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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1.05 18:50 수정 : 2016.01.05 18:50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새천년개발목표는 유엔의 야심찬 기획이었고 일정 부분 성과가 없지 않았지만 근본적인 한계를 지녔다. 가장 결정적인 결함은 인권의 관점이 크게 미흡했다는 데 있었다. 민주주의, 참여, 인권을 뒷전으로 물린 채,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모델로서의 발전 목표를 답습했던 것이다.

지속가능발전목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우선 인간과 지구와 생태가 다 같은 운명공동체임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물질적 조건의 확보, 발전, 그리고 인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지속가능발전은 우리 시대의 정언명령으로 새겨야 한다.

새해 벽두에 지난가을 유엔정상회의에서 채택되었던 <우리 세계의 전환>을 읽었다. 아마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2030 의제’라는 부제로 더 잘 알려진 문서일 것이다. 왜 하필 이런 글을 골랐던가. 올해 1월1일부터 향후 15년간 인류가 나아갈 목표를 제시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지만 세계적으로는 이미 2030년을 향한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이것을 읽고 새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이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번역하여 널리 보급하면 어떨까 싶다. 작년 발표된 프란치스코 교종의 환경회칙 <찬미 받으소서>는 이미 번역이 나왔다. 이 둘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모임이 전국 방방곡곡에 퍼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다. 앞으로 거시 경제정책이든, 학교와 대학의 커리큘럼이든, 국제연대나 국제활동이든 간에 지속가능발전이라는 화두를 빼고 유의미한 내용을 채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나는 당장 봄 학기부터 수업에서 이 문헌을 가르칠 예정이다.

인류가 구체적으로 경험한 근대성의 표상은 개발 또는 발전이다. 필립 맥마이클이<거대한 역설>에서 지적했듯 개발의 역사는 식민지배와 수탈로 시작되어 제3세계 신생국들의 정책으로 추진되다가, 지구화 프로젝트로 변질된 후, 최근 들어 지속가능 시대로까지 변천해왔다. 따라서 <찬미 받으소서>와 <우리 세계의 전환>은 인류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목전의 현실인식과 규범적 당위를 동시에 보여준다. 지속불가능한 생산과 소비체계, 화석연료, 성장 만능의 경제관념은 이제 패러다임적으로 퇴출 0순위에 속한 썩은 동아줄이다. 우리가 때를 놓치지 않고 새 동아줄로 갈아탈 수 있을까. 거대한 배의 방향을 돌리려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발전 모델을 바꾸려면 익숙한 시스템, 달콤한 습관, 관성적 경로 의존, 기성체제의 인지적 세계관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정치적·개인적 결단, 예컨대 혹성탈출과 같은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지속가능발전목표(SDG)는 21세기 초부터 작년 말까지 진행되었던 새천년개발목표(MDG)의 후속탄이다. 새천년개발목표는 유엔의 야심찬 기획이었고 일정 부분 성과가 없지 않았지만 근본적인 한계를 지녔다. 기초욕구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8개 영역에서 일반목표를 설정했지만 이 목표들이 서로 내적 연관성을 갖지 못한 채 제각기 나열식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각 영역에서 최소한의 정량적 목표치를 설정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최저선을 끌어올리겠다는 목표였으므로 주로 개발도상국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왜 우리나라에서 새천년개발목표가 겉핥기로만 소개되었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결함은 인권의 관점이 크게 미흡했다는 데 있었다. 민주주의, 참여, 인권을 뒷전으로 물린 채,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모델로서의 발전 목표를 답습했던 것이다. 국제개발 현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문제이지만, 주민 스스로의 참여와 결정에 기반을 둔 민주적 발전 모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번에 나온 지속가능발전목표는 만족할 수준은 아니지만 새천년개발목표의 한계를 넘어서려 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우선 유엔 스스로가 인정하듯 준비 과정에서 유엔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철저한 협의와 공론화 과정을 거쳤다. 전세계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이처럼 많이 담긴 문헌도 잘 없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정리해보자. 첫째, 지속가능발전목표는 개도국만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국가가 추구해야 할 목표를 제시한다. 이른바 보편적 접근인 것이다. 그것을 위해 17개 목표와 169개 대상영역을 제시한다. 17개 목표는 빈곤 퇴치, 기근 추방, 건강과 웰빙, 양질의 교육, 젠더 평등, 깨끗한 물과 위생시설, 저렴·청정 에너지, 양호한 일자리, 산업 혁신과 인프라, 불평등 완화, 지속가능 도시, 책임 있는 소비와 생산, 기후변화 행동, 해양수산 자원 보존, 지표면 보존과 생물 다양성, 공정하고 평화롭고 포용적인 사회, 목표 이행을 위한 전지구적 동반자 관계 등이다. 이 목표들은 우리나라에도 해당되고, 반드시 달성해야 할 의제다.

둘째, 지속가능발전목표는 전통적 개발 패러다임을 넘어 변혁적 관점을 강조한다. 이 목록들이 단순히 경제발전을 통한 물질적 개선을 넘어 ‘5-P’에 바탕을 둔 근본적 의제라는 것이다. 사람(people), 지구(planet), 번영(prosperity), 평화(peace), 동반자관계(partnership)를 전일적으로 추구하며, 기존의 시스템을 넘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비전이다. 셋째, 인권의 총체성을 강조하는 목표다. 이 점이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인권친화적 문헌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전문에서부터 “모든 사람의 인권을 실현”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조약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비전을 다룬 8조는 “인권과 인간존엄, 법의 지배, 정의, 평등과 불차별을 보편적으로 존중하는 세상을 꿈꾼다”고 담대하게 선언한다. 17대 목표 중 결론에 해당하는 16대 목표를 보자. “지속가능발전은 평화와 안보 없이 실현될 수 없으며, 지속가능발전이 없을 때 평화와 안보는 위험에 처한다. 새로운 발전의제는 정의에 대한 평등한 접근성을 제공하고, 인권(발전권 포함) 존중에 기반을 둔 평화롭고 공정하고 포용적인 사회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한다.”

넷째, 지속가능발전을 위해 평등과 반차별이 모든 발전의 핵심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모든 나라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혹은 여타 견해, 민족 혹은 사회적 출신 배경, 재산, 출생, 장애 또는 여타 조건에 따른 그 어떤 구분도 없이” 모든 사람의 모든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증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못박는다. 이제 차별 금지는 인권뿐만 아니라 발전의 영역에서도 절대적인 가치로 인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발전과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재원 마련에 있어서 개도국들의 형편을 고려한 “공통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CBDR) 원칙이 적시되었다. 잘사는 나라에 더 큰 부담 의무를 지운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지속가능발전목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우선 인간과 지구와 생태가 다 같은 운명공동체임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물질적 조건의 확보, 발전, 그리고 인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동안 국제개발협력이나 인도적 지원 활동 분야에서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개념을 은연중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경제개발을 정치에서 분리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식의 탈정치적 관점이 성행했다. 이는 발전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아니고, 국제적 기준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지속가능발전은 21세기 전세계 모든 나라에서 실천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정언명령으로 새겨야 한다. 최근 영국의 경제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 교수가 방한한 자리에서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이 질문을 던졌다. “한국 경제는 언제까지 성장해야 충분한가.”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그것은 무엇을 위한 충분함인가에 달려 있다. 성장이 과연 그 공동체의 필요성을 해결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먼저 그 공동체가 원하는 필요가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이 소장은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정리한다. “경제성장 자체가 절대적인 목표가 될 수 없으며, 무엇을 위한 성장인지를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성찰하고 토론해야 한다.” 지속가능발전목표는 우리 사회가 그러한 성찰과 토론을 벌일 수 있는 지성적, 실천적 프레임을 제시하고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지난달 이 난에서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철없는 시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생각이 다른 견해를 비판하더라도 기본 예의를 지켜야 하는 점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새삼 글쓰기의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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