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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9.20 18:15 수정 : 2016.09.20 19:26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국제인권법의 발전사를 짚어보면 현대 인권담론의 특징과 한계가 드러난다. 유엔헌장 제정 과정에서 인권은 뜨거운 감자와 같았다. 미국, 소련, 중국, 영국은 소극적이었고, 남미, 인도의 대표, 엔지오들은 헌장에 권리장전을 넣자고 주장했다.

국제인권법은 ‘법’이 될 수도 있고, 강대국들의 화투장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 국제인권법은 ‘법’ 외의 다른 역할도 많이 수행한다. 지방자치 현장에서, 교육 현장에서, 노동 현장에서 국제인권법을 창의적으로 번안하여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지난 1월 방한했던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 마이나 키아이는 한국에서 평화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지난 수년 동안 계속 후퇴했다고 지적했다. 경찰은 의견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도 유엔 기준에 맞추겠다고 했다. 백남기 농민에게 공식사과도 하지 않은 경찰이 왜 유엔 기준에 대해선 립서비스라도 했을까. 유엔 기준이란 유엔에서 만들어진 국제인권법 그리고 국제관습규범을 합한 인권준칙 전체를 가리킨다. 오늘날 국제인권법은 전세계에서 인권담론의 교과서로 간주된다. 국제인권법의 원조인 국제인권규약이 제정된 지 올해로 꼭 50년이 된다.

국제인권법의 발전사를 분석하면 현대 인권담론의 특징과 한계가 드러난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유엔헌장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인권은 뜨거운 감자와 같았다. 미국, 소련, 중국, 영국은 인권을 언급하는 데 소극적이었고, 남미 국가들, 서구의 몇 나라, 인도의 대표, 그리고 엔지오들은 헌장에 권리장전을 넣자고 주장했다. 결국 헌장에 인권이란 말을 넣었지만 일반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었다.

유엔총회는 1946년 6월 경제사회이사회 내에 유엔인권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한다. 인권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국제인권장전을 만드는 일이었다. 여기서 또 의견이 갈렸다. 미국, 소련, 중국, 유고슬라비아는 구속력 없는 선언을 선호한 반면,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영국은 구속력 있는 협정을 원했다. 결국 먼저 선언을 끝낸 후 이어서 협정을 제정하자는 칠레, 이집트, 프랑스, 우루과이의 중재가 성공했다. 1948년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바로 그날 유엔총회는 인권위원회가 즉시 구속력 있는 인권법을 만들라고 촉구했다. 유엔총회는 1950년에 시민적·정치적 권리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가 서로 연결되고 서로 의존한다는 결의안 421호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국제인권법에서 두 종류의 인권을 분리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냉전의 이념대결에다 한국전쟁까지 겹쳐져 그런 주장이 힘을 얻었다. 두 권리들의 성격이 다르므로 접근 방식도 달라야 한다는 현실적 고려도 작용했다. 당시만 해도 시민적·정치적 권리는 국가의 개입 자제와 사법부의 결정으로 보장될 수 있는 소극적 인권이고, 경제적·사회적 권리는 국가의 개입과 정책적 판단으로 보장될 수 있는 적극적 인권이라는 식의 단순논리가 통용되었다. 유엔총회는 1952년 규약을 둘로 나눈다는 결의안 543호를 내놓았다. 이렇게 분리된 규약의 초안이 1954년 발표되었지만 그것을 심의하는 데 또 기나긴 시간이 걸려 유엔은 1966년에야 비로소 두 규약을 채택할 수 있었다. 그 후 각 규약당 35개국의 비준서가 기탁되는 데 또 십 년이 흘러 두 규약은 1976년에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그해 유엔은 사상 최초로 다자간 조약에 의해 만들어진 인권법이라고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

국제인권규약의 중요 쟁점들을 보자. 첫째, 두 규약의 1조는 공통적으로 “모든 인민의 자결권”을 다룬다. 세계 모든 인민이 정치적 지위를 자유로이 결정할 권리가 있고, 그것에 기반하여 “경제·사회·문화적 발전을 자유로이 추구한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은 규약 제정 당시 탈식민주의적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초국적 자본이 국가의 경제발전과 사회·문화정책을 좌우하는 21세기의 눈으로 보면 경제지구화는 그 자체로서 반인권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둘째, 자유권규약의 ‘이탈 금지’ 조항은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공의 비상사태가 오더라도 절대 침해될 수 없는 권리들을 열거한다. 생명권, 고문이나 노예제도 금지, 법인격 인정, 사상·양심·종교의 자유, 소급처벌 금지 등이 그것이다. 또한 국가가 시민의 생명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한 6조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자유권위원회는 국가가 핵전쟁과 제노사이드 등 대규모 폭력사태로부터 시민의 생명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고 이 조항을 해석한다. 세계인권선언 17조의 재산 소유권은 자유권규약에서 제외되었다.

셋째, 사회권규약은 특정한 경제체제를 전제하지 않는다. 시장경제, 국가통제경제,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불문하고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규약에서 인정된 권리들의 완전한 실현을 ‘점진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라는 2조의 해석 문제가 있다. 경제·사회적 권리를 일거에 달성하긴 어려우므로 형편을 봐 가며 조금씩 늘리자는 식의 뉘앙스가 풍기는 번역이 나와 있다. 이렇게 되면 반복지 정책에 면죄부를 주는 셈이다. 외교부의 공식 번역본도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권위원회의 유권해석에 따르면 ‘progressively’라는 말에는 국가가 국민의 최소한의 기본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고, 그런 조처가 후퇴해서는 안 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즉, ‘전향적·지속적으로’가 정확한 해석인 것이다.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규약 2개(그리고 선택의정서)를 합친 3대 문헌을 ‘국제인권장전’이라고 부른다. 데이비드 와이스브로트는 국제인권장전이 “유엔 가입 국가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인권 의무에 대한 가장 권위있고 포괄적인 문헌”이라고 강조한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유엔헌장은 공연장, 세계인권선언은 작곡가, 국제인권규약은 연주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인권규약이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첫째, 과거의 국제법이 국가의,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국가 사이의 약속이었다면, 국제인권규약은 각국의 민초들이 자신의 국가와 국제사회에 대해 자기 권리를 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한 파격적인 국제법이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보면 말 그대로 ‘국가가 뒤집힐’ 정도의 사건인 셈이다. 둘째, 인권을 국제 차원에서 제도화했다. 국제인권규약 이전에는 인권운동이 천부인권이나 세계인권선언의 도덕적 호소력에 의존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인권규약이 나옴으로써 국가를 상대로 법적 책무를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셋째, 국제인권규약은 국제인권법 체제의 모태이자 그 후 여러 국제인권법들의 모델이 되었다. 예를 들어, 여성차별철폐협약(1979), 고문방지협약(1984), 아동권리협약(1989), 이주노동자권리협약(1990), 장애인권리협약(2006), 강제실종협약(2006)은 거의 모두 국제인권규약의 형식과 이행 방식을 따르고 있다.

국제인권규약이 나온 뒤 국제인권법 체제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국제인권운동에서는 국제인권법 비준 운동이 아주 중요한 활동이었다. 현재 세계에서 168개국이 자유권규약에, 164개국이 사회권규약에 가입해 있다. 한국은 1990년에 두 규약을 비준했다. 미국은 1992년에야 자유권규약을 비준했고, 사회권규약은 서명만 해놓은 상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하지만 오늘날 국제인권법이 실질적인 인권보장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 하는 실효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국제인권‘법’을 국내법처럼 이해하거나 그렇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많다. 국제인권법은 외견상 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중앙권력이 부재한 국제관계의 맥락 속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인권이 인간 존엄성의 보장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규범성을 내세우지만, 국제인권법의 실제 구속력은 느슨하기 짝이 없다.

요컨대, 절대적 규범성과 미약한 구속력의 모순적 동거가 국제인권법의 특징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인권에 큰 기대를 거는 사람일수록 인권이 국제 차원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모습에 실망하기 쉽다. 국제법학자 에릭 포즈너는 국제인권법은 법이라기보다 특수한 형태의 정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가 활용하기 나름으로 국제인권법은 ‘법’이 될 수도 있고, 강대국들의 화투장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 국제인권법은 ‘법’ 외의 다른 역할도 많이 수행한다. 지방자치 현장에서, 교육 현장에서, 노동 현장에서 국제인권법을 창의적으로 번안하여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반세기 전에 뿌려진 씨앗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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