일리아의 모내시대학에는 인문학에 바탕을 두고 인권을 주전공 혹은 부전공으로 공부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인권학 학사’라 하면 얼핏 낯설게 들리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시도다. 인권만큼 인문학 그리고 사회과학의 학제 간 연구에 적합한 분야도 없기 때문이다.
인권에서 인문학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는 인권이 무척 불확정적이고 맥락의존적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아마 나를 포함한 대다수 인권론자들은 간단명료한 정의관으로 선악이 확실히 구분되는 세상을 원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복잡하고 역설적이며 골대가 계속 움직이는, 부조리한 축구경기와도 같다. 아무리 엄밀한 용어로 못박아둔 인권조항이라 해도 시대와 환경이 바뀌고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해석과 주장과 왜곡이 등장하곤 한다. 세계인권선언의 앞쪽에 나오는 노예 조항을 보라.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 노예제도와 노예 매매는 어떤 형태로든 일절 금지된다.” 문자적으로 이보다 더 명명백백한 규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21세기 들어 인간을 상품화하거나 사회적·심리적으로 속박하는 것을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강변하고, 더 나아가 자발적으로 예속을 선택할 ‘자유’를 생계권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일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세계인권선언의 조항을 아무리 외쳐본들 자칫 꼰대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인권은 시대마다 인간의 평등한 가치와 존엄이라는 출발점으로 돌아가 본질적인 논쟁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문학적 사유, 비판정신, 상상력의 도움이 절실하다. 인권에서의 ‘인간’이 법적 인격(person)이 아닌 휴머니즘 전통의 인간(human)으로 표현되어 있는 점도 곱씹어봐야 한다.
인권이라는 주제를 놓고 얼마나 다양한 인문학 그리고 사회과학적 접근이 가능한지 짚어보자. 우선 인권은 철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의 가치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인간 존엄성의 도덕적·윤리적 기초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철학만큼 잘 답할 수 있는 사유체계도 없다. 인권은 역사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근대 시민권이 어떻게 형성되었나, 헌법의 기본권이 어떻게 유린되었나, 시민들의 자유는 어떻게 쟁취되었나, 인권을 억눌렀던 독재시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런 질문 없이 몰역사적이고 정태적이고 이론적으로만 인권을 배울 순 없다. 인권은 예술적 감성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다. 서경식의 말을 들어보자. “국가권력은 (가부장제나 상업주의 권력까지도) 사람들의 감성 밑바닥까지 침투해 통제하려고 하는 법이다. 바로 그 때문에 개개인의 존엄이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감성의 차원에서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다.” 인권은 정치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기본권으로 보장된 인권은 결국 정치인들이 입법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기본권으로 보장된 인권조차 정치적 의지나 대중의 지지가 없으면 휴지 조각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권은 경제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경제·사회적 권리를 위한 부의 재분배를 경제학에서는 어떻게 보는가, 재산권을 기초로 형성된 자본주의 원칙과 사회권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가. 토마 피케티는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 정신을 불평등 연구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인권은 사회학이나 인류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왜 인권침해가 무작위로 발생하지 않고 특정 계급과 특정 계층에서 더 많이 발생하는가, 친족관계로 얽힌 전통사회에서 발생한 집단학살의 문제를 이념적 잣대로만 판단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국가의 실정법으로만 해결하려는 태도는 극히 부분적인 접근에 불과하다.
인권의 창을 활짝 열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새바람을 들어오게 하는 것은 인권의 존재론적이고 해석학적인 이해에 큰 도움이 되지만, 넘어야 할 도전도 적지 않다. 인권을 인본주의 관점에서 본다고 할 때 아주 깊은 차원에서 인간 실존과 고통의 다의성, 복합성, 불확정성, 그리고 역설을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권침해를 최전선에서 방어하고 있는 인권운동가들에게 이런 식의 접근은 한가로운 음풍농월처럼 들릴 소지가 적지 않다.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은 한없이 무자비하고 역겹도록 불합리하며 분초를 다투는 시급함 그 자체인데 어찌 다의성이니 복합성이니 하는 사변적 유희를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우려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본주의의 비판적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인권적 정의를 위한 우군으로 삼는 데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1984년에 다룬 사건이 있다. 문서위조, 은행강도 등으로 실형을 살던 파머라는 수감자가 감방을 강압적으로 압수수색한 교도관 허드슨에게 제기한 소송이었다. 파머는 수색이 자신에게 굴욕감과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 실시되었으므로 부당한 수색·체포를 금하는 연방헌법 수정조항 4조, 적법절차를 규정한 14조를 위배했다고 주장했다. 대다수 판사들이 파머의 주장을 기각했지만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은 반대의견을 냈다. 그는 편지나 사진과 같이 사소해 보이는 개인 물품이 “한 죄수의 인간 존엄성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상상함으로써 파머의 독자성과 개별성”을 인정했다. 스티븐스 판사는 “죄수와 다른 시민들의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그 둘을 잇는 공통된 인간의 관심, 이를테면 가족, 집에 대한 추억, 자기 개선 등에 대한 염려 등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그의 권리를 포용”했다고 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박용준 옮김)에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스티븐스 판사가 헌법 해석만이 아니라 문학적인 ‘분별 있는 관찰자’적 시각으로 법리를 전개할 줄 알았다고 높이 평가한다. 인본주의의 비판적 상상력과 인권존중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만하다.
인문학적 접근이 인권을 풍요롭게 하는 것만큼이나 인권이 인문학의 어떤 측면에 빛을 밝혀줄 수도 있다. 인권 사례는 통상적 인문학에서 찾을 수 없는 현실의 화급성과 즉각성을 증언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인권의 맥락에서 철학, 종교, 역사, 예술을 논할 때 인문학은 실제 정치, 사회, 도덕상의 예민한 쟁점을 다룰 수 있는 살아 숨쉬는 인문학으로 승화될 수 있다. 또한 인권의 도움을 받으면 존엄이니 가치니 정의니 하는 추상적 쟁점에 부합되는 형상화된 실체를 보여주거나 서사적 예화를 제시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재구성된 인문학은 현실 삶의 고통과 모순과 복합성에 눈을 뜨게 해주고, 불명확한 사회 상황을 나름대로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인권 인문학은 우미한 교양으로서의 인문학만이 아니라, 현실 삶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준비시키는 실전 인생론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인권 인문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게 된 학생이라면 법, 의료, 저널리즘, 문예창작, 국제관계, 정치, 국제이해교육, 사회복지, 기업사회공헌, 국제개발 등의 영역에서 독특한 시각을 갖춘 인재로 성장할 잠재력을 갖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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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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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통찰은 모든 인권 지지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이성적으로 인권의 논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공상과 공감, 휴머니티를 위한 능력을 갖추는 게 좋다. 그런 능력이 없으면 “정의를 통해 말할 수 있기를 추구했던 ‘오랫동안 말이 없던’ 목소리들은 침묵 속에 갇힐 것이며, 민주적 심판의 ‘태양’은 그만큼 장막에 가려질 것”이라고 누스바움은 경고한다. 인권은 시적 정의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고, 인문학은 고통 앞에 중립적이지 않은 인권의 정신을 타투처럼 새겨야 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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